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언제 늙을까? 몸이야 20대부터 공평하게 늙는다지만 정신은 제각각이다. 예술가의 성취를 논하면서 나이 얘기라니 분명 실례다. 하지만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2021)를 보면 ‘리들리 스콧 감독이 몇 살이더라? 이 영감님은 대체 언제 늙는 거야?’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는 2020년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매우 현대적인 이야기다. 배경이 14세기 프랑스라는 점은 그 정신을 구현하는 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영화는 중세에 벌어진 강간 사건을 3가지 시점으로 서술한다. 첫 번째는 피해자의 남편 ‘장’(맷 데이먼 분)의 시점이다. 유서 깊은 귀족이지만 빈털터리 장은 반대로 돈만 있고 명성은 낮은 ‘마르그리트’(조디 코머 분)와 결혼하면서 그 집안의 영토를 물려받기로 했다. 그런데 왕의 친구 ‘자크’(아담 드라이버 분)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 영지를 잃는다. 그 후로도 공공연히 장을 괴롭히던 자크는 급기야 마르그리트를 겁탈한다. 장은 자신과 아내의 명예를 위해 자크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귀족 남자의 자존심 얘기다.
두 번째는 가해자 자크의 입장이다. 여기서는 첫 만남부터 마르그리트가 그를 유혹한다. 문제의 강간 장면은 혼란스럽다. 현대인의 기준으론 명백한 강간이지만 이 영화의 시선도 그러한가? 마르그리트는 여러 번 자크를 거부한다. 하지만 자크는 개의치 않는다. 마침내 마르그리트는 굴복하고, 자크는 그것이 화간이라 생각한다. 관객들은 ‘때가 어느 때인데 강간을 저렇게 묘사하나’ 분노할지 모른다. 여하간 여기까지는 지루한 시대극. 이 작품의 매력은 다음부터 폭발한다. 피해자 마르그리트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르다. 더 많은 맥락이 추가되고, 선과 악이 바뀌고, 당대 여성이 처한 사회 및 제도의 문제까지 제시되면서 중압감과 깊이가 더해진다. 장은 결혼 지참금이 무산됐다고 아내에게 냉랭하게 굴고, 그나마 가진 영토도 제대로 관리를 못 하고, 아내가 강간을 당했는데 위로는커녕 더럽다는 듯 꺼리고, 주체적 인간으로서 마르그리트의 존엄성이 훼손당했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소유물’이 침해당한 것에 분노한다. 자크는 말할 것도 없이 쓰레기다. ‘중세판 미투’라 불리는 이 이야기에서 그는 가해자의 기억이 어떻게 현실을 왜곡하는지 보여주는 역할이다.
장과 자크의 마상 대결을 지켜보면서 ‘그냥 둘 다 죽어버리는 게 해피 엔딩’이라 생각하는 관객도 많을 것이다. 극 중 마상 대결을 지켜보는 마르그리트의 싸늘한 표정은 이런 현대인의 감각과 일치한다. 무엇보다 압권은 마르그리트의 여생을 서술하는 마지막 자막이다. 감독은 성범죄와 가부장제에 대한 환멸을 차곡차곡 쌓다가 “마르그리트는 다시 OO하지 않았다”라는 자막 한 줄로 간단히 주체적 여성의 승리를 선언해버린다. 빈칸은 영화에서 확인하시길. 우리는 그 허를 찌르는 한마디에 알게 된다. 노련한 장인에게 깃든 젊은 정신은 이렇게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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