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때 영화 <너 또한 별이 되어>로 데뷔해 50년 가까이 지치지 않고 연기자로 살아가는 윤유선. 20대부터 엄마 역할을 맡았기 때문일까? 윤유선에겐 ‘국민 엄마’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닌다. 이 얼마나 대단한 칭호인가 싶지만, 좀 더 가까이서 윤유선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윤유선은 엄마로 한정 짓기엔 아까운 배우란 사실을 금세 알게 된다. ‘윤다르크’라는 별명답게 할 말 다 하고, 의외로 인맥왕인 데다 은퇴하면 시골에 내려가 과수원을 하는 게 꿈이라는 윤유선을 만났다.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가 시청률과 상관없이 성공한 드라마라는 평을 받고 있다. 소감은?
시청률까지 높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같은 마음으로 작품을 사랑해준 시청자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사랑의 이해>는 마음에 오래 남을 드라마다. 내가 맡은 역할도 좋았지만, 대본이 기다려질 만큼 작품 자체가 너무 좋았다. 소설책 같은 감성이 살아 있다고나 할까? 내 멜로인 양 찍었다.(웃음) 모든 캐릭터가 하나같이 이해됐는데, 특히 ‘안수영’(문가영 분)에게 가장 마음이 갔다. 다들 많이 사랑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아플 일인가? 더 솔직하게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인데 그때는 그런 건가 싶다. 젊은이들이 사랑할 땐 사랑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첫 방송과 마지막 방송을 팀이 함께 모여서 본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팀워크가 좋아 편하게 연기했고, 그래서 애착이 간다.
최근 출연한 드라마 <결혼백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사랑의 이해> 등을 통해 부자 엄마로 캐릭터가 수정되는가 싶다. 아픈 엄마, 죽는 엄마, 가난한 엄마 역할에서 벗어나는 건가? 어떤 역할이 더 좋은가?
이 나이에 예뻐졌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연기할 때가 많았는데, 요즘 여느 여배우들처럼 꾸미고 나오니까 예뻐 보이나 보다. 하지만 차기작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사냥개들>에서 곧 원래(?)의 엄마로 돌아올 예정이다.(웃음) 가난하든 부자든 상관없이 인간적인 캐릭터라면 다 좋지만 워낙 꾸미는 성격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소박한 역할이 조금 더 편하긴 하다.
MBC 예능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별명이 ‘윤다르크’라고 하더라. 국민 엄마, 국민 며느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별명 아닌가? 맡았던 배역 중에 실제와 가장 비슷한 배역은 무엇이었나?
나는 어릴 때부터 옳고 그름을 잘 따졌다.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가 있으면 친구 대신 따질 만큼 똑 부러진 성격이었는데 자라면서 내 주관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게 전부 맞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도 타고나길 정의로운 편이라 티가 나기 마련인지 지인들이 여전사처럼 씩씩하다고 ‘윤다르크’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나랑 가장 비슷한 배역은 MBC 시트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윤유선’일 것 같다. 속마음을 감추지 않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어떨 땐 코믹할 만큼 엉뚱하기도 하다. 무슨 일이든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한테 진심인 캐릭터가 나다.
‘도전 정신’ 하니 JTBC 예능 <뜨거운 씽어즈>가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tvN <인생술집>, MBC <복면가왕> 등 출연했던 예능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많이 본 것 같다. 원래 가수가 꿈이었나? 선후배들과 함께 연기가 아닌 노래로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추는 게 힘들지 않았는지?
<뜨거운 씽어즈>(이하 <뜨씽>)는 김영옥·나문희 대선배님, 동료·후배 연기자들과 함께 합창단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담은 예능이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해 대학 입시 때는 성악과에 지원했을 정도다. 하지만 아쉽게도 직업적으로 노래할 실력은 못 됐던 것 같다. <뜨씽> 출연 제안을 받고 전문적인 보컬 트레이닝을 받을 수 있다는 점과 그걸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출연을 흔쾌히 수락했다. 뭔가를 배우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갔던 학창 시절의 신선함이 느껴져 내내 설렜다. 함께하는 이들과의 경쟁이 아닌 시너지가 충분히 느껴지는 멋진 프로젝트였고, 제작진의 따뜻한 마음이 좋았다. 신영광 PD가 김영옥 선생님을 친할머니처럼 모시고 사랑하는 게 온 마음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이로 일할 수 있는 이 직업이 너무 좋다. 우리의 장점을 찾고 또 찾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래를 찾아준 제작진 덕에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하나의 약속> <아들의 이름으로> <크리스마스 캐럴> 등 사회적 이슈를 다룬 영화에도 출연했다. 망설이지 않았나?
특별히 어떤 입장을 갖고 출연한 건 아니지만, 분명히 있었던 일이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해 고민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이 “앞으로 윤유선 씨 못 보는 거 아닌가요?” 한 적도 있는데 이만하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 않나?(웃음) 흥행이 안 됐어도 막장보다는 낫다.
인맥이 화려한 것은 물론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들과 친한 것 같더라. MZ 세대와의 소통이 기성세대의 큰 숙제와도 같은 요즘,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요즘 애들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이 많던데 사실 나이 든 분들도 사람에 따라 이해 안 되긴 마찬가지다. 오히려 젊은이들의 고민과 갈등이 그때 나의 고민과 갈등과 다르지 않구나 생각하면 그때의 내가 생각나서 좋다. 조언도 편하고. 영화 <둠둠>처럼 작품을 통해 젊은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불편할까 봐 먼저 말을 걸지는 않는데 엄마 역할을 많이 해서인지 젊은 배우들이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편이다. 엄마 같지만 진짜 엄마는 아니니 속을 털어놓기 얼마나 좋은가. 타박하지 않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는 나이다.
자녀들도 제법 컸겠다. 아들딸에게도 좋은 엄마인가?
첫째는 벌써 대학생이 됐고, 둘째는 입시생이다. 내가 좋은 엄마인지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어떤 엄마가 좋은 엄마일지는 자주 생각한다. 지금까지 키워온 방식, 내가 아이들에게 끼친 영향…. ‘이런 것들이 옳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이들에겐 공감해주는 엄마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러려고 노력하는데 성격이 워낙 쿨해 애들은 섭섭할 수도 있겠다 싶다. 대신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공부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인생을 살아보니 좋은 대학에 갔다고 꼭 행복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걸 찾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돈을 벌기 위한 일, 돈을 많이 주는 일, 돈은 안 되지만 좋아서 하는 일 등을 몸소 경험하며 돈은 안 되지만 좋아서 하는 일을 했을 때 제일 즐겁고 성과가 좋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적어도 내가 짜놓은 틀에 맞춰 살라고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엄마가 아님은 확실하다.
중년 이후의 얼굴이 인생을 이야기해준다고들 하지 않나.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
가족이 화목하고, 평생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서 그런가? 결혼할 때 남편이랑 반지 하나, 시계 하나씩만 나누고, 마이너스로 시작해 둘이 열심히 맞벌이하며 메워나갔다. 여유가 생긴 후로도 50대 중반까지 한 번도 일을 쉬지 않았으니 지칠 법도 한데 좋아하는 일을 해서인지 아직도 연기가 즐겁다. 그게 얼굴에 드러나는 거라면 감사할 일이다. 첫째가 막 태어났을 땐 판사인 남편을 따라 부산에 가서 3년을 살았다. 그만큼 가족이 함께하는 걸 중요시하며 살았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일을 했는데 집에 가도 행복하고, 일터에 가도 행복했다. 그렇다고 “전 결혼하고 한 번도 안 싸웠어요”라고 말하는 잉꼬부부들과는 다르다. 의견 차이가 있을 때 아이들 앞에서 숨기지 않고 다투는데 결국 서로에게 익숙해져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가족이란 서로 양보하고 맞추며 사는 것이라는 걸 가르쳐주고 싶었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면서 산다는 말인가?(웃음)
지진 피해를 입은 튀르키예에 기부했다는 기사를 봤다. 봉사 활동도 열심히 하는 것 같던데.
기부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닌데 현지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우러나지 않는 기부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봉사 중 나한테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을 추천한다. 배우라는 직업 덕분에 현지에 찾아가 그들의 어려움을 알릴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참 감사한 일이다. 기회가 닿으면 대부분 수락하는데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도 이런 마인드를 심어줄 수 있게 돼서 좋다. 애들도 어려서부터 기아대책의 ‘한톨청소년봉사단’ 활동을 꾸준히 했다. 좋은 일 하는 데 힘쓰며 살자는 삶의 태도가 남편과 가장 마음이 잘 맞는 면이기도 하다.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보고 싶은가?
“배우가 인생을 잘 살지 않으면 그동안 연기가 다 거짓이 되는 거다”라는 선배들의 말씀을 늘 마음에 담고 산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야만 할 수 있는 직업이 배우라고 생각한다. 배우, 제작자, 스태프… 많은 이들을 만나는 것과 다양한 작품을 만나는 것이 인생을 사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어떤 책을 읽는다고 이렇게 깊은 것을 배울 수 있을까? 크게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법을 깨닫게 해주는 배우라는 직업이 좋다. 내가 공감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다면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하나를 꼽자면, 내 실제 성격처럼 조곤조곤 직언하는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다. 보는 시청자들이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해주네”라며 속 시원해할 ‘사이다 캐릭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