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야무지게’ 연기했다. 웃었다 울었다, 시청자의 감성을 쥐었다 폈다 하며 인생 캐릭터를 갱신했다. 김태리가 열연한 tvN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최근 인기리에 종영했다. 극 중 김태리는 여름을 닮은 사랑스러운 10대 소녀 ‘나희도’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해 또래 연기자 중엔 드물게 ‘연기파 배우’에 당당히 안착했다.
“고등학생 연기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어요. 느끼는 대로 표현했더니 너무 재미있었어요.”
배우 김태리는 완벽주의자다. 몰아치듯 자신을 궁지로 몰며 연기한다. 덕분에 김태리의 나희도는 유난히 빛났다. 나희도를 쏙 빼닮은 서른세 살의 김태리는 요즘 어떤 생각을 할까?
나의 첫사랑, 나의 학창 시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인기리에 종영했다. 김태리의 연기도 호평 일색이다.
1년 동안 촬영했다. 이렇게 빨리 시간이 지나갈지 생각도 못 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어 얼떨떨하다. 개인적으로 에너지가 넘칠 때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희도를 만났다. 희도도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친구다.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져 과분한 칭찬을 듣게 된 것 같다.
배경이 1990년대이고, 고등학생 연기를 해야 했다. 발랄함을 표현하느라 초반엔 다소 오버한다는 평가도 있었다.
나희도라는 캐릭터를 발톱의 때만큼도 표현하지 못한 것 같다. 아, 오버한다는 평가? 그런 게 있었나?(웃음) 사실은 1화를 제대로 못 봤다.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내가 나온 걸 잘 못 본다.
시청률이 높았다. 그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
시국이 시국인지라 시청자들이 가볍고 발랄하고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드라마에 목말라하셨던 것 같았다. 겨울에 방영을 시작했는데 초록초록한 여름의 느낌으로 화면이 채워진 것도 힐링의 지점이었던 것 같다. 덧붙이자면, 주인공뿐만 아니라 모든 캐릭터가 살아 움직였다. ‘어머!’ 하면서 보게 만들지 않았나.
희도의 어떤 매력에 끌렸나?
희도는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빛나는 아이다. 이렇게 밝고 솔직하고 순수하고 당당하고 구김살이 없고 자격지심이 없는 것이 좋았다. 소녀라는 지점도 좋았다.
무려 12회까지 고등학생 연기를 했다. 교복을 입은 소감은 어땠나?
정말 좋았다. 희도의 교복은 정말 예뻤다. 교복을 입고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희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0대와 20대, 그 사이 희도의 성장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상당히 어려웠다. ‘어느 지점부터 바뀌어야 하지? 이 지점부터인가? 이 사건을 겪은 이후에 희도의 태도나 생각이 달라졌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에 갇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상대역이었던 (남)주혁이가 조언을 해줬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많이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더라. 생각해보니 나도 그렇더라. 그걸 나중에 깨달아서 그때부터는 어른이 된 희도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사건이 있고, 사건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부분도 있었다.
결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슬펐다. 지난 사랑은 늘 미화되거나 추상적으로 아름답게 포장돼서 생각된다. 아마 보는 분들도 이 추상화된 아름다움이 마치 자신의 첫사랑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한데 이루어지지 않아서 너무 슬펐다.
김태리의 첫사랑은 어땠나?
첫사랑? 그건 말씀드리기가….(웃음) 여하튼 희도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나는 특출나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쏟아져 내리는 찬란한 학창 시절을 보내진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충격받았던 사건이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잘나가는 학생도 아니었고, 그냥 떡볶이 먹으러 가자고 하면 네다섯 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부류였다. 졸업식 날 강당에 앉아 있는데 잘나가는 친구, 그러니까 나랑 그렇게 친하지 않은 친구가 뒤돌아서 내게 “와, 졸업이다! 태리야, 진짜 재미있지 않았냐?” 하는 거다. 나는 ‘어? 그렇게 재미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씁쓸한 감정이 올라왔다. ‘그렇게 재미있었나? 너는 그랬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슬픈 감정이었던 것 같다.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친구가 부러웠다.
매회 명대사가 쏟아졌다.
보통 작품이 끝나면 대사가 한 줄도 기억이 안 나는 스타일이다. ‘왜 이렇게 멍청하지?’ 할 정도다.(웃음) 뭐가 있지? 아, 지금 문뜩 생각나는 건, 희도가 ‘백이진’에게 “널 가져야겠어!”라고 고백하는 대사다. 정말 어려웠다. 사실 이해가 잘 안 돼서 어려웠다. 배우는 본능적으로 내 캐릭터가 바보처럼 보이지 않길 바라는데, 그 대사는 정말 바보 같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희도는 바보 같은 아이고, 이상한 아이다. 그걸 내가 잊고 있었던 거다. 희도는 사랑을 만화책으로 배운 아이고, 사랑은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아이이지 않나. 내가 충분히 살리지 못해 아쉬웠고, 그 대사가 희도를 너무 잘 표현하는 대사라는 생각도 들었다.
명장면도 많았다.
2부 엔딩 장면을 정말 사랑한다. 우리 드라마를 사랑해준 많은 분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한다. 슈퍼 앞에서 희도와 이진이 슬러시를 먹는 투샷이 길게 나온다. 그 장면의 색감과 두 사람의 여름날 분위기, 거기서 둘이 나눴던 이야기들이 좋았다.
10대 소녀일지라도 기존 로맨스에서 소비돼온 여성은 늘 예뻤다. 희도는 그 전형에서 벗어난 캐릭터였다.
내가 본 희도는 비현실적인 아이 같았다. 어떻게 그런 아이가 있나? 너무 완벽하지 않나? 연기를 하는 내내 희도가 정말 멋있었다. 내가 희도를 연기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개인적으로 희도의 헤어스타일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희도의 그 산발 머리가 캐릭터가 완성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상대역인 남주혁과의 호흡은 어땠나?
최고였다. 많이 배웠다. 주혁이는 굉장히 위트 있는 사람이다. 자기감정에 몰입돼 다운되는 법이 없다. 항상 무언가를 끌어내려고 하고 어디서든 에너지를 가져오려고 한다. 어떻게 해서든 현장에서 유머러스함을 유지한다. 그 점이 배우로서 배울 점이고, 좋은 모습인 거 같다. 또 임기응변도 뛰어난 친구라 함께 연기할 때 굉장히 재미있다.
내가 본 희도는 비현실적인 아이 같았다. 어떻게 그런 아이가 있나?
너무 완벽하지 않나? 연기를 하는 내내 희도가 정말 멋있었다.
당신을 행복하게 했다면 됐습니다
남주혁뿐 아니라 또래 배우들과의 호흡이 드라마의 재미를 더 높였다.
사실 초반에 혼자 걱정을 많이 했다. 늘 현장에서 나는 막내였고 경험 많은 선배들이 계셔서 부담이 적었다. 고개 끄덕이고 수저 놔드리고 물 떠다주면 됐는데, 글쎄 세상에나 내가 맏언니라는 거다. 어떡하지? 내가 뭘 해야 할 것 같았다. 한데 내 걱정은 기우였다. 배우들이 점점 자신의 캐릭터에 녹아들면서 친밀함과 편안함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더라.
발성이 달라진 것 같다. 좀 더 시원해졌다고 해야 할까.
희도를 연기하면서 스스로 놀랐던 순간이 많았다. 전작인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영화 <승리호>는 톤을 잡으려고 이것저것 많이 연구했다. 톤을 높여 말해보기도 하고 어조를 다르게 해보기도 했다. 전작들이 내 목소리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다가갔다면 이번 작품은 고민 없이 그냥 했다. 대사를 읽고 ‘이 상황에 있다면, 희도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그게 전부였다. 말할 때의 편안함, 연기할 때의 즐거움, 그냥 내뱉는 자유로움을 희도가 나에게 줬다.
김태리가 아닌 희도는 상상할 수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싱크로율도 궁금하다.
닮은 점? 상당히 많았다. 희도가 내뱉은 말이나 행동 중에 내가 실제로 했던 행동이나 말이 많았다. 그래서 작가님에게 “어떻게 저를 이렇게 대본에 넣었어요?” 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작가님이 희도를 구상하고 쓰실 때 내가 그동안 했던 인터뷰 영상을 많이 보셨다고 한다. “나, 너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 하시는 거다.(웃음) 물론 다른 부분도 있었다. 초반에 캐릭터를 분석할 때 ‘희도와 내가 이 부분이 다르니까 명심하고 연기하자’ 생각했던 부분이 있다. 희도는 어떤 상황에도 상대의 장점을 바라볼 줄 아는 친구다. 예를 들면 경쟁자에게도, 이진이에게도 “와, 넌 진짜 똑똑하구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하고 말을 한다. 그렇게 인정해준다. 근데 나는 그 상황에서 ‘와, 쟨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난 왜 못 하지?’ 하면서 나의 부족함부터 파고드는 성격이다. 희도는 자신의 모자란 부분이 아닌 상대의 빛나는 점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니까 훨씬 재미있는 삶을 사는 거다. 나는 ‘난 왜 이렇게 멍청하지’ 하면서 한 바퀴 구르고 괴로워한 다음에 성장하는데, 희도는 그 순간에도 성장한다. 그래서 희도는 행복하다.
김태리는 MZ세대다. 1990년대 후반을 연기로 살아보니 어땠나?
추억 속에 남아 있는 부분이 있어 촬영하면서 재밌었다. 그립기도 했다. 이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채팅으로 친구를 만나는 거다. 희도는 채팅으로 만난 친구와 약속을 잡는다. 한데 서로를 알아봐야 하니까 약속한 대로 꽃을 들고 색깔 있는 티셔츠를 입고 나간다. 너무 낭만적이지 않나. 그것뿐만 아니라 낭만적인 게 너무 많았다. 낭만의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뷔 후부터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지만, 배우로서의 고민이 깊었던 시기가 분명 있었을 것 같다.
모든 배우가 그렇겠지만 힘들지 않은 작품이 없다. 힘들지 않은 캐릭터?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더 잘하고 싶으니까. 어떻게 하면 작가님이 쓴 텍스트를 더 잘 보여줄 수 있을지, 더 연기를 잘할지 늘 고민한다. 늘 그렇듯 나의 욕심을 채우기에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그 생각에서 오는 괴리가 첫 번째 고민이다. 시야가 좁아져 한 우물만 파고 있으면 사람이 미친다. 더 답이 안 나온다. 연기가 정말 어려운 게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하는 게 정답인데, 내가 하는 걸 인정할 수 없고 정답이 아닌 것 같아 늘 고민한다. 그래서 작품을 만나면 늘 괴롭다.
온라인에 이런 반응이 있었다. “김태리는 매번 진흙 같은 인생에 진주 같은 구원자가 돼주는 역학을 한다.”
와! ‘구원자’라는 단어는 영화 <아가씨>에서 나왔던 단어다. 구원자….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하고, 배우로서 행복하다. 이번 작품을 할 때 지인들이 문자로 이런 얘기를 종종 해줬다. “태리야, 넌 힘들다고 하지만 난 네 연기 보면서 너무 힐링이 돼.” 그럴 때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네. 당신을 행복하게 했다면 됐습니다!” 나는 진짜 그거면 됐다. 충분하다.
작품과 캐릭터를 고를 때 어떤 기준이 있나?
직관적으로 글을 읽고 순간적으로 파악을 잘하는 편이다. 분석하지 않아도 캐릭터가 이해되는 부분이 커서 그때 느끼는 감정이나 첫인상이 크게 작용한다. 그리고 그 직관을 따른다. 그때 느꼈던 대로 캐릭터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좋은 대본, 좋은 캐릭터, 좋은 감독님을 가장 중요시한다.
이번 드라마에서 펜싱 선수로 나왔다. 연습은 어떻게 했나?
몸이 바스러질 만큼 했다. 그만큼 펜싱은 희도한테 소중한 삶의 한 부분이다. 펜싱이 드라마의 콘셉트 중 하나로 가볍게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진짜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고, 또 소개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고 펜싱을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덕분에 몸이 많이 아프지만 또 건강해진 부분도 있다. 겪어보니 참 재미있고 매력 있는 스포츠더라. 펜싱을 알게 해준 작가님에게 감사할 정도다.
대체로 에너지가 많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정작 김태리라는 배우의 에너지 원천은 뭔가?
(한참 고민하다) 예를 들어 희도 캐릭터는 그 자체로 자유롭다. 연기할 때 어떤 제한을 둘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상상한 모든 것을 표현해도 상관없는 캐릭터였다.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크다. 배우 김태리는 그 즐거움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그리고 감독님도 그렇지만 이번 현장 스태프 중에 <미스터 션샤인>을 함께 했던 스태프가 많았다. 편안한 분위기의 현장에서 오는 에너지도 크다. 또 좋은 상대 배우를 만나면 힘을 받는다. 주혁이가 그랬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다듬어지지 않은 채, 다양한 표정과 제스처로 자신의 생각을 몰아치듯 표현했다. 에너자이틱했다. ‘여배우’의 틀을 깼다. 현실의 김태리를 보고 있자니 그녀의 행보가 더욱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