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집을 한껏 불린 구름들이 하늘을 채웠다. 열기를 뽐내던 태양이 휴식이라도 취하는지 숨어서 보이지 않는다. 구름 덕에 적당히 시원해진 공기와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여행을 시작한다. 여름 하면 찰박거리는 바다를 떠올리게 된다. 소금기 밴 내음이 인사를 건네고, 뒤따라 들리는 청량한 파도 소리가 더위에 지친 마음을 다독여주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곳. 그 바다를 원 없이 만끽할 수 있는 경북 포항으로 여행지를 정했다. 여름 바다를 향해 떠난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바빠진다. 서울역에서 포항으로 향하는 KTX에 올랐다. 드넓은 논과 밭, 산이 창밖을 짙은 초록빛으로 장식한다. 계속되는 초록색에 파란 바다가 더욱 그리워질 때쯤, 기차가 포항역에 들어섰다.
바다와 만나는 포항 해상스카이워크
바다를 가장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곳이 여남 방파제 근처에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영일대해수욕장에서 차를 타고 환호공원 방향으로 5분 정도 가면 포항 해상스카이워크가 보인다. 총길이 463m, ‘전국에서 가장 긴 해상 스카이워크’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포항 해상스카이워크는 올해 5월 정식 운영을 시작했다. 시원한 바다 위에 서 있지만 포항에서 가장 ‘핫한’ 여행지가 되겠다. 평일 낮인데도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스카이워크를 거닌다. 바다 위를 걷는 경험이라니, 아이처럼 들떠 스카이워크로 발을 디딘다. 바다로 뻗은 스카이워크를 따라가자 이내 둥글둥글하게 굽은 길이 나타난다. 물 위를 걸어 바다와 만나는 경험이 색다르다. 나아갈 때마다 넓은 바다가 가까워진다. 바다의 품 안에 폭 안기는 듯한 기분도 든다. 해상스카이워크에 파도가 부딪쳐 철썩 소리가 난다. 평균 높이가 7m라는데,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다고 여기다 문득 내려다보니 밀려오는 파도에 눈앞이 아득하다. 길 중간 바닥은 특수 유리로 제작해 아래를 보고 걸으면 꿈틀거리는 바다 풍경이 생생히 전해진다. 1.2m 깊이의 자연 해수풀과 밤에 켜지는 조명도 해상스카이워크의 또 다른 매력이니, 낮과 밤 언제 방문해도 아름다운 풍경이겠다.
이곳에는 숨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해상스카이워크를 조성한 여남 해안 일대는 천연 돌피리가 발견된 곳이다. 고대에 사용되었던 돌피리는 고래를 부르는 전통악기다. 돌에 숭숭 난 구멍에 입을 대고 바람을 불면 피리 같은 소리가 난다. 단순히 돌에 구멍이 나 있다는 이유만으로 돌피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돌맛조개 같은 조개는 돌구멍을 은신처로 삼기도 하는데, 새끼 조개가 구멍 안에서 자라나다 몸집이 커져 밖으로 나오지 못하면 결국 껍데기만 남기고 죽게 된다. 그렇게 남은 조개껍데기가 구멍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며 피리 소리를 만드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 사람들은 돌피리를 다루어 고래와 만났다. 해상스카이워크가 있는 이 자리에서도 사람과 고래가 얼굴을 마주했을 것이다. 거대한 바다의 주민을 불러내 무엇을 하려 했는지 궁금해진다. 고래 등에 타고 바다 위를 누볐을까. 아니면 먼바다 건너 보고 싶은 누군가의 소식을 고래가 전했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상상으로 머릿속을 채우며 해상스카이워크 끝자락에서 포항 바다의 경관을 만끽한다.
고래와 함께, 다무포 하얀마을
포항에서 고래 이야기를 한다면 다무포가 빠질 수 없다. 다무포 마을 입구에 서니 하얀 집 위의 파란 지붕들이 삐죽 고개를 내민다. 파도와 하늘이 함께 일렁거려 신화 속 존재가 나타날 것같이 신비롭다. 신화에 등장하는 동물 대신 마을 곳곳에 그려진 고래가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시선을 이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다무포에서는 고래가 목격된다. 예로부터 포항 바다에는 고래가 자주 출몰했다. 구룡포항과 호미곶면 경계에 위치한 다무포는 포항에서도 고래 서식지로 이름난 곳이다. 1986년, 상업적 고래잡이가 금지되기 전까지 많은 이가 고래잡이로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다. 그만큼 다무포에서 고래를 보는 일은 흔했다. 특히 4~5월 산란기에는 어김없이 다무포를 찾아왔다. 구룡포에서 나는 미역의 질이 좋아 고래가 새끼를 낳고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온다는 소문도 생길 정도였다.
바다와 맞닿은 작은 마을이 고래 품은 하얀마을로 변신한 역사를 알려면 다무포가 고래생태마을로 지정된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다무포가 고래생태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은 후 마을에는 3층짜리 다목적 회관이 세워졌다. 고래를 잡던 마을이 고래를 보호하는 생태마을로 거듭나는 첫 발걸음이었다. 10년이 흐른 2018년, 회관을 고래 전시관과 고래 북카페 등으로 꾸미고 2층에는 먼바다까지 볼 수 있도록 시원하게 뚫린 테라스를 마련했다. 2019년에는 자원봉사자와 지역 작가가 모여 마을을 다시 단장했다. 약 80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 곧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을 끝자락에 서 있는 등대도 하얀색 옷을 입었다. 담벼락과 타일에 고래를 그려 넣고, 폐플라스틱을 활용해 거북이, 게 등을 만들어 마을을 생기 있게 가꿨다. 평범했던 곳이 여러 사람의 손길로 탈바꿈해 이국적 분위기를 풍기는 마을이 되었다. 다무포 하얀마을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을지. 바다를 향해 트인 하얀 정자에 앉아 찰랑이는 물결을 바라본다. 마을과 바다 위로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진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어우러지는 어촌이 서정을 선사한다. 오랜 기다림과 염원이 없었다면 보지 못했을 장면이다.
다무포의 숨은 보물, 해녀
“이 마을에는 고래도 고래지만 해녀도 많다 안 카나. 할머니들이 연세가 많아 쉬고 있지만서도, 열댓 명에서 열여섯 명 정도는 된다카이.” 자신을 ‘이가 해녀’라고 소개하는 어르신이 어느 집 대문에 매달린 문패를 가리킨다. 자세히 보니 해녀 모양으로 빚은 도자기다. 다무포에 와 산 지 50년이 넘었다는 이가 해녀가 마을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다. 코로나19 전에는 여름이 오면 마을회관에서 해녀 체험을 진행했고, 지금도 물질하러 나가 성게나 미역을 따 온다는 이야기들. 이가 해녀는 3층 회관이 또 한 번 리모델링을 거치는 중이라고, 여름이 무르익었을 때도 꼭 다무포로 오라는 말을 건네고는 돌아선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곳에 다시 오겠노라고 다짐한다. 없는 것이 많아 다무포라고 불린다는 말이 의아할 정도로 다무포는 이렇게나 다정하다. 어느덧 내리던 비가 멎었다. 이제 구름이 물러가고 날은 맑게 갤 것이다. 포항이 여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