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방송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모델테이너(모델+엔터테이너) 가운데 이현이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세계가 주목하는 패션쇼의 중심에 있던 톱 모델에서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로서의 역량까지 보여주며 다재다능한 면모를 자랑한다. 이현이는 떡잎(?)부터 남달랐다고 한다. 지난해 4월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했던 현수진 에스팀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소속 모델 이현이의 당차고 패기 있는 모습을 언급한 바 있다. “제가 모델로 성공할 것 같아요?”라며 자신의 가능성을 묻던 20대 초반의 이현이를 보곤 직접 발로 뛰는 영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듣던 대로 이현이는 자신에 대해 깊은 고민을 이어가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는 오랜 고민이 묻어났다.
SBS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에 출연하면서 축구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들었다.
왜 이제야 축구를 알게 됐나 싶다.(웃음) 사실 방송 출연 제안을 받을 때만 해도 자신이 없었다. 한평생 공을 발로 차본 적이 없었고, 구기 종목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훈련을 시작하자마자 마음이 급변했다. 코치님한테 “축구에 한번 빠지면 왜 주야장천 축구만 하는지 알겠다”고 말했다. 축구의 매력을 꼽자면 높은 몰입도다. 축구를 하는 시간만큼은 다른 생각이 나지 않고 오롯이 공과 내 움직임에 집중한다. 요즘은 예정된 훈련 스케줄을 기다리면서 일상을 보낸다. 며칠만 공을 차지 않아도 몸이 무거워지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축구 외에도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대중을 만나고 있다.
감사하게도 여러 기회가 주어져 바쁘게 지내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눈코 뜰 새 없이 하루하루를 지냈고, 지금은 숨 한번 고를 여유가 생겼다. 한창 바쁘던 시기에 세상의 모든 워킹맘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방송계에도 워킹맘이 많지 않다. 특히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대의 아이를 키우는 대부분의 연예인은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평일과 주말, 밤과 낮의 구분 없이 예정된 스케줄을 소화하는 게 쉽지 않아서다. 남편의 가사 참여 비율이 높아도 엄마만이 채워줄 수 있는 육아의 영역이 있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도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놓지 않는 분들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자신과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을 꼽으면?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포맷이 있는 프로그램에선 행동이 다소 부자연스러워지는 거 같다. 그런 이유에서 SBS 예능 <동상이몽2-너는 내 운명> 같은 관찰형 예능이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집 안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되는 프로그램이지만 무딘 성격이라 그런지 의식하지 않게 되더라.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모델로 한창 활동하던 시기와 같은 몸매를 유지하는 비결이 궁금하다.
과거에는 먹어도 살이 붙지 않는 체질이었다. 하지만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나잇살이 무섭다는 말을 체감하게 됐다. 그때부터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관리를 시작했고 요즘은 축구로 운동량을 채우고 있다. 축구만큼 칼로리 소모량이 큰 운동이 없는 거 같다. 아무리 많은 양의 식사를 해도 한 번의 훈련을 거치면 채웠던 칼로리가 다시 빠져나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식단 관리는 하지 않는다. 나는 하루 세 끼 맛있는 밥을 든든하게 먹어야 일상생활이 가능한 사람이다.(웃음) 대신 커피나 군것질을 일절 하지 않는다. 대부분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한 뒤에는 후식을 먹으러 카페에 가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식사 이외에 간식 섭취만 줄여도 관리에 도움이 된다.
살면서 처음 제 의지로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모델이에요.
방송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패션쇼에 설 기회가 줄었지만,
언제까지나 제가 모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요. 평생 지켜야 할 수식어예요.
끝까지 지켜야 할 수식어, 모델
2005년 SBS <슈퍼모델 선발대회>를 통해 모델의 길을 걷게 된 이현이는 구찌부터 샤넬, 에르메스 등 손꼽히는 럭셔리 브랜드의 런웨이에 서면서 톱 모델로 자리매김했다.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개성 있는 이목구비는 세계 유수 디자이너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모델로서 입지를 다지고 활동을 이어가던 때, 그가 다음 단계로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결혼이었다. 이현이는 2012년 1년간 교제 중이던 비연예인 남편과 웨딩마치를 울렸다. 그리고 2015년 첫째 아들 홍윤서를 출산했고, 2019년 둘째 아들을 품에 안았다. 이현이가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다. 그는 토크쇼, 리얼 버라이어티, 스포츠 예능까지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포지션을 찾아가면서 방송가에 안착했다.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대중을 만나고 있지만, 어느 자리에 있어도 모델이라는 수식어를 놓지 않겠다고 말했다. 언제까지나 모델이라는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게 그의 굳은 신념이다.
어떻게 모델의 길로 접어들게 됐나?
대학교 2학년 때까지 방황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주어진 자유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취업 준비를 해야 할 시기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양한 동아리에 가입해 경험을 쌓았는데, 그중에 연극 동아리도 있었다. 활동했던 모든 동아리를 통틀어 연극만큼 흥미로운 게 없었다. 무대에 올랐을 때 느끼는 희열이 좋았다. 하지만 연극을 하기엔 키가 너무 크다는 고민을 해왔던 터라 우회할 방안이 있으면 좋을 거 같았다. 그때 한 친구가 모델에 도전해보면 어떻겠냐고 조언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직업인데 연극과 같이 무대에 오른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끌렸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갑작스러운 진로 선택에 대한 주변의 반대는 없었나?
부모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다. 우선 월급이 나오는 안정적인 직종이 아니고, 모델로 성공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니까 말이다. 부모님의 걱정과 별개로 나 스스로 자신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회사와 계약한 뒤에도 학업을 병행했다. 그런데 모델 일이 점점 많아지고 해외 일정이 생기면서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고민 끝에 지금까지 인연을 맺고 있는 에스팀 현수진 대표를 찾아가서 “내가 모델로 성공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당찬 질문인데, 그만큼 불안했다. 잘될 수 없다면 일반 회사에 취직하려고 했다.
SBS <슈퍼모델 선발대회>(2005)에서 눈에 띄는 참가자로 주목받았다.
모델 아카데미 등록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출전했다. 본선에 진출하면 아카데미 수료 과정의 비용을 지원해준다고 하더라. 수백만원에 달하는 학원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출전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웃음) 운이 좋게 입선해 생방송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방송을 마치고 무대 뒤에서 당시 DCM(현 에스팀엔터테인먼트)의 실장이었던 현수진 대표를 만났다. 나를 유심히 지켜봤다고 말씀하시면서 계약을 제안하더라. 그만한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해 바로 계약하기로 결정했다.
모델에서 방송인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된 계기가 있나?
결혼 이후 본격적으로 방송에 출연하게 됐다. 모델로 활동하던 중 결혼을 결정했는데 주위에서 “한창 일이 많을 시기에 결혼해도 괜찮겠냐”고 우려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결혼이 하고 싶었다.(웃음) 그런 행보가 특이했는지 방송 출연 요청이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활동 무대를 넓혔다. 사실 내가 방송으로 진출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On Style 예능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와 같은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장윤주 언니가 입지를 다지면서 모델들의 방송 출연 기회가 점차 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모델이 아닌 다른 활동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결혼하지 않았다면 <동상이몽2-너는 내 운명> 같은 프로그램을 못 만났을 거 같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맞나 보다.
일하는 엄마로서 고민이 있을 거 같다.
아이들에게 미안함이 있다. 아이의 미래는 부모의 노력과 비례한다고 하지 않나. 주어진 시간 내에서 아이들과 최대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일을 병행하다 보니 육아에 몰두하지 못하는 느낌이다. 일과 육아를 함께 하면서 체력적으로 힘든 건 견딜 수 있지만, 심리적으로 무너지는 게 워킹맘들의 공통적인 고민이지 않을까? 감사하게도 남편이 육아를 도맡아준다. 남편은 워낙 가정적인 사람이라서 여가 시간이 생기면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그런 남편을 보고 배우는 바가 많다.
일과 가사의 균형을 맞추는 데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
모든 방면에서 상상 이상으로 힘들다.(웃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육아라고 대답할 거 같다. 올해 첫째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보통 이 시기에 휴직하는 엄마가 많다고 하더라. 그만큼 아이를 돌보는 데 있어 엄마의 철저한 준비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얘기다. 아이가 학교에서 뒤처지진 않는지 꼼꼼하게 살펴야 하고 아이 교육에 필요한 정보를 수시로 업데이트해야 한다. 흡사 아이와 함께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한 것만 같다. 또 둘째 아들은 예민한 편이라서 세심하게 돌봐야 한다. 여기에 내 일까지 더해져 분주하게 살고 있다. 스케줄을 마치고 저녁에 귀가해도 아이들이 잠들기 전까지는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지 못한다. 하지만 일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엄마가 몸담은 분야에서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면 의미 있는 교육이 되지 않을까 싶다.
훈육은 어떻게 하나?
엄마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알려준다. 아이를 혼내야 하는 순간만큼은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고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더라. 그래서 아이들에게 엄마도 힘들 때가 있다는 것과 화가 나면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과 유대를 쌓아가다 보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올 거라고 믿었기에 오히려 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두 아이 모두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엄마가 어느 정도까지 허용해줄 수 있는 사람인지 알고 있는 거 같다. 웬만해선 아이들의 행동을 제어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부모의 가르침을 통해 익힐 수 있는 암묵적인 규칙, 절대 해선 안 되는 행동에 대해선 엄격하게 훈육한다. 성장 과정에서 적정 시기에 배워야 할 것들은 꼭 알려주려고 한다.
아이들을 향한 신뢰가 느껴진다.
때때로 아이들과 연인처럼 싸운다. 부모와 자식 관계가 수직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감정이 상했을 땐 친구나 연인처럼 솔직하게 섭섭함을 털어놓는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친밀함이 있다.
육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 있나?
아이러니하게도 육아로 풀린다. 두 아들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다. 특히 스케줄을 마친 뒤 지친 상태로 귀가했을 때 현관문까지 달려와 엄마에게 안기는 아이들을 보면 누적된 피로가 저절로 풀린다. 두 아들 모두 애교가 많은 편이라 딸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유쾌하다. 문득 MBTI(성격유형검사)가 궁금해졌다.(웃음)
완전한 ENFP다. 이 유형을 인간으로 형상화하면 내 모습이 아닐까 싶다. 여러 사람과 모여 있을 때 내가 유달리 유쾌한 축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철저한 계획보다는 느낌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유형별 특성도 실제 내 모습과 유사하다. 평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편이다.
인생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선택은 무엇인가?
모델이 된 것. 살면서 처음 내 의지만으로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모델이다. 학창 시절까지 시키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서 살았다. 그러다 보니 꿈을 갖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고 성인이 된 후 방황의 시기를 거쳐야 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모델이라는 직업에 눈을 뜨게 됐다.
나답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요즘은 축구를 할 때가 그렇다. 방송하면서 종종 겉도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예를 들어 토크 프로그램에서 내 이야기를 해도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런데 <골 때리는 그녀들>은 다르다.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축구에만 몰입한다. 방송 모니터링을 할 때 “내가 저렇게 했다고?”라는 말을 연발할 정도로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이현이의 최종 목표는?
모델로서 욕심은 패션쇼 무대에 다시 서는 것이다.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을 만나고 있지만 모델이라는 수식어는 평생 잃고 싶지 않다. 방송인으로서는 여성 진행자를 꼽을 때 떠오르는 사람이고 싶다. 현재 우리나라 방송계에 여성 진행자의 수가 많지 않다는 아쉬움이 있다. 여성 방송인도 출산, 육아로 경력이 단절되는 시기가 온다. 과거에 비해 두각을 드러내는 여성 진행자가 늘었지만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인간 이현이로서 두 아이를 잘 키워내는 게 목표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도 함께 성장하고 있다. 또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을 체감한다. 아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키우기 위해선 부모부터 올바른 사람이 돼야 하더라. 나부터 떳떳하고 성실하게 살다 보면 아이들이 좋은 방향으로 성장할 거란 기대가 있다. 지금은 거창한 꿈이지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가닿지 않을까?
꾸미는 법이 없었다. 속이 후련해지는 이현이의 화법은 대화에 힘을 실어줬다. 가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정말 그랬다. 더없이 솔직하고 시원했다. 이현이의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