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부자’ 아르고 회장과 회동
지난 3월 21일 홍라희 여사가 언론 카메라에 포착됐다. 세계 최대 명품 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수장 베르나르 아르노 총괄회장이 3월 20일 2박 3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는데 홍라희 여사가 장녀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과 함께 3월 21일 저녁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리움미술관에서 맞이한 것.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루이 비통, 디올, 펜디, 셀린느, 티파니앤코, 모엣샹동 등의 브랜드를 보유한 LVMH의 수장으로 ‘명품 대통령’이라고도 불린다. 아르노 회장의 재산은 약 250조원으로 지난해 말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를 제치고 세계 1위 부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아르노 회장은 평소 홍라희 여사, 이부진 사장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홍 여사는 화이트 컬러의 단아한 재킷과 같은 톤의 목걸이를 매치해 우아한 재벌가 패션의 정석을 보여줬다. 이 사장은 디올 브랜드로 추정되는 블랙&화이트 조합의 하운즈투스 체크 재킷을 입었다.
이날 아르노 회장의 방문은 비공식 일정이었다. 하지만 이부진 사장이 같이하면서 최근 신라면세점 상황과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는 시선도 많다. 신라면세점은 이번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면세점 선정 입찰에서 DF1~5구역 복수 사업자로 선정됐다. DF3~4는 패션과 부티크를 함께 운영하는 곳이고, DF5는 부티크 전용 공간으로 세 곳 모두 명품 매장 유치가 필요한 상황. 복층 형태 명품 매장이 들어설 것으로 예상되는데 LVMH 브랜드가 입점해야 매출을 높일 수 있다. 2011년에도 이 사장이 아르노 회장을 설득해 인천국제공항에 있는 신라면세점을 통해 세계 최초로 공항에 루이 비통 매장을 연 바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별세한 지 어느덧 2년 반. 그동안 조용히 지내던 삼성가 ‘안주인’ 홍라희 여사의 대외 활동이 재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홍 여사는 아르노 회장과 회동 3일 뒤인 3월 24일에는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재단법인 아름지기와의 협력 전시로 기획된 <시간의 두 증명-모순과 순리> 전시 개막식에서 전시 축사를 맡았다.
홍라희 여사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미술, 불교 그리고 삼성가의 안주인이다.
그리고 지금도 이 키워드에 맞는 행동반경을 유지하고 있다.
‘조성진 팬’ 호암상 시상식 참석 가능성도
홍라희 여사는 오는 6월 삼성호암상 시상식에도 참석이 기대되고 있다. 삼성호암상은 1990년 이건희 선대회장이 아버지 이병철 창업회장의 호를 따서 만들었다. 학술·예술 및 사회 발전과 인류 복지 증진에 탁월한 업적을 이룬 인사에게 주는 상으로 그동안 시상식 날은 삼성가 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 와병 이후 홍 여사는 불참했다. 그런데 올해는 삼성호암상 예술상에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선정됐다. 홍 여사는 조성진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졌다. 2000년대부터 조성진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했다고 한다. 홍 여사는 지난해 10월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함께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위치한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열린 조성진과 영국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관람하기도 했다.
남편 이건희 회장과 사별한 지 2년 반이 지나는 동안 홍 여사는 슬픔을 뒤로하고 조용히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이건희 회장은 소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미술품을 사회에 기증했다. 이건희 선대회장이 기증한 문화·예술품은 2만 3,000여 점에 달했고, ‘이건희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국내를 돌며 열리는 특별전에는 관객이 몰렸다. 홍 여사는 2021년 7월 ‘이건희 컬렉션’으로 개최된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서 “소중한 문화유산을 국민에게 돌려드려야 한다는 고인의 뜻이 실현돼 기쁘다”고 밝혔다. 또한 2021년 10월에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이 4년 6개월여 만에 재개장했다.
홍라희 여사는 이건희 선대회장의 1주기인 2021년 11월 이재용 회장과 함께 이병철 창업회장의 생가가 있는 경남 의령에서 1박을 한 뒤 양산 통도사를 찾기도 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경남 합천 해인사에 방문해 <디지털 반야심경>을 선물하기도 했다. 이건희 선대회장의 49재를 해인사에서 지냈기에 감사의 차원으로 해석됐다. 홍 여사는 1967년 4월 30일 이건희 선대회장과 결혼했고 2020년 10월 25일 사별했다.
홍라희 여사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미술, 불교 그리고 삼성가의 안주인이다. 그리고 지금도 이 키워드에 맞는 행동반경을 유지하고 있다.
홍 여사의 집안을 빼놓고서는 키워드를 설명할 수 없다. 홍 여사는 이승만 정권 시절 제9대 법무부 장관과 제21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고 홍진기 중앙일보 전 회장의 첫째이자 장녀다. 홍진기 전 회장이 전북 전주에서 판사를 지낼 당시인 1945년 7월 15일 태어났다. 홍 전 회장은 ‘전라도에서 얻은 기쁨’이란 뜻의 ‘라희(羅喜)’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홍 여사의 남동생인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 등 홍 전 회장의 자녀들은 모두 수재였고 홍 여사는 경기여자중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했다. 당시 경기여고-서울대는 남자들의 경기고-서울대처럼 ‘여자 KS라인’으로 유명한 엘리트 코스였다. 홍진기 전 회장은 미술 애호가였고 홍 여사 또한 미술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생이었다.
홍 여사와 불교의 인연은 어머니 김윤남 씨의 영향이다. 어머니는 독실한 원불교 신자였다. 홍 여사 역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고 지금도 불교와 인연이 깊다.
홍 여사는 재계의 여성 불자 모임인 ‘불이회’를 이끌었고, 2010년 법정 스님 입적 당시 밀린 병원비 6,000여 만원을 대납하기도 했다. 2011년 이건희 선대회장과 함께 원불교의 해외 포교 사업을 위해 120억원을 기부하고, 2017년 원불교 수륙재(水陸齋, 불교에서 물과 육지에 있는 영혼을 위로하고자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식)를 지내기도 했다.
불이회에서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의 막내딸이자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의 아내인 박현주 대상홀딩스 부회장을 알게 된 홍 여사는 박 부회장의 딸인 대학생 임세령을 며느리로 낙점했다. 임세령은 1998년 이재용 회장과 결혼했지만 2009년 이혼했다. 슬하에는 1남 1녀를 뒀다.
삼성가의 안주인 역시 집안이 정한 인연이다. 홍 전 회장은 4·19혁명이 일어난 뒤 옥고를 치러야 했는데 수감 중에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이 자주 면회하고 도움을 준 것이 계기가 돼 두 사람은 평생 동고동락하게 된다. 홍 여사는 대학생이던 시절 미술 애호가였던 이병철 창업회장의 전람회 관람을 안내하게 됐고 이때 며느리로 낙점됐다. 결혼 이후 이병철 창업회장이 며느리 홍라희를 미술관 관장으로 낙점하고 매일 10만원을 주면서 마음에 드는 골동품을 사 오라고 시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여전히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인물’
홍 여사는 1995년 호암미술관 관장과 2004년 리움미술관 관장을 맡았고 이후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대모가 됐다. 미술 전문지 <아트프라이스>와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가 매년 설문조사를 통해 선정하는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인물’에서 1위에 오르곤 했다.
우여곡절도 있었다. 홍 여사는 2008년 삼성 비자금 사태로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 관장에서 물러났다. 이후 무혐의 처분을 받고 2011년 복귀해 미술관 운영에 전념했다. 하지만 2017년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돼 이재용 회장이 구속되자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 관장에서 다시 물러났고, 2018년 12월부터 둘째 딸인 이서현 이사장이 리움미술관 운영위원장을 맡아 호암미술관과 리움미술관을 이끌고 있다. 리움미술관은 최근 이탈리아 유명 화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로 화제를 모았다.
한동안 대외 활동을 자제했던 홍 여사는 2020년 10월 이건희 선대회장의 별세 이후 유산상속 과정에서 다시금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건희 선대회장이 별세하면서 삼성그룹 오너 일가가 물려받은 유산은 주식과 미술품, 부동산, 현금성 자산 등 26조원에 달했다.
핵심은 주식이었다. 이건희 선대회장은 삼성생명 4,151만 9,180주(지분율 20.76%), 삼성전자 2억 4,927만 3,200주(지분율 4.18%), 삼성전자 우선주 61만 9,900주(0.08%), 삼성물산 542만 5,733주(2.86%), 삼성SDS 9,701주(0.01%) 등을 남겼는데 자칫하면 자식들 간에 분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법정상속 비율(배우자 1.5, 자녀 1인당 1)대로 홍 여사가 가장 많이 상속하면 삼성 오너들은 홍 여사의 지분을 상속할 때 다시 상속세를 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기에 홍 여사가 상속분을 포기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됐다.
하지만 홍 여사는 삼성생명 지분만 포기했고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삼성SDS 지분은 법정상속 비율대로 상속하기로 결정했다. 삼성생명의 경우 홍 여사의 지분 포기 이후 이재용, 이부진, 이서현이 3:2:1의 비율로 상속받았다. 이재용 회장은 법정상속 비율보다 1,153만 3,107주를 더 상속받을 수 있었고 지분도 기존 0.06%에서 10.44%로 상승하면서 삼성물산(19.34%)에 이은 2대 주주에 오를 수 있게 됐다. 결국 딸들도 챙겨주면서 삼성전자는 아들 몫이라고 나름 인정해준 셈. 그 밖에 이건희 선대회장이 평생 모은 문화재·미술품 2만 3,000여 점은 국가기관 등에 기증하기로 했다.
이 같은 교통정리를 통해 2021년 4월 용산세무서에 상속세로 11조 366억원이 신고됐다. 홍 여사는 3조 1,000억원, 이재용 회장은 2조 9,000억원, 이부진 사장은 2조 6,000억원, 이서현 이사장은 2조 4,000억원가량의 상속세를 부과받았다. 유족들은 상속세 부담을 줄이고자 5년 동안 총 6회에 걸쳐 분납하는 연부연납 방식을 선택했고, 현재 2회를 납부한 상태로 세 번째 납부를 앞두고 있다. 홍 여사는 상속세 납부를 위해 2022년 3월 삼성전자 주식 1,994만 1,860주를 블록딜(시간 외 대량 매매)로 처분하기도 했다. 이에 지분율이 2.3%에서 1.96%로 낮아졌다. 이 밖에 삼성전자 주식 2,270만 5,000주를 하나은행 등에 맡기고 8,500억원을 빌리기도 했다. 이 덕분에 현재 홍 여사는 국내 재계 인물 가운데 주식 담보대출 1위다. 이부진 사장은 6,500억원으로 2위, 이서현 이사장은 3,711억원으로 4위다.
유산 문제가 어느 정도 교통정리되자 홍 여사는 어머니로서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 홍 여사는 지난해 3월 이재용 회장과 나란히 서울 은평구 진관사에서 진행한 이종왕 전 삼성전자 법률고문의 49재에 참석했고, 지난해 4월에는 이재용 회장, 이서현 이사장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기획 전시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을 둘러봤다. 이어 지난해 여름휴가를 이재용 회장과 함께 보냈는데, 이 회장이 이를 직원 간담회에서 밝히기도 했다.
홍 여사에게는 삼성가 안주인으로서 아직 남아 있는 역할이 있다. 이재용 회장의 삼성그룹 지분 승계와 상속세 납부 등도 아직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다. 이에 앞으로 대외적인 노출이 잦아질 수밖에 없다는 시선도 적지 않다.
‘이재용 회장 외가’ 홍라희 여사 일가 스토리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의 아내이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어머니 홍라희 여사의 집안은 명문가로 유명하다. 홍 여사의 아버지 고 홍진기 중앙일보 전 회장은 이승만 시절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홍진기와 아내 김윤남은 4남 2녀를 낳았다. 장녀 홍라희, 아들 홍석현·홍석조·홍석준·홍석규, 막내이자 차녀로 홍라영이 있다.
홍진기 전 회장의 아들들은 모두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했을 정도로 머리가 뛰어났다. 장남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은 중앙그룹을 물려받았고, 나머지 세 아들은 홍진기 전 회장이 TV 부품 회사로 출범했던 보광그룹을 물려받았다. 이후 보광그룹은 차남 홍석조 BGF그룹 회장이 이끄는 BGF리테일과 사남 홍석규 보광 회장이 경영하는 보광 계열로 분리됐고, 삼남 홍석준 보광창업투자 회장은 금융 부문을 독립 경영하고 있다.
장남 홍석현은 경기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산업공학 석사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계은행(IBRD) 이코노미스트,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등을 지냈고 1986년부터 삼성그룹으로 적을 옮겼다. 삼성코닝 상무, 전무, 부사장을 역임하다 1994년 중앙일보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1995년 사장에 올랐고, 1999년 삼성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된 이후 회장에 올랐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딸인 신연균 아름지기 재단 이사장과 결혼해 홍정도, 홍정현, 홍정인 등 2남 1녀를 두었다.
차남 홍석조는 경기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76년 18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 8기로 수료하고 1981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에 임용됐다. 대검찰청 기획과장, 법무부 검찰국 국장,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지냈을 정도로 승승장구했는데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이 터지면서 검사장을 끝으로 법조계에서 물러났다. 2007년 보광훼미리마트의 최고경영자로 취임했고 2012년 일본 훼미리마트와 결별하면서 사명을 보광훼미리마트에서 BGF리테일로, 브랜드명도 훼미리마트에서 CU로 변경했다. 장남인 홍정국 BGF 대표이사 사장이 취임하면서 경영에서 한발 물러난 상태다.
삼남 홍석준은 경기고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86년 노스웨스턴 대학교 경영학 석사를 마쳤다. 1986년 삼성코닝에 입사해 곧바로 이사대우에 올라 업무를 시작했고, 1995년 삼성전관(현 삼성SDI) 상무를 거쳐 2002년 삼성SDI 부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2007년 10월 삼성SDI에서 나와 보광창업투자 회장으로 취임했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홍정환 씨는 2021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딸 서민정 씨와 결혼 7개월 만에 합의이혼을 했다.
사남 홍석규는 경기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고 존스홉킨스 대학교 국제대학원을 졸업했다. 1979년 13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이후 대통령비서실 보좌관, 외무부 기획조사과 과장을 맡다가 1995년 보광에 입사했다. 이후 보광 총괄 전무를 맡았으며 2004년 보광 대표이사 회장에 올랐다. 2015년부터는 휘닉스소재 대표를 맡고 있다.
막내이자 차녀 홍라영은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뉴욕대에서 예술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삼성문화재단 기획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한때는 삼성문화재단 상무를 겸임했다. 2006년부터 리움미술관 총괄부관장을 맡다가 홍라희 여사가 2017년 물러나자 사임했다. 남편은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차남 노철수 애미커스그룹 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