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트렌드’라는 공식은 오래됐다. 이제 유행이라고 하기도 민망 할 정도로 한옥에 대한 인기와 선호는 날마다 달라지고 있는 셈. 서울 사대문 안의 궁 주변 삼청동, 북촌, 남산골한옥마을뿐만 아니라 지방의 안동하회마을이나 전주한옥마을도 이미 관광지로 유명해져 대부분 한두 곳쯤 둘러보았을 터다. 괜찮은 입지의 개발되지 않은 한옥은 이제 남아 있는 것을 찾기도 어려울 정도다. 여기에는 나이 들어 옛것의 소중함을 찾는 중노년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뉴트로, Y2K 물결과 함께 새로 생기는 숙소와 카페, 복합문화공간은 한옥을 개조하기도 하고, 한옥의 양식과 현대 건축물이 물리적·화학적으로 결합된 형태를 다양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현대적인 것만 외치던 건축의 영역에서 최근 10여 년 사이 한옥의 입지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셈. 그래서일까?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가 이번 칼럼을 위해 여행지가 아니라 먼저 단어를 추천했다. ‘한옥’, 그렇지만 ‘뻔하지 않은 한옥’. 그곳으로 가보자는 것이었다. 아니, 앞서 설명한 대로 전국 방방곡곡 널리고 널린 것이 한옥인데, 그래서 어디냐는 그다음 물음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단박에 ‘전주와 완주’라고 힘주어 답했다. 완주가 전주를 감싸고 있는 형국인 지형적 특성 때문에 거의 하나의 권역으로 엮이는 이곳에 가면 ‘한옥’의 지나간, 지나가고 있는 그리고 지나갈 모든 시간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변.
한옥의 현재
자연과 역사를 품은 한옥스테이의 성지, 완주 아원 고택
그렇다면 이 여행의 시작은 완주 종남산 자락에 위치한 아원일 수밖에 없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아원은 고택을 애정하는 사람들이 남에게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은 비밀스러운 한옥 숙박 여행의 결정체 같은 곳이었다. 천지 사방 하늘과 산과 자신뿐인 것 같은 고즈넉한 힐링 그 이상의 숨과 쉼을 선사하는 공간. 단순히 들르는 곳이 아니라 오롯이 머물며 자신을 들여다보고 비워가고 채워가는 곳. 이곳의 모든 숙소는 비탈길의 경사면을 이용해 지어 대청마루에 앉으면 하늘과 산만 보이는 구조다. 아원 고택 전해갑 대표에 따르면 실제로 아원 고택은 전국 각지에서 각각 다른 모양과 형태의 200여 년 이상된 기와집을 모두 해체하고 분리해 가져와 이곳에서 재조립한 결과물이라고. 그래서인지 단순히 한옥을 흉내 낸 모사품이 아니라 기둥 하나 서까래 하나까지 200여 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과 전통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건물도 건물이지만 빌딩 숲에 둘러싸여 살던 도시인에게 산과 하늘 외에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뷰가 감탄을 자아낸다(뷰가 부동산 금액을 좌지우지하는 도시에서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전망인 셈이다). 대청마루에 앉아 거슬리는 어떤 것 없이 종남산의 능선과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초록빛만 보며 쉬어 갈 수 있다니, 그냥 멍하니 있기만 해도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머무르는 곳이자 이제 잠시 쉬어 가는 힐링 스폿으로!
아원 고택은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이미 정평이 난 곳이었지만 2019년 이후 판도가 또 한 번 뒤집어졌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그해 아원 고택이 포함된 완주 오성한옥마을에 머무르며 ‘서머 패키지 인 코리아’ 영상과 화보를 찍으면서 순식간에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삽시간에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고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 셈. 그 인기와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지금은 숙박 외에 관람까지 가능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원래 아원 고택은 입구를 지나 한옥 숙소 아래의 1층 콘크리트 갤러리를 통해 들어가는 구조다. 좁은 입구를 통해 갤러리에 진입하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일단 신비하고 가느다란 통로에 비해 갤러리 공간은 넓고 개방감이 느껴지며 아주 얕은 물이 있는 바닥이 있다. 개폐식 천장이라 하늘 풍경도 볼 수 있는 형태로, 열린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시간에 따라 갤러리 내에 비치는 햇살이 달라지는데, 해가 기울수록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비라도 내린다면 절경이 따로 없을 듯. 갤러리에서는 1년에 2~3회 현대미술 초대전도 열린다고.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 있는 천장이 나지막한 아늑한 공간이 있는데 아침에는 숙박객을 위한 조식 공간으로, 낮에는 갤러리 입장객을 위한 카페 공간으로 활용한다.
이 갤러리를 통과해 고택을 관람할 수 있는데,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정원의 정면에서 만나는 산책길을 먼저 둘러볼 것을 권한다.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소담한 대나무 숲 산책로가 한여름에는 볕을 막아줘 나무 그늘과 숲 내음을 느끼기에 충분하고, 새벽에는 이슬을 머금은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그 산책길이 끝나는 곳에서 부터 다시 아래로 찬찬히 내려오면 고택 곳곳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탁 트인 사랑채, 선선한 바람이 부는 툇마루에 걸터앉아도 좋지만 가장 인상적인 곳은 산과 하늘이 비치는 연못이다. 현대적인 갤러리의 옥상 공간이자 산자락 고택에 서면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곳. 하늘이 맑으면 푸르름이 담기고, 하늘이 흐리면 구름을 머금는다. 그 근처 어디에 서더라도 연못에 비친 자신의 인생샷을 찍을 수있는 최고의 포토 스폿. 한편으로는 영화 속 몇백 년 전 고택의 연못가인 듯, 전생이 비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신비롭다.
전통 고택과 만난 현대 디지털 미디어 아트의 세계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는 아원이 처음 생긴 십수 년 전부터 이곳이 만들어지는 세월을 옆에서 오롯이 지켜봐온 산증인 중 한 명. 하지만 이번 방문의 이유 중에는 지난해 함평에서 새로 이축해온 서당으로 사용했던 한옥과 함께 세계적인 디지털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작가의 작품이 어우러진 입구 공간을 들러볼 요량이 컸다. ‘제2의 백남준’이라 불리는 이이남 작가가 아원 고택 초입에 새롭게 문을 연 오픈형 갤러리에 전시한 작품의 주제는 ‘다시 태어나는 빛’. 초현대적인 미디어 아트가 전혀 이질적이거나 요란하지 않고 자연의 고요함과 동화되는데, 안쪽 한 면이 거울로 이뤄져 디지털 미디어 아트가 산의 풍경까지 품고 있기 때문일 터. 그래서 이효재 디자이너는 몇백 년 된 고택의 운치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그냥 잠시 휘~돌아보지 말고 오래도록 머물며 만져보고 앉아보고 느껴보길,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꼭 이곳에서 밤과 새벽을 지내며 온전히 자연과 아원의 진면목과 물아일체를 경험해보길 강추한다.
TRAVEL TIP
주소 전북 완주군 소양면 송광수만로 516-7
갤러리 운영 시간 11:00~17:00, 아원 고택 관람 시간 12:00~16:00
문의 063-241-8195
한옥의 과거
전통 산사 문화재를 대중과 나누다, 완주 송광사
절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산사를 떠올린다. 산 중턱의 절이나 그보다 더 높은 산 위의 암자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완주 송광사는 평범한 마을의 평지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대신 절 뒤에 병풍처럼 자리한 산과의 조화는 예술 그 자체. 풍수지리를 잘 모르는 문외한이 얼핏 봐도 이 절의 위치는 명당이구나 싶다. 그 덕분인지 송광사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입구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일자로 배치된 점이다. 또 하나는 대웅전 안에 있는 아미타여래좌상이 국가에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리는 불상으로 유명하다. 봄이면 진입로에 벚꽃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절 뒤편에 연꽃이 만개해 장관을 이룬다. 이번 9월 초에는 올해로 열두 번째를 맞이하는 ‘송광백련 나비채 음악회’가 열리니 사계절 둘러봐도 좋은 곳임에 분명하다. 가을밤 사찰에서 열리는 클래식 연주회의 정취야말로 얼마나 신선한 모습일지! 송광사는 올여름부터 ‘대웅전의 벽화 이야기’ 등을 회차별로 다루는 인문학 강의 도 시작했다. ‘전통산사 문화재 활용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이 행사까지, 완주 송광사는 사찰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변화해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TRAVEL TIP
주소 전북 완주군 소양면 송광수만로 255-16
문의 063-243-8091
“요즘 트렌드는 다채로운 이종 컬래버레이션입니다. 아원처럼 고택과 미디어 아트, 전북대학교 한옥학과처럼 가장 전통적인 한옥의 해외 수출, 클래식 음악과 사찰의 결합 등 다양한 시도가 결국 한옥에 문화적인 시너지를 낼 것으로 기대합니다.”
by 이효재 한복 디자이너
한옥마을에서 느끼는 궁중의 정취, 전주경기전
전주 여행을 가서 전주한옥마을에 들렀다는 이야기는 많이들 하는데, 정작 초입에 위치한 전주경기전은 놓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먼저 이곳을 설명하자면 1410년(태종 11년)에 임금이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왕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을 봉양하고 제사를 지내는 전각을 짓고 어용전이라 했다고 한다. 전주경기전은 왕조의 발상지라 여기는 전주에 세운 전각으로, 세종 때 붙인 이름.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됐던 것을 1614년(광해군 6년)에 중건했다고 한다. 사실 이 경기전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경기전 내부의 어진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고. 하루 5회 정도 해설 투어를 하니 그 시간에 맞춰 방문한다면 유익한 정보까지 덤으로 얻는 시간이 될 터. 경기전 내에는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된 전주 사고도 있는데, 대부분 타 지역 사고들은 임진왜란 중에 화마에 소실됐지만 전주경기전 내 사고는 보존됐다고 한다. 전통 한옥의 결정체가 임금이 거처하던 궁이라고 한다면 선대 임금을 모시던 이곳 역시 사찰과 마찬가지로 단순 주거가 아닌 옛 건축물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곳으로, 생각보다 넓고 볼거리가 많다. 전주한옥마을에 들른다면 이곳에서 마시는 차 한잔은 의미가 남다를 듯하다.
TRAVEL TIP
주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
운영 시간 09:00~18:00 문의 063-281-2788
“해외에서 한옥을 짓겠다고 의뢰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선택이지 않습니까?
자랑스러운 우리의 고품질 주거 시스템이자 전통인 한옥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지금까지처럼 앞으로 남은 인생을 기여하고 싶습니다.
한옥이야말로 자랑스러운 K-컬처니까요 ”
by 남해경 전북대학교 교수
한옥의 미래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옥의 산실, 전북대학교
대학교를 굳이 들를 필요가 있을까?’ 사실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가 이곳이 한옥의 미래라고 칭송하며 꼭 들러야 한다고 얘기했을 때 반신반의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옥으로 지은 전북대학교의 정문을 본 순간 그 생각이 기우였음을 금세 깨달았다. 가로로 길게 뻗었을 뿐만 아니라 2층으로 이뤄진, 웅장한 자태의 전통을 품은 대학교 입구라니. 소위 말하는 유명한 대학교의 심벌 같은 정문보다 어쩌면 더 큰 울림과 압도감을 선사하니 말이다.
전북대학교 내에는 카페부터 크고 작은 전각, 강의동 등 다양한 한옥 건물이 존재한다. 넓은 부지로 유명한 전북대학교에 한옥이라는 문화가 덧입혀지니 전주라는 이미지와 잘 어울리고 다른 곳에 없는 유니크한 모습까지 더해져 시너지를 내는 셈. 구도심 한가운데에 자리한 전북대 캠퍼스는 길이 사방으로 뻗어 나 있고 둘레길이 있어 산책하기 좋은 코스로 유명한데, 이렇게 한옥 정문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통 건축물이 생기니 일부러 둘러보러 오는 사람과 관광객까지 늘어났다는 후문이다. 전주라는 지역적 특징과 전북대학교의 한옥 건축에 대한 애정의 영향인지 캠퍼스와 인접한 덕진공원에는 한옥으로 된 연화정도서관이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한다.
“문화는 결국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에서 파생된다고 봅니다. 전 세계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K-컬처도 결국 K-의식주에서 파생된 것이고,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본류가 결국 의식주라고 한다면, 한국의 전통 의식주가 가장 잘 보존되고 다채로운 곳이 바로 이곳 전주와 완주이자 전라북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by 김관영 전라북도 도지사
평생을 전통 건축에 매진해온 한옥 지킴이, 남해경 교수
한옥 관련 대학 하면 전북대학교가 떠오르는 데는 캠퍼스 건축물도 크게 일조하고 있지만, 이 건축물들은 전북대학교에 한옥학과를 만들어 지키고 발전시켜온 남해경 교수의 역할이 더없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친환경 고품격 주택으로서 한옥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는 시점에서 더욱 주목받는 남해경 교수는 한옥 설계에 대한 교육뿐만 아니라 문화재의 보수, 한옥의 해외 진출과 수출까지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30여 년 넘게 한옥 건축의 발전에 매진해온 그의 한옥에 대한 열정은 비견할 다른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지금까지 한옥을 수출하거나 수주받은 지역은 미국과 뉴질랜드, 베트남, 필리핀 등 다양하다. 한옥 수출이 처음 시작된 것은 2020년 알제리 국립대학으로부터 한옥을 지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서다. 이후 2021년 미국 조지아주에서 한옥 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수주하면서 한옥 전각뿐만 아니라 한옥 호텔 등 한옥 수출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 남 교수는 이윤만을 생각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손사래를 친다. 한옥은 주재료인 나무에 대한 계속적인 관리와 보수가 필요한데 심지어 한옥을 수출한 특정 나라는 무료로 AS를 하러 들를 정도라니 그 애정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렇게까지 한옥 수출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한국의 우수한 주거 문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라고. 대부분의 수주 요청은 한국 드라마나 한류 문화의 인기 때문인데 K-콘텐츠 속 한옥의 매력에 빠져 건축을 의뢰하기 때문에 문화 전도사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이 일을 지속하고 있다고. 앞으로도 계속 한옥 설계, 시공 관련 후학을 양성하고 싶다는 남해경 교수의 굳건한 의지라면 한옥의 미래는 더없이 밝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