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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코닉 그 자체, 배우 윤여정

On March 1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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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 모델’ 필요 없어요.
 각자의 삶을 사세요”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배우 윤여정(76세)을 만났다. 작은 체구의 노배우는 촌철살인 화법으로 좌중을 순식간에 압도했다. 특유의 유머와 내공 깊은 속내까지, 그와의 인터뷰는 재미있는 철학책을 읽는 것과 같았다. 그가 한국 영화로 복귀하는 것은 독립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 이후 4년 만이다. 그사이 영화 <미나리>(2021)로 오스카를 품에 안았고, 연이어 애플 TV+의 글로벌 프로젝트 <파친코>(2022)를 통해 세계적인 배우가 됐다.

그런 윤여정의 국내 스크린 복귀작은 <도그데이즈>다. <도그데이즈>는 반려견을 통해 연결되면서 변화하는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를 그린 옴니버스영화다. 극 중 윤여정은 은퇴한 후 반려견 ‘완다’와 생활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민서’를 연기했다. 특유의 당당하고 세련된 매력으로 전형성에서 탈피한 현대적인 노년의 캐릭터다. 유해진, 김서형, 다니엘 헤니와 호흡을 맞춘다.

“시나리오도 역할도 안 봤다. 오직 감독만 봤다. 내가 아끼는 연출자다.” 윤여정의 복귀 이유는 간단했다. 그 아끼는 연출자는 바로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2018)으로 인연이 있던 김덕민 감독이다. 김 감독은 당시 조연출이었다. 윤여정은 김 감독의 입봉작을 함께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는 요즘 영화 홍보를 위해 유튜브 프로그램까지 출연하며 김 감독의 든든한 지원사격에 나섰다. 인터뷰에 나선 그는 심드렁했지만 후배를 위한 마음만큼은 비장해 보였다. 그 마음이 따뜻했다.

“지름길은 없다. 열심히 연습할 뿐”

한국에서 영화 작업은 오랜만이다. 어떻게 지냈나?
평범하게 쉬고 있었다. 지난해 6월까지 <파친코> 촬영을 한 뒤 건강검진을 받으며 작정하고 쉬었다. 이 나이에 해외를 오가며 일한다는 게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더라. 사실 더 쉬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영화로 빨리 인사드리게 됐다.

이 작품을 선택한 배경이 궁금하다.
오직 감독과의 의리로 선택한 작품이다. 사실 이 나이에 시나리오도 좋고, 캐릭터도 좋고, 감독도 좋은 작품이 오는 경우가 드물다. 산 좋고 물 좋고 정자까지 좋은 곳이 어디 있겠나. 오직 김덕민 감독과의 의리로 선택했다. 내가 믿는 친구다. 김 감독과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만나 전우애 같은 게 있다. 김 감독이 19년이나 조연출 생활을 해서 가슴이 아팠고, 입봉작에 무조건 참여하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섭외를 당할 줄 몰랐다.(웃음)

배우로서 철칙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때그때 바뀐다. TV 드라마를 할 때는 적어도 전작과 비슷한 역할은 지양하려고 한다. 요즘엔 사람을 보지 시나리오를 보고 작품을 선택하지는 않는 것 같다. 결국 사람이더라. 사실 이제 난 정리할 시간이다. 그럼에도 일을 하고 있다는 게 감사하다. 그래서 생각보다 일을 하는 데 있어 고민이 많지 않다. 나이가 주는 여유다.


나에게 자존감은 중요하다. 친절과는 또 다르다.
 친절과 비굴을 혼돈하는 사람이 있는데,
난 친절한 사람은 못 돼도 비굴한 사람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누구한테 잘 보여 뽑히는게 싫었다.
그냥 잘해서 뽑히고 싶었다.


배역과 싱크로율은 어느 정도인가?
애초엔 배역 이름이 ‘윤여정’이었다. 김 감독이 수완이 좋다. 푹 쉬고 싶었는데, “선생님, 이건 하셔야죠. 이름이 윤여정이라 다른 사람을 캐스팅할 수 없어요” 하더라.

그래서인지 영화 속 대사가 실제 선생님이 했을 법한 대사가 많더라. 애드리브도 있었나?
나는 대사를 수정하는 배우들을 싫어한다. 작가가 며칠 밤을 새워가며 고치고 또 고친 글을 바꾸면 안 된다. 옛날에는 소설가들이 대본을 많이 썼다. 살얼음판 같은 시절이었다. 당시엔 애드리브로 대본을 고친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나는 구식 배우라 여전히 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특히 김수현 작가의 작품으로 훈련받은 배우들은 절대 그런 걸 안 한다.

<도그데이즈>는 반려견을 통해 인간관계를 맺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강아지에 대한 추억이 있나?
강아지를 한 번 키운 적이 있었는데 도망을 갔다. 그 강아지를 찾으려고 1년을 매달렸는데 결국 못 찾았다. 강아지를 키우는 건 아이 하나 키우는 것과 똑같다. 이제 나도 늙고 병들어 내 몸도 건사하기 힘들다.

1966년 TBC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그때와 지금,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을 것 같다.
그 시절엔 당연히 시집을 가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는 얘기는 반세기 전 얘기다.(웃음) 그래서 잠깐 연기 생활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반추해보면 당시 다른 연기자들은 연극이나 연극영화과 출신이 대부분이었는데 나는 아니었다. 그 때문에 열등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빨리 시집가서 잘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아시다시피 잘 안 됐다. 그러곤 다시 이쪽으로 오게 됐다. 굉장히 감사했다. 내가 만약 대기업 임원이었다면 사표를 내고 그만둔 사람을 다시 대기업 임원으로 받아주겠나. 안 받아준다. 감사한 마음이 커서 어떤 역할이든 열심히 했다. 이제는 살 만큼 산 나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감독을 돕고자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물론 감사하지만 그렇다고 현장에서 짜증을 안 내는 건 아니다. 이상한 거 시키면 짜증 낸다.(웃음)

지금까지 해온 역할 중 가장 어려운 역할은 무엇인가?
감독과 안 맞을 때가 가장 어렵다.

<미나리>도 그렇지만 <파친코>라는 작품도 지금껏 회자되곤 한다. 출연하게 된 과정도 궁금하다.
소설을 좋게 읽기도 해서 내가 하고 싶다고 한 작품이다. 그런데 그쪽에서 오디션을 보라기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역할이 좋았다. 내가 맡은 ‘선자’라는 인물은 김치 장사를 하면서도 자존감이 있는 여자였다. 공부를 많이 하고 돈이 많다고 자존감이 있는 건 아니다. 자존감은 자존심과는 또 다르다. 내가 그 자존감을 표현할 수 있겠다 싶었다.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삶과도 일맥상통한다.
맞다. 나에게 자존감은 중요하다. 친절과는 또 다르다. 친절과 비굴을 같이 가져가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친절한 사람은 못 돼도 비굴한 사람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누구한테 잘 보여 뽑히고 그런 게 싫었다. 그냥 잘해서 뽑히고 싶다. 그래서 극 중에서 김치 장사를 하는 선자에게도 내 정신을 넣고 싶었다.

쉴 때는 어떤 시간을 보내나?
미련 없이 쉰다. 책을 자주 읽었는데 요즘 들어 조금 슬픈 게 집중이 잘 안 된다. 분명히 다 읽고 다음 페이지를 넘겼는데 전 페이지의 내용이 기억이 안 난다. 자괴감이 들기도 했는데, 결국 되는 대로 살기로 했다. 기억이 안 나면 다시 읽으면 된다.

윤여정에게 힐링은?
좋은 친구들과 와인 마시며 수다를 떨 때가 좋다. 덧붙여 늙을수록 외로워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외로움도 연습을 해야 하는데 난 워낙 혼자 있는 걸 좋아해서 외로움에는 자신이 있다. 독립된 삶을 좋아한다.

평생 연기를 해왔다. 윤여정에게 연기는 어떤 의미인가?
나는 배우로서 특별한 목표가 없다. 그저 오래 하니까 일상이 됐다. 일상을 못 살면 죽는 거다. 책에서 자기 일을 하다가 죽는 게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누군가는 “무대에서 죽겠다”는 극적인 말도 하곤 하지만 나는 그런 성격은 못 된다. 하지만 인간에겐 일상을 이어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롤 모델로 선생님을 꼽는 배우가 많다.
내 실체를 몰라서 그렇다.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다. 내 생각은 그렇다. 각자 자기 인생을 살아야지 꼭 롤 모델이 있을 필요가 있나 싶다. 언젠가부터 롤 모델이라는 단어가 유행어처럼 쓰이는 것 같다. 나도 롤 모델이 없었고, 후배들도 없기를 바란다. 윤여정이라는 배우는 한 사람이면 된다. 나는 내 연기를 하고, 그분들은 그분들 연기를 해야 한다.

후배 배우들에게 연기 조언을 해주는 편인가?
나는 연기 학원 선생님이 아니다.(웃음) 사실 난 조언을 못 하는 사람이다. 조언은 공자님 같은 사람이 하는 거다. 옛날에 CF에도 나온 말이 있지 않나.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내 것을 하다 보면 세계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릴 때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탔다.
그때는 내가 진짜 잘난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닌 걸 알게 됐다.
그걸 아는 나이에 큰 상을 받아 감사하다.
상이 주는 허망함과 아무 의미 없음을 아는 나이이지 않나.


바로 이런 솔직한 화법과 유머가 젊은 세대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있다.
늘 솔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정직한 것과 솔직한 건 다르다. 솔직함으로써 무례할 수 있기에 이 경계선을 잘 타야 한다. 그래서 솔직한 것이 자랑은 아닌 거 같아 늘 고민이다. 품위 있게 늙으려고 노력한다. 유머 감각은 내가 어려서부터 힘들게 살아서 의식적으로 ‘웃자’고 생각했다. 인생이 힘들다는 걸 알아 즐겁자고 하는 농담이다.

좋은 어른이란 어떤 것일까?
좋은 어른이 아니라서 모르겠다. 사람들이 날 롤 모델로 치켜세우기도 하는데 사실 난 그런 거 안 믿는다. 세상을 많이 살아봐서 안다. 안 속는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한다. 체력 관리의 비결도 궁금하다.
10년 전부터 주 2~3회씩 트레이너와 꾸준히 운동한다. 트레이너가 나더러 우등생이라고 하더라. 난 성실하지 않은 꼴을 못 본다. 배우의 일은 육체노동이다. 혹한 직업이다. 현장에서는 나를 경로 우대해줄 수 없다. 그래서 평소에 잘 쉬고 운동하며 에너지와 체력 관리를 한다.

데뷔 이후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나?
그런 건 없다. 새로운 역할보다 ‘어떻게 다르게 할 것인가’를 연구한다. 주위에 미모든 재능이든 타고난 사람이 많다. 그런데 나는 타고난 게 없다. 그걸 일찍이 깨달아 열심히 했을 뿐이다.

그런 노력 끝에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그건 불가사의한 일이었다.(웃음) 결국 지름길은 없는 것 같다. 타고난 게 없어서 무지 연습하고 대사를 외운다. 타고난 재능을 가진 피아니스트 조성진도 죽었다 깨어나도 하루에 4~5시간 연습을 한다더라. 재능이나 재주는 잠깐 빛날 수 있지만 유지는 꾸준히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궁금하다. 상을 탄 뒤에 달라진 점이 있나?
나가서 조사해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이렇게 인터뷰 자리에 많은 기자가 와준 것부터가 달라진 점이다.(웃음) 해외에 나가면 어디를 가나 ‘아카데미 위너’에 대한 존중이 굉장해 놀라울 때가 많았다. 그리고 예전보다 들어오는 대본이 많다. 그렇다고 너무 많지는 않고, 이 나이에 비해 많다. 대부분 주인공인데, 인생을 많이 산 사람으로서 오히려 씁쓸했다. 배우로서 활동을 쭉 해온 사람인데 상을 탔다는 이유로 주인공으로 등급을 올려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오래 연기를 했지만 이런 스타 대접을 받진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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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에게 상의 의미도 궁금하다.
어릴 때 데뷔작인 영화 <화녀>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탔다. 그때는 내가 진짜 잘난 줄 알았다. 세상은 내 것이고, 내가 연기를 좀 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걸 알게 됐다. 그걸 아는 나이에 상을 받아 더 감사하다. 상이 주는 허망함과 아무 의미 없음을 아는 나이이지 않나.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 일, 감사하고 기쁜 일, ‘기쁜’ 사고라 생각할 수 있는 감사한 나이에 상을 받아 좋다.

요즘 영화 산업이 어렵다. 영화계 선배로서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작은 영화가 많이 제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땅덩어리가 작은 이 나라에서 작품에 몇백억 제작비를 들이는 건 너무 과하다. 나는 보잘것없고 늙은 사람이라 여러분이 아는 세상과 다를 수도 있다. 해외 작품들과 견주려면 제작비를 투자하는 것도 맞지만, 돈을 아껴 썼으면 좋겠다. 내가 출연료를 많이 받는 배우가 아니라 질투 나서 그러는 건 아니다.(웃음) 다양성 있는 작은 영화가 많이 나오길 바란다.

현재 차기작은 결정됐나?
반쯤 얘기가 오간 작품이 있다. 시나리오를 보고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다. 할머니·할아버지들 얘기인데 아주 있을 법한 이야기이고, 그것을 무겁지 않게 풀었다. 노년에 할 수 있는 역할이겠다 싶었다.

배우로서 철칙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때그때 바뀐다. TV 드라마를 할 때는 적어도 전작과 비슷한 역할은 지양하려고 한다. 요즘엔 사람을 보지 시나리오를 보고 작품을 선택하지는 않는 것 같다. 결국 사람이더라. 사실 이제 난 정리할 시간이다. 그럼에도 일을 하고 있다는 게 감사하다. 그래서 생각보다 일을 하는 데 있어 고민이 많지 않다. 나이가 주는 여유다.

CREDIT INFO
취재
하은정 기자, 곽희원(프리랜서)
사진
CJ ENM
2024년 03월호
2024년 03월호
취재
하은정 기자, 곽희원(프리랜서)
사진
CJ E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