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스마트폰 사양 논란
“절대 노조를 만들지 않는다. 대신, 노조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느낄 만큼 직원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 삼성이라는 기업을 대표하는 경영 철학 중 하나인 ‘무(無)노조 경영’을 설명하는 말이다. 하지만 최근 삼성전자를 둘러싼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삼성의 핵심 사업군 중 하나인 스마트폰의 성능 논란에서 시작된 이슈가 사내 2030세대(일명 MZ세대) 직원들의 임금 갈등까지 확산되는 분위기다. 삼성 임원진도 부랴부랴 내부 직원들과의 소통 및 복지 확대를 추진 중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20대 취업 희망 최우선 기업인 삼성전자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GOS가 그렇게 중요한 이슈?
조금 어렵지만, 일단 사태는 ‘게임 최적화 서비스’, 일명 GOS 논란에서 시작했다. GOS는 고사양 게임을 할 때 스마트폰이 과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마트폰 내 그래픽처리장치(GPU) 성능이나 화면 해상도를 고의로 낮추는 기능이다. 삼성전자는 갤럭시 S22를 출시하면서 게임이나 특정 애플리케이션(앱)을 이용할 때 GOS를 강제 실행하도록 했다가 논란이 됐다. 광고 등에서는 GOS 작동 전 사양을 강조하며 ‘역대 최고 성능’이라고 홍보했지만 실제로는 성능을 제한한 것이 ‘고객을 기만했다’는 지적이었다.
삼성전자는 이용자 공식 커뮤니티 삼성 멤버스 내 공지를 통해 ‘갤럭시 S22의 GOS 논란’에 대해 관련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한 문제 해결 등을 약속하며 두 차례에 걸쳐 사과문을 공지했다. 삼성전자는 “고객의 마음을 처음부터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재밌는 점은 삼성 임원진이 이슈가 처음 터졌을 때 ‘소통이 부족했다’며 내부에 먼저 사과의 뜻을 전했다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정작 피해를 본 소비자들에게는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비판으로 소개됐지만, 거꾸로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임원진이 실무진의 의견을 무시했다’는 문제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책임자로 지목된 노태문 삼성전자 MX사업부장 사장. 직원들 사이에서 “경영진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자 노태문 사장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 지난 3월 10일 내부 타운홀 미팅 때 논란에 대해 “소통이 부족했다”며 사과했다. 개발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도 전달했다. 소비자가 아니라, 임직원들에게 먼저 사과할 만큼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거꾸로 “그동안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의사 결정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라는 불만으로 확대됐다.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서는 삼성전자 소속이라고 밝힌 직원이 ‘삼성전자 천만주주께 올리는 글’을 통해 “(주주총회에서) 노태문 사장의 선임안과 보수 한도 승인을 반대하는 주주운동을 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MZ세대는 참지 않지!
재밌는 점은 삼성전자 내 MZ세대가 이런 임원-직원 간 갈등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MZ세대는 1980년생부터 1994년생까지를 일컫는 밀레니얼(M) 세대와 1995년부터 2004년 출생자를 뜻하는 Z세대를 합쳐 일컫는 말이다. 통상 20~30대를 떠올리면 된다.
MZ세대의 ‘회사를 향한 목소리 내기’는 사실 삼성전자만의 문제가 아니기도 하다. 지난해 1월, 다들 쉬쉬하던 기업 성과급 문제를 터뜨린 것이 MZ세대다. SK하이닉스 내 MZ세대 직원들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왜 회사 이익은 역대 최대 규모로 실현됐는데 우리의 성과급은 그만큼 반영되지 않느냐”며 불만을 제기했고, 이에 SK하이닉스는 내부 분위기 쇄신을 위해 꽤나 애를 써야 했다.
앞선 GOS 논란 역시 삼성전자 임원진이 MZ세대가 주축이 된 실무진의 의견을 ‘권위’로 묵살하려 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그리고 MZ세대 위주의 삼성전자 사무연구직 노조는 개인 성과를 반영한 공정한 보상 체계를 요구하고 나섰다.
역대 최대 실적에 “성과급 달라” 목소리
지난해는 SK하이닉스였다면, 이번엔 역대 최대 실적을 낸 삼성전자가 성과급 이슈의 핵심에 위치해 있다. 2020년 무노조 경영을 철회한 삼성전자. 아직 가입자가 많지는 않지만 삼성전자 내 4개 노조가 있다. MZ세대를 중심으로 노조 가입률이 높아지면서 가입자가 5,000명에 육박한다는 게 노조 측의 설명이다.
삼성전자는 노조와 회사 간 협의회(노조협의회)를 통해 임금을 결정해왔는데, 노조는 이번에 사측에 15%대 기본급 인상과 영업이익 20% 성과급 지급을 요구했다. 지난해 합의한 임금인상률 7.5%의 2배가 넘는 규모다. 지난해 메모리 호황 등으로 인한 역대급 실적 호황에도 불구하고 경쟁사인 SK하이닉스와 비교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점, 기본급이 낮고 성과급 비중이 높아 임금 인상 효과가 미비했던 점 등 그동안 축적됐던 사내 불만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요구 사항이라는 평이다.
지난 1월에는 실적을 주도한 반도체 사업 부문에서 낮은 성과급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이 표출되자 반도체 부문에 대한 이례적인 특별 상여금 지급과 반도체 부문의 수장인 경계현 DS부문 대표이사 사장이 추가 보상을 직접 약속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MZ세대가 중심에 섰다. 성과급 등 회사의 대우와 내가 제공한 노동의 결과가 비례하는지 꼼꼼하게 따져보는 MZ세대가 투쟁을 이끄는 핵심 세력이 됐다. MZ세대가 주축이 된 노조는 중앙노동위원회 조정에도 사측과 합의하지 못해 파업 등 쟁의권을 얻어냈다. 1969년 설립 이후 53년 만에 처음이다.
임금 협상을 놓고 일절 노조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경영진도 부랴부랴 교섭에 나섰다. 3월 18일 ‘소통왕’으로 평가받는 경계현 반도체(DS)부문 대표이사 사장이 직접 화성사업장에서 노조 대표자와 만나기까지 했다. 이 자리는 노조 측이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전자 최고경영진과의 직접 대화를 요구하고 사측이 동의하며 성사된 자리였다.
당시 만남의 자리에서 노조는 주요 요구 사항인 급여 체계 개선을 요구했다. 영업이익을 성과급 지급 기준으로 삼고 기본급의 정액 인상 등을 사측에 제안했다. 그동안 지급된 성과급의 기준이 불투명했고, 규모 역시 영업이익 등과 관계없이 경영진 재량으로 결정된 부분을 문제 삼았다.
재계 관계자는 “MZ세대는 평생 고용과 승진으로 보상받았던 기존 세대와 다르게 평생직장 개념보다는 대우가 좋은 곳으로의 이직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노력에 대한 보상도 철저하게 따지는데 이런 MZ세대의 정서가 가장 보수적인 기업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삼성전자에서도 불거진 것”이라고 풀이했다.
재계에서는 MZ세대를 중심으로 한 노조 리스크가 삼성그룹을 포함한 모든 기업에 부담이 됨과 동시에 ‘항상 안고 가야 하는 상수’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실제 삼성그룹 내 주요 계열사의 단체 급식을 책임지고 있는 삼성웰스토리에서는 성과급 미지급 결정을 놓고 직원들의 불만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6월, 삼성그룹 사내 급식 일감 몰아주기를 했다며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웰스토리에 96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는데, 사측은 이를 이유로 연말 성과급을 지급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에 직원들은 “경영진이 잘못한 건데, 왜 직원들 성과급을 뺏느냐”며 반발했다.
30대 중반의 삼성전자 직원은 “회사는 실적이 좋아도, 안 좋아도 위기라고 하는데 이제는 ‘믿을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회사를 상대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며 “보상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보상이 어떻게 결정됐는지 절차도 투명하고 공개적이어야 직원들이 납득할 것”이라고 삼성그룹 내 분위기를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