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사 출신들 “재판부 부담 불가피” 우려
SK그룹을 놓고 벌어진 사상 초유의 이혼 재판이 ‘언론전’으로 확전됐다. 2015년 언론을 통해 혼외 자녀의 존재를 밝힌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인터뷰 이후,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작심하고 언론과 이혼 관련 인터뷰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심에서 스스로도 ‘완패’라고 표현할 만큼 만족스럽지 못한 판결을 받은 노소영 관장은 작심한 듯 언론 앞에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노 관장이 선택한 언론은 <법률신문>이었다. 이 또한 의미가 있다. 법조계 인사들이 보는 전문지이기도 하고, 이혼 판결과 관련한 법적인 지점에 대해 항의하고 또한 알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법률신문> 측은 제삼자로부터 노 관장의 인터뷰 의사를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 관장은 이 인터뷰에서 <법률신문>과의 인터뷰를 생각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법을 믿고, 법에 호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는 법률 문외한이지만 상식과 법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갖고 있다. 1심 판결에 큰 실망을 하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법과 시스템을 믿는다. 그 시스템을 이끌고 계신 법률가분들에게 항소를 하면서 작은 호소라도 드리고 싶었다.”
앞서 최태원 회장은 2015년 혼외 자녀의 존재를 자인하며 노 관장과는 성격 차이로 이혼하겠다고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이어 2017년 7월 이혼 조정을 신청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해 소송으로 이어졌다. 최 회장은 유책 배우자로 노 관장이 이혼에 반대한 탓에 재판은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이혼에 반대하던 노 관장은 2019년 12월 이혼에 응하겠다며 맞소송(반소)을 내면서 위자료 3억원과 최 회장이 보유한 그룹 지주사 SK㈜ 주식 중 42.29%(650만 주)를 지급하라고 요구하면서 두 사람의 재판은 ‘세기의 이혼 사건’이 됐다.
그리고 1심 패소 후 나온 노소영 관장의 작심 인터뷰. 인터뷰 주요 발언과 현직 판사, 판사 출신 변호사들의 시선에서 이 발언들의 의미를 분석해봤다.
# 노소영 관장 주요 발언들
지난해 12월 6일 열린 1심에서 재판부는 최태원 회장이 노소영 관장에게 위자료 1억원, 재산분할로 665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노 관장이 요구한 ‘최태원 회장 소유 SK그룹 주식의 분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녀 키우고 재단 운영한 몫 1.2%, 받아들일 수 없어”
노소영 관장은 앞서 언급한 <법률신문>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5조원 가까이 되는 남편 재산에서 제가 분할받은 비율은 1.2%가 안 된다”며 “34년의 결혼 생활 동안 아이 셋을 낳아 키우고, 남편을 안팎으로 내조하면서 사업을 현재의 규모로 일구는 데 제가 기여한 것이 1.2%라고 평가받은 순간 저의 삶의 가치가 완전히 외면당한 것 같다”고 털어놨다.
“1심 재판은 완전한 패소였다”며 “이번 판결로 앞으로 기업을 가진 남편은 가정을 지킨 배우자를 헐값에 쫓아내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재판 결과에 대한 불만도 토로했다. 이어 “유책 배우자에게 이혼을 당하면서 재산분할과 위자료를 제대로 받지도 못하는 대표적 선례가 될 것이라는 주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참담하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로 수십 년을 함께한 배우자로부터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이혼을 요구받으면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선례를 만들었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비판했다.
역할이 있었던 부분도 강조했다. 노 관장은 자신을 가사에만 종사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언급하며, “시카고대학 경제학부 박사과정에서 최 회장을 만났을 때부터 미래와 사회에 대한 꿈과 비전을 함께 나눈 파트너였다. 결혼 후 자녀들이 생기자 자연스럽게 저는 육아와 내조를, 남편은 밖에서 사업을 하는 역할 분담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저는 SK의 무형의 가치, 즉 문화적 자산을 향상시키는 데 주력했다. SK 본사 서린동 빌딩 4층에 위치한 아트센터 나비는 기술과 예술을 결합해서 불모지였던 미디어아트 영역을 개척한 SK그룹의 문화적 자산이다. 기술 중심의 미래지향적 기업 이미지와 맞는 영역이다. 시작부터 남편과 의논하며 설립했고 20년 가까이 SK그룹과 협력하며 유지해왔다”며 자신이 관장을 맡아 키운 문화재단의 역할과 의미를 설명했다.
“가정 지킨 배우자, 헐값 축출 가능해져”
‘가족과 여성(아내)’의 의미도 강조했다. 노소영 관장은 “제가 지키고 싶은 것은 돈보다도 가정의 가치”라며 “저의 경우는 보통의 이혼과는 다른 ‘축출 이혼’이다. 쫓겨난 것이다. 1심 판결로 인해 앞으로 기업을 가진 남편은 가정을 지킨 배우자를 헐값에 쫓아내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자녀들의 지지도 밝혔다. 노 관장은 “재판부가 최 회장의 입장을 거의 100% 받아주었다. 1심 판결문을 받아 들고 나서 재판을 더 받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란 생각도 했다”며 “딸과 함께 차를 타고 눈길을 운전하면서 ‘엄마 혼자 너무 힘드네. 여기서 멈출까’라고 물어봤다. ‘엄마, 그만하면 됐어’라는 말을 듣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만큼 모든 마음을 꺾는 판결이었다”며 이어 “그런데 딸이 ‘여기서 그만두는 엄마가 내 엄마인 것은 싫다’고 대답했다. 그때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고 강조했다.
# 1심 재판부 판단 어땠길래?
노소영 관장은 1심에서 “SK그룹을 일구는 데 일조했기 때문에 최태원 회장의 지분 40% 이상을 재산분할해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노 관장 측이 요구하는 “SK 주식은 최태원 회장의 특유재산”이라고 판단했다. 최 회장이 1994년 11월경 아버지인 고 최종현 SK 선대 회장으로부터 증여받은 2억 8,000만원에서 비롯된 대한텔레콤 주식이 이후 인수, 합병, 액면분할, 증여 등을 거치면서 현재 SK 주식이 된 것이라고 봤다. 이 과정에서 노소영 관장의 기여분은 없다고 본 것이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 등에서 “가사 노동 등에 의한 간접적 기여만을 이유로 사업용 재산을 재산분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별개의 인격체로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사업체에 과도한 경제적 영향을 미치게 될 염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인정된 노 관장의 분할 재산 몫은 665억원.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지급해야 하는 위자료(1억원)를 포함하더라도, 최 회장의 자산(3조원 추산)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다.
노소영 관장의 인터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최태원 SK그룹 회장. 변호인단을 통해 강하게 반발했다.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 당사자 일방이 언론을 이용,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는 태도에 심히 유감스럽다”며 “제1심 판결은 재산분할에 관한 새롭거나 특이한 기준이 아니며 이미 오랜 기간 확립된 법원의 판단 기준을 따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당사자가 한 인터뷰 내용도 수년간 진행된 재산분할 재판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주장됐던 것이며, 제1심 재판부가 이를 충분히 검토해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인터뷰) 보도는 재판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위법한 보도이기 때문에 법적조치 필요성에 대해 검토할 예정”이라고 강경 대응도 예고했다.
# 노 관장 작심 발언 전략은? 판사들 반응 보니
이런 가능성을 몰랐을 리 없는 노소영 관장. 왜 이렇게 ‘작심 인터뷰’를 결정했을까? 노 관장은 인터뷰를 한 이유에 대해 “1심 판결에 큰 실망을 하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법과 시스템을 믿는다”고 설명했다.
법조계에서는 ‘항소심(2심)을 앞두고 새 재판부에 보내는 메시지’라는 분석이 나온다. 가정법원 판사 경험이 있는 한 변호사는 “재판이 진행 중일 때는 재판부가 당사자들에게 ‘언론 플레이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하지만, 지금은 항소심이 시작하기 전인 ‘공백 시즌’이지 않냐”며 “의미를 재벌들의 이혼 사건이 아니라, 바람난 남편에게 재산도 대부분 뺏긴 아내의 지점으로 강조해 여론의 지지를 받아보려 한 부분도 고려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항소심에 도움 되는 인터뷰인가”라는 질문에는 법조인들의 의견이 나뉘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현직 판사는 “인터뷰 내용을 보면 여성과 주부를 대표하는 부분이 있는데 자칫하면 2심 판단이 ‘페미 VS 반페미’의 구도 속 비난을 받을 수 있겠다는 우려도 들었다”고 털어놨다. 사건의 본질은 재산 형성 과정, 재산분할의 역할 입증인데, 노 관장의 인터뷰 때문에 2심 재판부가 어떤 판단을 하더라도 다른 의미로 결과가 확대해석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또 다른 현직 판사 역시 “공인이기에 시민들의 알 권리도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돈에는 꼬리표가 달려 있지 않다. 과거에 노소영 관장이 최태원 회장에게 준 돈이 어떻게 회사 성장에 기여했는지 등 입증해야 할 게 많다”고 풀이했다. 기업은 부동산과는 사뭇 다른 개념이기에 보통의 부부처럼 접근해 ‘기여했다’고 볼 수 없다는 지적이다.
그는 “함께 살기 위해 고른 부동산의 가격이 오르고 이를 부부가 이혼 시 나누는 것은 함께 기여한 게 맞지만, 기업의 경우 살아남기 위해 이뤄진 수많은 의사결정이 있다”며 “SK그룹이 성장하는 동안의 경영 의사 판단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다만 여론을 만드는 지점에서는 의미가 있다는 평가도 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인 한 변호사는 “재판부도 결국 사람이기 때문에 여론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며 “내가 만일 사건을 맡았다면 이번 인터뷰의 반응이 어떠한지, 노소영 관장 측 변호인단이 어떻게 2심 변론 전략에 이를 반영할지를 유심히 지켜볼 것 같다”고 말했다.
유사했던 사건 또 있다
강제 소환되는 이부진&임우재
이혼소송 과정서 임우재 언론 접촉
특유재산을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재벌이 물려준 주식은 ‘분할 대상’이 아닌가? 법조계에서는 자연스레 ‘물려준 주식(경영권)’이 화두가 되고 있다. 그리고 앞서 이혼한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임우재 전 삼성전기 상임고문이 강제 소환되고 있다.
임우재 전 고문은 이혼소송을 제기하면서 1조 2,000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분할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와 2심 재판부 모두 ‘이부진 사장의 손’을 들어줬다.
두 재판부 모두 이부진 사장이 물려받은 주식은 특유재산으로 보고 분할 대상에서 제외했다. 1심(86억여원)과 2심(141억여원) 모두 결혼 이후 형성된 부동산 등의 자산을 놓고 분할 규모를 정했다. 2심에서 55억원이 늘어난 것은 재산분할 결정 비율이 15%에서 20%로 인상된 덕분이기도 했다.
통상적으로 이혼 재판에서 재산분할청구의 대상은 혼인 관계에서 공동으로 형성된 재산에 한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각 개인이 혼인 전 가지고 있었던 특유재산은 분할 대상이 아니다. 물론 특유재산이라고 해서 분할 대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결혼 후, 배우자의 특유재산 유지나 증식에 협력했다거나 감소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를 막아냈다면 역시 재산 기여분을 인정받을 수 있다.
1심 재판 후 패소한 측에서 인터뷰를 한 구조까지 유사하다. 임우재 전 고문 역시 1심 재판에서 패소한 뒤,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의견이 전달된 바 있다. 임 전 고문은 2016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부진 사장과 이혼소송을 하는 이유에 대해 “내가 여러 차례 술을 과다하게 마시고 아내를 때렸기 때문에 아내가 이혼을 결심했다는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패소 후 ‘아들에게 아버지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 하소연
결혼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털어놨다. “원래 결혼하지 않고 물러나려 했으나 동생 이서현이 결혼을 서두르자 ‘언니 먼저 결혼해야 한다’는 이건희 회장의 의사에 따라 결혼했다”며 “이건희 회장님의 손자이기에, 아들이 어려웠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에게 아버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인터뷰 후폭풍은 적지 않았다. 이부진 사장 측이 “가사소송법 위반”이라며 강력 반발하기도 했다. 당시 임 전 고문 측 변론을 맡았던 남기춘 변호사 등도 모두 사의를 표했다.
다만 2심에서 재산 인정 비율이 조금 늘어났는데, 이는 ‘인터뷰 덕분’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앞선 대형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는 “임 전 고문이 사업에 이바지한 것이 없다는 판단은 동일했지만, 재산분할 비율을 올려준 것은 ‘덜 잘못했다’고 본 것 아니냐”며 “인터뷰 기사 노출이 알게 모르게 부담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부진&임우재 이혼 사건과 최태원&노소영 이혼 사건 모두 ‘물려받은 주식’이 재산분할의 핵심인 상황에서 ‘경영 참여’는 오히려 임우재 전 고문의 비중이 더 컸다는 분석도 나오는 상황. 앞선 현직 판사 중 1명은 “주식을 사고파는 행위를 계속하는 것도 아니고, 통상적으로 물려받으면 그대로 소유하고 있는 게 재벌들의 경영권 개념 아니냐”며 “경영에 기여해 주식의 가치를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고 할 지점은 노소영 관장보다 임우재 전 고문에게 더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두 사건을 비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