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이미지,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만 같은 눈빛. 배우 박효주와 인터뷰를 마치고 적어둔 그녀의 인상이다. 지난해 SBS 드라마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이하 <지헤중>)에서 시한부 연기로 대중을 만난 박효주는 캐릭터를 담백하게 소화해 호평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박효주는 생활 연기에서 손꼽히는 명배우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인다. 이번엔 모성애가 깊은 엄마이자 선택의 기로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역할로 대중을 만난다. 영화 <미혹>은 셋째 아이의 죽음 이후 새로운 아이를 입양한 부부에게 벌어지는 기이한 이야기를 조명한다. 입양한 아이에게 죽은 아이가 보이는가 하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밀을 알고 있는 이웃의 접촉까지 이어진다. 박효주는 아이를 잃은 엄마 ‘현우’를 연기한다. 실제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그녀이기에 이번 작품에서 선보일 생활 연기에 기대감이 모인다. 영화 <미혹>은 그녀의 필모그래피에 있어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코로나19로 인해 찬 바람이 불었던 극장에서 다시 관객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유독 긴장이 돼요. 2020년 코로나19 초기를 끝으로 무대 인사를 다니지 못했어요. 당시에도 인원 제한으로 소규모의 관객을 만났는데 ‘당분간 이 장면을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천천히 관객석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모인 모든 분과 눈을 마주치려고 했어요. 여전히 안전한 상황은 아니지만 무대 인사를 다닐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뭉클해요. 관객을 만난다는 의미만으로도 마음의 울림이 커요.”
<미혹>에 출연하기까지 큰 결심이 필요했다. <지헤중> 촬영 때 쏟아낸 감정을 회복하던 중 만난 시나리오의 무게가 컸던 탓이다. 박효주는 읽고 있던 시나리오를 덮어두고 한동안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작품인지 자문하며 시간을 보냈다. 결정적으로 출연을 결심한 건 여운 때문이다. 읽었던 시나리오의 내용이 잔상처럼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극 중 현우는 모성애만 강한 캐릭터가 아니에요. 엄마로서, 아내로서 끊임없이 희생을 요구받아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된 인물이었어요. 현우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답답함에 이끌렸어요. 생각해보면 한 번에 읽히는 캐릭터보다 섬세한 감정들을 자극하고 배우가 그 감정을 끄집어내야 하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는 거 같아요.”
<미혹> 제작진은 입을 모아 쉽지 않은 현장이었다고 말했다. 유독 고난도의 촬영 신이 많았던 탓이다. 수중 촬영으로 인한 체력적 소모는 물론 극 중 인물들의 첨예한 감정 대립과 주인공의 고뇌가 돋보여야 하는 작품이었기에 감정선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박효주는 촬영 기간을 “미혹됐다(무엇에 홀려 정신이 차려지지 못하다)”고 표현했다.
“완성된 작품을 보고 ‘우리 모두 무언가에 홀려 찍은 거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했어요. 당시에는 힘든 줄 모르고 촬영을 이어갔어요. 작품에 출연하기로 결정했으면 가진 기량을 전부 쏟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계산하지 않고 제가 선보여야 하는 연기에만 집중했어요. 지금 다시 하라면 못 할 거 같아요.(웃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써주는 스태프 모두 고생이 많았어요. 모두가 한곳을 바라보며 애쓴 결과물이 빛을 보면 좋겠어요.”
최근에 <미혹> 김진영 감독님과 ‘우리가 하는 작업은 일을 넘어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를 나눴어요.
촬영장에선 연기하고, 촬영장 밖에선 연기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을 만나요.
근데 그게 나쁘지 않아요. 연기를 참 사랑하는가 봐요.
연기에 대한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뀐 순간
박효주는 2000년 데뷔, 공백기 없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2년간 켜켜이 쌓아온 필모그래피가 그녀의 내공을 입증한다. 드라마 28편, 영화 24편 등 지금까지 50편이 넘는 작품에서 각기 다른 캐릭터로 대중을 만나왔다. 로맨스 코미디부터 수사극까지 박효주는 현장이라는 놀이터 안에서 매번 새로운 모습을 끄집어냈다. 그녀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궁금해졌다.
“부족함을 채우고 싶은 갈망이요. 성에 차지 않는 부분을 채우면서 활동을 이어가다 보니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요. 평소엔 싫증을 잘 느끼는 편이에요. 하나의 취미에 빠져 깊게 파고들다가도 어느 날 재미없다며 그만둬요.(웃음) 신기하게도 연기는 예외예요. 한 작업을 오래 해도 매번 현장이 새로워 싫증 날 틈이 없어요. 또 연기를 하면서 느끼는 성취와 보람이 인생에 더해지는 재미가 있죠.”
연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녀지만 포기를 생각했던 때도 있다. 20대 끝자락에서 연기자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골똘히 고민했다. 신인과 무명의 타이틀은 꽤 오랜 시간 박효주의 곁에 머물렀고 작품을 만나기까지 기다림의 시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를 배우라고 말하는 게 어색했고, 현실적인 고민까지 더해졌다. 그녀는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강원도 평창으로 훌쩍 떠났다. 바다 앞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했다. 배우의 길을 접어두고 다른 진로를 생각해봤다. 그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그 전화는 박효주의 인생을 바꿨다.
“휴대전화 전원을 꺼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가 잠깐 전원을 켰는데 바로 전화가 걸려 왔어요. 영화 <완득이> 섭외 전화였어요. 오래전에 오디션을 본 작품이었고, 한동안 연락이 오지 않아서 잊고 지냈는데 기적처럼 전화가 온 거예요. 방금까지 연기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맞나 싶었어요. 전화 한 통에 마음이 요동쳤으니까요. 그 길로 바로 서울행 차표를 끊었어요. 그 이후론 연기에 대한 확신이 생겼어요. 작은 역할부터 차근차근 도전해왔던 제 필모그래피를 믿어보기로 했죠.”
박효주는 배역의 외형적 완성을 위해서도 노력을 기울인다. 촬영이 시작되면 카메라 앞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배역에 맞는 의상을 골라 입고 태도를 재정비한다. 그녀가 캐릭터를 구축해가는 방법 중 하나다. <지헤중> 종영 인터뷰에서 그녀는 시한부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스스로 채찍질을 거듭했다고 밝힌 바 있다. 드라마에서 회차를 거듭할수록 실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야위어갔고, 총기 있던 눈빛 또한 점점 시들어져갔다. 연기할 때만큼은 자신을 더 냉정하게 바라보고 엄격한 잣대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 그녀다.
“연기란 피붓결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전등 아래에서 거울을 보는 것과 같아요. 잘해내지 못하면 고스란히 드러나니까요. 그래서 배역에 완전히 젖어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요. 예를 들어 일상에서 바지를 즐겨 입는다고 해도 극에 맞춰 오피스 룩을 입으며 역할에 빠져들게끔 하죠. 일상에서도 TPO(의복을 경우에 알맞게 착용하는 것)의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해요. 의상이 변화시키는 태도가 있더라고요. 평소에는 스스로에게 엄격하지 않아요. 인간 박효주에겐 숨 쉴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주는 편이죠.(웃음)”
연기에서 느낀 부족함을 연기로 채우는 행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찾아오는 재미를 누리는 인생. 박효주는 이제야 배우로서 살아가는 행복을 알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연기를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하나씩 발굴해낸다. 자신과 닮아 있는 캐릭터를 만났을 땐 인생의 깊이를 탐구하고, 정반대 성향의 캐릭터를 만났을 땐 배역과 친해지기 위해 갖은 방법을 총동원한다. 자신의 한계라고 여긴 지점에서 다시 도전하고 그 한계를 깨부수면서 성장한다. 또 다양한 직종, 각기 다른 성격의 배역을 만나 여러 인생을 경험해볼 수 있다는 것 자체를 큰 축복이라고 여긴다.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단조로운 삶을 살았을 거예요. 제가 언제 형사가 돼서 범인을 잡아보겠어요.(웃음) 연기를 하면서 다양한 인물의 삶을 간접적으로 살아볼 수 있게 됐어요. 보통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효주야, 너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 거야?’라고 자문해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과정 속에서 감정이 풍부해지고, 일상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저의 새로운 모습을 마주해요. 무의식 속에 잠재돼 있던 감정들이 캐릭터를 통해 살아난다고 해야 할까요?”
늘 선택의 기로에 놓였고, 고민을 안고 살았어요.
결론적으로 40살의 박효주는 편안하고 괜찮은 상태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한때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싶었는데, 이제는 왜 그때 그랬는지 이유를 조금씩 알겠어요.
그런 면에서 인생이 참 재미있어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는 느낌이라 지루할 틈이 없어요.
모든 일엔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박효주는 2015년 1살 연상의 비연예인 남편과 결혼, 슬하에 6살 난 딸을 두고 있다. 아는 이들은 아는 사실이지만, 그녀가 결혼한 사실을 모르는 이들도 적잖다. 자신의 SNS에 사적인 영역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결정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박효주는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 비치는 배우의 모습을 지키고자 한다. 대중이 그녀의 연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몫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다.
“대중과 가까이 지내는 게 하나의 트렌드가 됐어요. 저도 SNS에 현장 비하인드나 일과에서 틈틈이 기록한 일상을 공유해요. 하지만 가족을 공개하는 건 아직까지 조심스러워요. 사생활을 노출하다 보면 제가 연기를 해도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 박효주로 보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카메라 밖 박효주의 일상은 평범하게 흘러간다. 남편과 딸, 세 식구가 함께하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집중하는 그녀다. 한창 육아하는 엄마가 그렇듯 박효주 또한 딸과 호흡을 맞추며 함께 성장하고 있다. 박효주에게 가족의 의미를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보통 결혼하면 혼자만의 시간이 현저히 줄어드는 게 아쉽다고 하잖아요? 저는 반대예요. 저만 바라보고 살았던 과거보다 가정을 이루고 사는 지금이 더 행복해요. 일에 대한 욕심이 있고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편이지만, 결국 저를 웃게 만드는 건 남편과 딸이에요. 특히 딸을 보면서 배우는 점이 많아요. 제겐 비 내리는 날이 특별하지 않은데 딸에겐 의미가 큰가 봐요. 잔뜩 설렌 마음으로 예쁜 우산을 고르고 우비를 입고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느껴요. 어른들은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이 아이들에겐 새로운 거예요. 그 반짝거리는 두 눈을 보고 있으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해요.”
안팎으로 많은 변화를 맞는다는 나이 마흔. 올해 마흔이 된 박효주와 그녀의 지난날을 돌아봤다. 불안감과 싸워야 했던 20대, 조금씩 숨을 고르기 시작한 30대, 평온함으로 맞이한 40대까지, 스스로 갈고닦길 반복했던 과거는 박효주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 우리를 배반하고 신의 없게 굴어도 삶은 어느 날 그것이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가만히 들려주게 될 것이다”(공지영 에세이집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중)라는 문장을 마음에 품고 힘든 시기를 버텨냈다. 그녀는 지난한 시간을 지내며 자신을 못살게 굴던 감정이 기대감이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지나친 기대가 실망과 절망을 불러왔던 경험을 통해 얻은 해답이다. 그리고 의미 없는 기대보단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내는 각오가 중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아직은 제 나이가 실감 나지 않아요.(웃음) 그런데 나이가 드는 게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주변에선 지금의 나이가 한창 고민이 많을 때라고 해요. 하지만 돌아보면 고민이 없었던 때는 없어요. 늘 선택의 기로에 놓였고, 고민을 안고 살았어요. 결론적으로 40살의 박효주는 편안하고 괜찮은 상태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한때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싶었는데, 공지영 작가의 문장처럼 이제는 왜 그때 그렇게 힘들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조금씩 알겠어요. 그런 면에서 인생이 참 재미있어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는 느낌이라 지루할 틈이 없어요.”
박효주는 인생의 아름다움이 자연스러움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그녀가 30대 중반에 다녀왔던 크로아티아에서 바다오르간을 보고 느낀 바다. 설치예술가 니콜라 바시츠가 설계한 바다오르간은 파도가 연주자인 특별한 작품이다. 높낮이가 다른 파도가 건반을 긁으면서 소리를 낸다. 박효주는 그곳에서 파도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무조건 듣기 좋은 소리만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바다오르간을 보고 느꼈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곳곳에 ‘바다오르간’를 적어두고 수시로 들여다보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어요. 감정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땐 내가 갖고 있었던 좋은 마음과 생각을 잊어버리게 되죠. 저는 그럴 때 바다오르간을 떠올려요. 이내 마음이 차분해지죠. 작품 활동을 할땐 감정을 쏟아내고 평소에는 평정을 유지해요. 그런 점에서 배우라는 직업은 일상에도 맞닿아 있는 거 같아요. 최근에 <미혹> 김진영 감독님과 ‘우리가 하는 작업은 일을 넘어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어요. 크게 공감이 되더라고요. 촬영장에선 연기하고, 촬영장 밖에선 연기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을 만나고 있죠. 근데 그게 또 나쁘지 않아요. 연기를 참 사랑하는가 봐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