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의 남자 정성일이 밝히는 20년 무명 생활과 가족 이야기
신드롬급 인기를 끌었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는 유년 시절 폭력으로 영혼까지 부서진 한 여자가 온 생을 걸어 치밀하게 준비한 처절한 복수와 그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지난해 12월 30일 파트1 공개 후 2개월여 만인 올해 3월 10일 파트2가 공개돼 완벽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배우들의 열연과 흡입력 있는 전개로 수많은 유행어를 탄생시켰으며, 국내외로 엄청난 파급력을 보이며 최고의 흥행 화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부진했던 김은숙 작가도 배우 송혜교도 이 작품 덕에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단연 화제의 주인공은 배우 정성일이다. ‘나이스한 X새끼’, ‘으른 섹시’, ‘재벌 사약남’, ‘잘생긴 척하는 유재석’ 등등 한 작품으로 이토록 많은 별명 부자가 된 배우가 또 있을까? 김은숙 작가는 정성일에게 “한국의 양조위가 되세요”라는 덕담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한국의 양조위가 되세요”
복수극을 순식간에 바둑 멜로물로 바꾸는 그의 ‘멜로 눈빛’은 치명적이다. 분명 스킨십 하나 없는 장면임에도 끈적한 ‘으른 섹시미’가 철철 넘친다. 김은숙 작가의 말대로 목소리가 너무 좋으니 그 어떤 말도 명대사처럼 들린다.
알려진 바와 같이 정성일은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서는 이미 유명 인사로 어디선가 분명 본 듯한 얼굴이다. 2002년 영화 <H>로 데뷔해 영화 <쌍화점> <사랑의 확신> <배우는 배우다>, 드라마 <돌아온 일지매> <비밀의 숲 2> <산후조리원> <우리들의 블루스> 등을 거치며 우리 곁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부유하게 자랐을 것 같은 매끈한 이미지와 반대로 빗물로 배를 채우던 어려운 어린 시절을 거쳐 대세 배우로 등극한 사실이 알려져 더욱 화제가 되고 있다. 최근 박찬욱 감독이 제작하는 영화 <전, 란>의 출연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더 글로리>가 막을 내렸다. ‘나이스한 X새끼’에서 빠져나왔나?
진즉에 나왔다.(웃음)
인기를 실감하나?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의 수영 선생님이 사인을 부탁했다는 말에 뿌듯하더라. 아들이 선생님 이름을 몰라 사인을 못 해드렸다. 사실 나는 배우이지만 가족들이 노출되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SNS도 자제한다. 최대한 나의 영향을 받지 않는 환경에서 키우고 싶다.
<더 글로리>의 ‘하도영’ 역할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무엇인가?
하도영은 극 중 중립적인 입장의 인물이다. 그 포지션을 지키는 데 집중했다. 특유의 긴장을 줘야 하는 장면이 많았다. 혼자 겉돌지 않기 위해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캐릭터를 구축하기가 어렵지 않았나?
처음엔 어려웠다.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지고 있고 교육도 잘 받았을 인물인데 작가님이 한 줄로 설명하신 ‘나이스한 X새끼’를 표현해내야 했다. 외국 작품에서 봐왔던 귀족들의 일상을 많이 참고했다. 매너나 습관 등 몸에 밴 그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극 중 ‘최혜정’(차주영 분)에게 에르메스 가방을 선물하는데, 혜정이의 친구들에게 혜정이가 좋아하는 것을 물어본 뒤에 사주는 식이다. 그런 식의 배려와 매너, 디테일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에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다. 실제로 마지막 부분에서 ‘박연진’(임지연 분)에게 소리 지르는 것 외엔 감정 표현하는 신이 거의 없었다. 처음 대본을 읽고 그림을 길게 봤다. 줄곧 감정을 더 자제하며 연기했다. 그래야 감정을 드러내는 마지막 부분이 시청자들에게 더 와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대본을 받고 느낌이 어땠나?
확신이 있었다. 다음 대본이 기다려질 정도로 너무 재미있었다. 한 번에 읽히는 대본이었다. 읽으면서 이 대본이 김은숙 작가의 대본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기존의 스타일과 많이 달랐다. 드라마가 잘될 줄은 알았지만 내가 배우로서 포커스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대 자체를 안 했다. 나 스스로 극에 빠져 있었고, 배역 자체에 몰입돼 잘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명확한 역할이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을 줄은 몰랐다.
<더 글로리>를 보다 보면 하도영이 왜 박연진과 결혼했는지 이해가 안 되기도 한다. 그리고 불륜남의 자식을 끝까지 지키는 것도 그렇다. 연기하면서 이해가 됐나?
연진이를 선택한 건 극 중 대사에도 나왔지만 연진이는 명품 브랜드 디올이 잘 어울리는 여자다. 그리고 적게(짧게) 입었다고 해서 천박해 보이지 않는다. 어느 정도 하도영의 재력에도 어울리고 하도영이 살아온 루틴에서 살짝 벗어나 자극을 줄 수 있는 여자, 심심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밸런스 때문에 연진이와의 결혼을 선택했다. 그리고 불륜남의 자식을 끝까지 지키는 것은 나도 아빠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이해한다. 낳은 정보다 키운 정이 더 크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설득됐다.
바둑 장면도 화제가 됐다.
나는 바둑에 대해 잘 모른다. 촬영을 위해 잠시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기술적인 측면에 대한 교육은 아니었다. 극 중에서 바둑을 둘 때 일어나는 긴장감이 주인공들의 현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둑은 색깔마저 확실한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게임이고 또한 명확한 답이 있다. 명확한 것을 좋아하는 하도영의 성격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하도영이 바둑을 좋아했던 것 같다.
연기할 때 목소리와 발음이 좋다. 바둑으로 비유하면 배우로서 쥐고 있는 흑돌인가?
글쎄, 아직 모르겠다. 답을 찾고 있다. 딕션? 사실 좋은 편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발음이 뭉개져 들린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흑돌을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일희일비 하지 않고 묵묵히 가겠다”
극 중에서는 화보 속 모델처럼 빈틈없이 자신을 꾸미는 캐릭터다. 실제로는 어떤가?
경상도 남자라 그런 걸 전혀 못 한다. 올인원 로션 하나 바르고 자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화면을 보니 관리를 하긴 해야겠더라. 옷도 스타일리스트가 준비해온 걸 입었을 뿐이다. 나야 옷의 라인이 살도록 운동을 열심히 해서 체중 감량을 하는 정도의 노력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몸에 대한 컨트롤 정도였다.
김은숙 작가가 왜 정성일이라는 배우를 픽했다고 생각하나?
작가님이 내가 출연한 드라마 <비밀의 숲 2>를 보고 픽해놓고 대본을 쓰셨다고 들었다. 촬영 들어가기 1년 전에 연락을 받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니 중간에 다른 배우로 교체된 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다.(웃음)
극 중 하도영에게는 두 여자가 있다. 연기하는 입장에서 두 여자를 향한 하도영의 감정도 궁금하다.
극 중 연진이 같은 경우엔 사랑해서 결혼한 여자다. 하지만 이후에는 버티기 힘들 만큼 뻔뻔한 연진이의 모습에 치를 떤다. 실제로 연기하면서도 감정이입이 돼 “지연아, 너 너무 짜증 나”라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다.(웃음) 특히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끄는 장면에선 너무 짜증이 났다.(웃음) 그만큼 지연이가 연기를 너무 잘했다. 그 감정들이 남아 극 말미의 복수 신까지 무리 없이 이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극 중 ‘문동은’(송혜교 분)에게 하도영은 충분히 흔들렸다고 생각한다. 하도영은 세상사 모든 대답을 예상하고 사는 인물인데 동은이만큼은 예외였다. 예상외의 답을 해보는 여자였다. 궁금한 여자였다. 호기심과 설렘이 있었고, 결국 사랑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송혜교 씨를 제외하고 촬영 전에 다 모여 식사 자리를 가졌다. 내가 술을 1년에 열 번 정도 마시는데, 이들과 촬영하면서 1년 치 술을 다 마셨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작품 얘기를 많이 했다. 생활 속에서 적당한 케미가 연기하면서 많은 도움이 됐다.
각 배우 간의 호흡도 궁금하다.
(박)성훈이와 (김)히어라(이사라 역)는 이미 대학로에서 연기 활동을 할 때부터 알고 있었던 배우였다. 잘하는 배우라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차)주영이는 처음 봤는데, 너무 당차게 연기를 잘해 놀랐다. 내가 생각했던 에너지 그 이상을 주는 배우였다. 임지연 은 보다시피 연기를 너무 잘해 현장에서도 감정이입이 돼 짜증 났을 정도다.(웃음) (이)도현(‘주여정’ 역)이는 참 맑은 친구다. 그 맑음이 연기할 때도 표현되더라. 송혜교 씨는 멋있다는 표현이 적당하다. 그동안 매체에서 보던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노력하는 배우였다. 그 이상의 것들을 보여줘 현장에서 그리고 화면을 보면서 놀랐다. 그리고 사석에서는 그 누구보다 털털한 배우다. 그래서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오랜 무명 생활을 버티게 해준 건 가족이에요.
지금 제가 행복한 이유는, 갑자기 유명해져서가 아니라 가족이 행복해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이유도 없었고,
이렇게 열심히 살지도 않았을 거예요.
자신의 연기 중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은?
사실 나는 내가 나오는 장면을 잘 못 본다. 민망하다. 경상도 남자라 그런지 사진 찍을 때 손 하트 같은 것도 못 한다. 해달라고 하면 얼굴부터 빨개진다.(웃음) <더 글로리>를 아내와도 같이 본 적이 거의 없다. 아내가 한 번씩 “하도영 씨!” 하고 부르기도 했지만, 아내 역시 내 일과 관련된 얘기는 잘 안 하는 편이다.
작품이 끝나고 김은숙 작가의 피드백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파트1이 방영된 뒤에 다 같이 자리를 한 번 가진 적이 있었다. 제가 들어가니 “양조위 왔네요” 하시더라. 그러더니 “근데 그거 얼마 못 가고 유재석 됐잖아요”라며 좋아하셨다. 감사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하도영스러운 인물 캐스팅이 많이 오겠지만, 그럼에도 하도영과 같은 인물은 없을 것이다. 잘 선택하라”고 조언해주셨다.
<더 글로리> 이전과 이후의 달라진 점은?
외부적으로는 달라진 게 많다. 지금 이렇게 기자들과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달라진 점이다. 사람들이 많이 알아본다. 대신 배우로서 변화는 거의 없다. 그럴(사람들의 관심에 일희일비할) 나이가 아니라서 늘 해왔던 대로 천천히 신중하게 가보려 한다.
이전엔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2019년 이후 본격적으로 TV 배우가 됐는데, 어떤가? 지금도 간혹 무대에 오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 방송 연기를 했을 때는 그 매력을 잘 모르겠더라. 무대는 한번 시작하면 NG 없이 쭉 이어지는데, 방송은 호흡이 끊겨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매력을 느끼고 있다. 지금도 무대에 오르는 이유? 너무 좋으니까. 나한테 큰 공부가 된다. 연기라는 게 끝이 없다. 무대는 연기자, 연출자, 관객들의 호흡으로 만들어진다. 늘 신선하다.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을 상기시킨다.
극 중 연진이가 주여정에게 “배우자의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어요?”라고 묻는 장면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디까지 용서가 되나?
내 아내가…? 설마… 뭘 해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외도? 모르겠다. 알고 싶지 않다.(웃음) 생각을 안 해봤다.
20대 초반에 데뷔해 어느덧 마흔 중반이 됐다. 그리고 최근에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어땠나?
그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건 가족이었다. 첫 번째도 가족, 두 번째도 가족이었다. 나에겐 돈과 명예보다 가족이 늘 우선이었다. 지금도 내가 행복한 이유는 가족들이 뿌듯해하고 행복해서다. 가족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이유도 없다. 이렇게 인생을 열심히 살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떤 배우로 남고 싶나?
연기 잘하는 배우. 배우에게는 최고의 극찬이지 않나. 물론 외형도 중요하고 비주얼 칭찬도 기분이 좋지만 역시 연기 칭찬이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