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기 없는 얼굴, 흘러내리지 않도록 질끈 묶은 머리, 먹과 물감으로 물든 두 손. 김규리의 하루는 작업실에서 시작해 그곳에서 마무리된다. 흰 종이와 붓, 마음을 한데 모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환했던 창밖은 금방 어둑어둑해진다. 요즘 김규리는 배우보다 아트테이너라는 수식어로 불리는 일이 잦다. 그도 그럴 것이 개인전 <김규리의 수호전(展)>을 통해 대중을 만나고 있다. 그를 똑 닮은 호랑이에 ‘수호’의 의미를 곁들인 미술 전시다.
1997년 모델로 데뷔한 김규리는 이듬해인 1998년부터 연기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지금까지 참여한 작품만 약 50편. 브라운관과 스크린, 연극 무대까지 종횡무진한다. 그에게 연기와 그림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매체다. 김규리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연기, 그리고 그림에 대해 이야기했다.
3년 만에 <우먼센스> 커버의 주인공이 됐어요.
날씨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봄날에 인사를 드릴 수 있어 감사해요. 요즘 저의 삶에 좋은 일이 많아요. 개인전과 드라마로 시청자들을 만나고 있죠. 곧 스크린 복귀도 앞두고 있어 들뜬 마음으로 지내고 있어요.
그동안 코로나19로 좀처럼 봄의 생기를 느끼기 어려웠죠. 어떻게 지냈어요?
지난해 3월 초까지 TBS FM <김규리의 퐁당퐁당>을 진행했어요.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했던 시기였는데, 청취자들과 사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을 달랬어요. 저를 비롯해 많은 분이 지쳤다는 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제 지갑을 열어 선물을 보내기도 했어요.(웃음) 작지만 잠시나마 일상에 활력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 컸어요.
요즘 개인전 <김규리의 수호전(展)>에서 직접 도슨트로 활약하고 있어요(4월 2일부터 5월 8일까지 경기도 안산시 김홍도미술관에서 열리는 <김규리의 수호전>은 임인년 호랑이해를 맞아 ‘호랑이’를 주제로 한 미술전이다).
지난해 작업실에서 잠깐 눈을 붙였을 때 호랑이 꿈을 꿨어요. 작업실 1층 화장실 옆에 못 보던 문이 있더라고요. 호기심에 문을 열었는데 방 안에서 여러 마리의 호랑이가 잠을 자고 있는 거예요. 호랑이를 깨우면 위험해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실적이었어요. 가까스로 꿈에서 깨어났는데 꿈에서 본 호랑이가 머릿속에 맴돌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호랑이를 그리게 됐어요. 무서운 인상이 강한 동물이지만, 그런 호랑이가 내 편이 되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할 거 같았어요. 그래서 수호의 관점에서 호랑이를 그리게 됐죠.
그림은 언제부터 그렸어요?
영화 <미인도>(2008)에서 화가 ‘신윤복’ 역할을 맡게 되면서 미술에 빠져들게 됐어요. 그림을 그리는 신에서 대역이 등장하지만, 붓 잡는 폼이라도 제대로 구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죠. 그래서 촬영 기간 내내 붓과 먹을 손에 쥐고 있었어요. 수시로 그림을 그리면서 붓의 감각을 익히려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작가들이 왜 그림을 그렸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됐어요. 사진이 없던 시기에는 글이나 그림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잖아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구현하기 위해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린 거죠. 그 의미를 알게 된 이후부터 글 대신 그림으로 일기를 썼어요. 한 폭의 그림에 제 마음 상태와 기록해두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냈죠. 글로 일기를 적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언어로 형용하지 못했던 마음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됐어요.
한국화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마음 상태가 그림에 고스란히 반영된다는 매력이 있어요. 한지는 물에 굉장히 민감한 종이예요. 붓이 조금만 흔들려도 흔적이 남아요. 그래서 마음을 다잡는 훈련이 필요해요. 잘 그리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흐트러진 감정을 가다듬어야 하죠.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단단해져요. 힘들었던 시기에 미술을 만나게 됐는데,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이 평온해졌어요. 또 평소 전통에 관심이 많았어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와 멋을 전파하는 게 하나의 바람이었죠. 운이 좋게도 대중문화와 연관성이 있는 배우로 활동하고 있어 전통을 알리는 데 용이한 위치라고 생각했어요. 기왕이면 제가 사랑하게 된 한국화로 우리 문화의 멋을 소개하면 좋을 거 같았죠.
한지는 물에 굉장히 민감한 종이예요. 붓이 조금만 흔들려도 흔적이 남죠.
그래서 붓을 들기 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흐트러진 감정을 가다듬어야 해요.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단단해집니다.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얻어요?
내면에 집중해요. 마음을 들여다보면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깨닫게 돼요. 지금까지 그렸던 아이들(김규리는 자신의 작품을 아이라고 표현했다) 중에 ‘비우다, 공’ 시리즈가 있어요. 캔버스의 절반만 채우고 나머지는 비워둔 그림이에요. 모든 면에서 비워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때 그렸어요.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강박적으로 행동했거든요.
그림을 ‘아이’라고 부르네요.(웃음)
자식과 같은 존재예요. 깨물었을 때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는 것처럼 모든 그림을 애정해요. 그림의 힘은 대단해요. 수차례 전시를 열면서 같은 그림이라도 어떤 공간에 있느냐에 따라 자아내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 작업실 안에서는 묵직한 느낌이었던 그림을 넓은 공간으로 옮겨놓았는데, 시원하고 깔끔한 인상을 주더라고요. 참 매력적이죠.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꼽으면요?
스위스 화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요. 2018년 행사 일정을 위해 프랑스에 갔다가 한 미술관에서 자코메티의 작품을 봤어요. 멀리서 보면 그림 전체가 검은색으로 물들여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피에로가 울고 있어요. 그 형상을 마주하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어요.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그림을 보면서 답답하고 힘들었던 마음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었어요. 우리나라 작가 중에는 천경자 선생님을 가장 좋아해요. 그중에서도 뱀 35마리가 얽혀 있는 <생태>라는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완벽해요. 한국화는 선 하나를 잘못 그어도 티가 나는데 35마리의 뱀을 정교하게 그려내셨죠. 그 작품을 보면서도 감동받아서 울었던 기억이 나요.
“원하는 한 가지를 위해, 전부 버릴 수 있다”
JTBC 드라마 <그린마더스클럽>을 통해 3년 만에 안방극장으로 복귀했어요.
제작진이 전시회장으로 찾아오셨어요. 출연을 제안하기 위해 직접 방문했다고 하시더군요. 감사함에 보답하기 위해 더 열심히 연기하고 있어요. 기회를 주셨으니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드려야죠. 먼저 캐스팅된 배우들과도 앞서 인연이 있어 현장에서 호흡이 굉장히 좋아요. 서로 편하게 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포지션을 지키면서 촬영을 이어가고 있어요.
엄마들의 미묘한 신경전이 관전 포인트죠. 싱글은 잘 알지 못하는 세계일 텐데 연기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꼭 엄마가 돼봐야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어머니가 저를 어떻게 키우셨는지 헤아려봤어요. 어머니와 저의 과거를 떠올리면서 캐릭터를 구축해갔죠.
단아한 분위기의 캐릭터라서 외적인 준비도 필요했을 거 같아요.
사실 전시회 준비로 바빠서 열심히 관리를 하지 못했어요. 지금도 촬영 스케줄 이외에는 거의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래서 피부 관리는 물론이고 좋아하는 운동도 하지 못하는 중이에요. 식단도 마찬가지예요. 평소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데, 가장 빠르고 간편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이라서 찾게 되더라고요. 대신 물을 열심히 마시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어요.
외모 관리에 대한 강박이 없어 보여요.(웃음)
외면보다는 내면을 가꾸는 데 비중을 두고 있어요. 나이가 들수록 마음을 단단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커지고 있죠. 삶의 리듬이 조금씩 변하는 게 나쁘게 느껴지지 않아요. 오히려 인생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느낌이에요.
필모그래피를 보면 지금까지 맡았던 캐릭터들 간에 공통분모가 없더라고요. 새로운 역할에 대한 갈증이 있는 편인가요?
보통 한 작품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 그 후로 비슷한 역할을 제안받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SBS 드라마 <유리구두>(2002) 이후 악역만 제안받았어요.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 새로운 연기를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고사한 작품이 많아요. 일종의 미션을 수행하듯 작품에 임하고 있어요. 1탄을 해냈다면, 다른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는 2탄을 기다리는 거죠. 연기에서만큼은 원하는 것 하나를 이루기 위해 다 버릴 수 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배우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걸까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울어주는 직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죠. 최근에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었어요. 이미 하루 종일 울어버린 탓에 더 쏟아낼 눈물이 없어 곤혹스러웠죠.(웃음) 그런데 스태프들이 시야에 들어왔어요.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해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곤 울컥했어요. 현장에서만큼은 모든 감정을 묻어두고 촬영에 몰두하는 게 멋지면서도 힘들 거 같단 생각이 들었죠. 그들을 위해 대신 울어줘야겠다고 마음먹으니까 바로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단맛과 짠맛, 쓴맛이 어우러진 게 인생이에요. 저도 인생이 쓰게 느껴졌던 때가 있어요.
그 시간을 통해 성장했어요. 걸어가다가 숨이 차면 쉬어 가고,
또 충분히 쉬고 난 뒤에 다시 걸으면 되더라고요.
김규리 하면 ‘소신 발언’으로도 유명하죠.(웃음)
혐오와 불안감을 만드는 게 돈이 되는 세상이에요. 사회가 옳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그래서 누군가를 쉽게 혐오하고 부정적인 에너지를 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게 돼요. 나쁜 기운에 휩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요. 옆에 있는 사람이 넘어지면 일으켜주는 따뜻한 세상이면 좋겠어요. 그리고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겨지지 않기를 바라고요.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어 보여요.
사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에요. 단맛과 짠맛, 쓴맛이 어우러진 게 인생이잖아요? 힘들 때 곁에 누군가가 함께하면 위기를 극복할 힘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저도 대중의 평가 속에서 마음이 무너졌을 때가 있어요. 그런 시기를 겪고 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확장되더라고요. 걸어가다가 숨이 차면 쉬어 갈 줄 알아야 하고, 스스로 충분히 쉬고 난 뒤에 다시 걷기 시작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해요. 지난날의 저를 돌아보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정작 제 마음을 돌보지 못했어요. 후배들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길 바라요.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사람들을 돌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연애나 결혼에 대한 관심은 없나요?(웃음)
인연은 언젠가 찾아오겠죠?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일단 한국화에 몰입하고 싶고 틈틈이 작품으로 인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커요.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을 찾기보다는 지금 저에게 주어진 일에 몰두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궁금해요.
사랑이요. 재미, 유쾌함, 감사함이 떠올랐는데 이 모든 단어를 아우를 수 있는 건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끝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어요?
없어요.(웃음) 어떤 캐릭터든 김규리만의 방식으로 표현해내고 싶어요. 연기라는 게 참 매력적이에요. 인생에서 무너졌던 경험이나 슬픔, 아픔이 연기의 재료가 돼요. 그래서인지 과거에 겪었던 시련, 앞으로 다가올지 모를 불행도 다 괜찮은 거 같단 생각을 해요.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돼요. 그리고 제 길을 나아가는 거죠.
김규리는 한시도 빠짐없이 기자와 눈을 마주쳤다. 마주한 그의 두 눈은 참 솔직했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볕이 김규리의 얼굴을 감쌌던 오후. 검고 뚜렷했던 눈동자가 갈색빛으로 물들었다. 봄볕처럼 따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