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시련은 찾아온다. 나 또한 크고 작은 곡절을 겪으며 오늘을 맞았다. 사는 게 원래 그렇다는 말로는 납득할 수 없는 슬픔도 있었다. 자의였든, 타의였든 쉽게 무너졌고 깊게 상처받았다. 그럼에도 사라지거나 망가지지 않고 살아냈다. 강인함과는 거리가 먼 내가 살 수 있었던 명확한 이유가 있다. 여자, 여자다.
내 삶은 여자를 빼고는 한 문장도 완성할 수 없다. 남녀공학인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남녀 분반이었고, 고등학교 3년은 여고에서 보냈다. 캠퍼스 커플을 꿈꿨으나 학과의 성비는 여고 시절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이후에도 가는 곳마다 여자의 성비가 8할인 마법이 펼쳐졌다. 심지어 재미 삼아 봤던 신점에서 무속인이 건넨 첫마디는 “인생에 여자가 너무 많이 꼈어”였다. 한때는 그게 그렇게 싫었는데 이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훈장이다. 여자의 감각과 의리를 맛본 사람들이라면 알 테다. 정말 끝내준다.
나의 사춘기는 말 그대로 유난스러웠다. 속이 뒤틀리는 일이 있으면 식음을 전폐했고, 뾰족한 말로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허다했다. 모두가 곁을 떠나도 이상할 게 없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떠났다.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내 주변을 끝없이 맴돈 사람이 있다. 나의 엄마다. 가족들이 한데 모인 명절에 모두가 나를 걱정할 때마다 그녀는 “언젠가는 돌아올 거야”라고 했다. 그리고 진득하게 날 기다렸다. 내가 어떤 모양의 사람이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 시절 나와 얽힌 또 한 명의 여자가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 과외 선생님이다. 첫 면담을 위해 선생의 집에 방문했는데 학생들이 울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렇다. 무섭기로 소문난 선생이었다. 공부를 할 때는 가차 없었지만, 그녀는 일탈을 함께하자던 유일한 선생이었다. 내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는 날이면 우리는 밖으로 나가 바람을 맞았다. 수업을 듣다가 왈칵 눈물이 쏟아졌던 날이 있다.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는데, 선생의 눈시울도 붉어져 있었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나와 함께 울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헤아려보면 그 선생과는 고작 6개월을 함께했다. 그렇지만 그녀를 만나 많은 것을 배웠다. 선생은 모르겠지만 웹사이트 회원가입 시 필수 항목인 비밀번호를 찾는 질문을 고를 때 항상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 석자를 적는다.
가장 고달팠던 시기가 언제냐고 물으면 단연 취업 준비 기간이다.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로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다 못 해 사라진 것만 같았다. “나도 나를 버리고 싶다”는 절망스러운 문장이 좌우명이었다. 지난했던 그 시기를 무탈하게 지나올 수 있었던 건 친구 상은이 덕분이다.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 매일 서로를 찾았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기억도 못 할 맥락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실컷 웃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서로 우는 모습을 보고 따라 울다가 웃다가, 또 울다가 웃었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속 이야기들을 상은이 앞에서 전부 펼쳐놓았다. 함께여서 버틸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여자가 있다. 그녀들이 있었기에 망가지지 않았다. 앞으로의 인생은 그녀들이 내게 줬던 사랑과 안정을 갚으면서 살아갈 테다. 나에게 마음을 썼던 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잘 사는 게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지 않을까? 끈끈한 의리와 뛰어난 감각을 자랑하는 나의 여자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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