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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와 질병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질병에 대하여.

On March 1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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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신체적·정서적·성적 학대를 당한 경험이 모든 종류의 정신 질병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실제 어린 시절 겪었던 트라우마는 공격적 성향, 우울증, 인격장애 및 조울증 등의 형태로 나타나 정신 건강을 해친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심장학회는 어린 시절에 학대, 성폭력을 당하거나 폭력을 목격하는 등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 성인이 된 후 심장병에 걸릴 위험이 증가한다는 내용의 학술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어린 시절 정신적 외상을 겪은 사람은 비만, 고혈압,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고, 이런 증상이 심혈관질환 발병 가능성까지 높인다고. 결론적으로 제때 발견하고 치료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심신을 망친다는 것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트라우마를 겪는 10대 청소년은 슬픔, 분노, 두려움과 같은 얼굴 표정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PTSD와 행동장애가 있는 13~19세 청소년 37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PTSD의 정도가 심각한 아이일수록 화난 표정을 잘 구별하지 못했다. 화난 얼굴을 두려워하는 얼굴로 착각했는데, 사실 두려움은 PTSD와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PTSD인 경우 위협을 감지하거나 투쟁 도피 반응이 과하게 활성화되는 방법으로 생존 모드가 작동한다. 사실 얼굴 표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유대감이 정상적으로 형성되고 의사소통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의 경우 트라우마로 인해 감정 처리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서 유대감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러한 어려움이 사회적 신호를 인지하는 데 착오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고혈압·당뇨병·심장질환

1998년 발표된 ACE(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아동기 부정적 경험) 연구에 따르면 아동기 부정적 경험 점수가 높을수록 정신적 문제는 물론 고혈압, 당뇨병, 심장질환, 뇌졸중 등의 만성적 신체 질병도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비만 클리닉을 운영하던 내과 의사 빈센트 펠리티 박사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겪은 아이들이 불안, 외로움, 우울감, 자책감 같은 정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식과 폭식을 해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부정적 경험은 아이에게 독성이 강한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키는데, 스트레스 반응이 성장하는 아이의 세포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어릴 적 겪은 트라우마가 일생의 건강을 좌우하며 다양한 정신적·신체적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최근 서구의 많은 나라는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을 줄이는 예방 활동이 우리의 정신 건강과 신체 건강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대처에 나서고 있다. 마음의 병인 트라우마를 제때 돌보지 않으면 평생의 건강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트라우마와 PTSD의 연관성

트라우마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트라우마는 그 자체로 질환은 아니지만 PTSD를 비롯한 다양한 건강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PTSD는 임상적인 치료가 필요한 질환으로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 중 일부에게 나타난다. 살면서 경험하는 중대한 사건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발병하는 것이다. 일상 중 혹은 꿈을 통해 트라우마를 재경험하고, 트라우마를 떠올릴 만한 행동과 장소, 사고를 회피, 부정적 정서 불안과 우울 같은 증상을 보인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PTSD 환자는 지난 2015년 7,268명에서 2019년 1만 570명으로 45.5% 증가했다. 연령별로 살펴보면 20대가 가장 많았고, 50대·30대·40대 순이었다. 사회적 활동이 가장 활발한 20~50대가 전체의 69.2%를 차지했다. 성별로는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았고, 그중에서도 20대 여성이 가장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트라우마 치료에 중요한 3가지

1 안정감의 확립
자신이 위험 상황으로부터 현재는 안전하고 보호받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안정된 장소, 보호해주는 가족, 믿을 수 있는 치료자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고통이 트라우마에 대한 뇌의 자동적 반응으로 일어나는 증상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명상, 요가, 심호흡, 이완요법 등을 통해 스스로 안정감을 찾는 방법을 배우는 게 좋다. 불안, 우울, 불면, 분노 폭발 등의 증상이 심할 때는 약물 치료를 동반해야 한다.

2 정신적 외상 기억의 처리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둔감화시키는 치료다. 대화로 진행되는 상담 치료, 감정이나 신체감각 등에 초점을 맞춘 특수한 형태의 치료 기법이 개발되고 있다. 그중 EMDR(안구 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 치료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단편을 떠올리는 동시에 안구 운동과 같은 양측성 자극을 주는 방식으로 뇌의 정보 처리 시스템을 활성화시킨다. 이를 통해 기억의 처리가 다시 일어나도록 한다.

3 대인 관계의 회복
트라우마로 인해 위축되고 왜곡됐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건강하고 원만하게 회복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서로 신뢰하며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인 관계를 맺는 것도 트라우마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족이나 배우자와의 관계 회복은 트라우마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트라우마 극복의 시작이다.

 김준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트라우마에 취약한 이들을 돕는 전문가가 등장한 데 이어 새로운 치료기법도 소개되고 있지만, 트라우마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치유 과정은 여전히 험난하다. 하지만 김준기 전문의는 “트라우마를 제대로 직면하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면 트라우마는 삶에서 그리 중요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일이 되리라 믿는다”는 희망을 잊지 않는다.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살면서 안 좋은 일을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데, 그것이 다 질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체에 상처가 났을 때 잘 소독하면 저절로 아물듯이 우리의 뇌에도 저절로 아물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 좋은 기억의 회로가 뇌 속에 계속 남아 있는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극복해내는 힘보다 트라우마 경험으로 인해 뇌에 불안정해진 정도가 더 커졌을 때는 쉽게 치유되지 않기 때문에 치료가 필요합니다. 머리로는 다 지나간 일이고 이제는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몸이 그에 대해 위험신호를 보내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 취약한 이들이 있나요?
여성, 아동, 노약자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그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죠. 사회적 약자인 경우 트라우마에 대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긍정적 자원이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아이는 약자 가운데서도 가장 취약하죠. 어른은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거나 도움을 청할 수도 있지만, 아이는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트라우마의 가해자가 부모일 수도 있고, 트라우마를 겪어도 부모가 너무 걱정할까 봐 무서워서 말을 못 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상에서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스몰 트라우마라고 해도 복잡하고 큰 트라우마로 남는 경우가 많죠.

경미한 트라우마도 치료가 필요한가요?
일상에서 발생한 작은 사건일지라도 후유증이 크게 남을 수 있습니다. 특히 자아 기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아이에게 스몰 트라우마는 성인이 된 뒤에도 삶에서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죠. ‘스몰’의 의미가 일상생활 도처에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지, 결코 ‘작은’ 사건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성장하는 경우가 많을 거 같아요.
대부분의 아이가 자신의 고통을 부모나 주변 어른들에게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또 아이가 표현했는데 어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죠. 아이와 같은 눈높이에서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그저 투정 부리는 아이로 보일 수 있죠. 예전에는 부모뿐만 아니라 부모를 대신해 아이를 보호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는 지역사회의 지지 체계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맞벌이하는 가정이 대부분이니까 보통 1명, 운 좋으면 2명의 부모 정도죠. 그렇기에 아이를 안심시키고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부모의 역할뿐만 아니라 어린이집 교사, 초등학교 교사의 역할이 정말 중요합니다. 언어 발달이 늦거나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등 아이가 비적응 행동을 보이지는 않는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하죠.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는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1980년대에 미국의 한 비만 클리닉을 운영하는 내과 의사가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환자 중 어린 시절 부정적 경험, 즉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또 신체적으로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만큼 어린 시절의 부정적 경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파생되는 질병이 궁금합니다.
대표적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불안장애, 공황발작,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불안하고 무서움을 느끼는 광장공포증, 우울증, 대인기피증, 알코올 남용, 식이장애 등 정말 많습니다. 신체적 질병으로는 류머티즘, 섬유근육통, 요통과 두통을 비롯해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들, 면역 기능 약화 등이 모두 트라우마로 인한 신체질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정신적 질병은 물론 신체적 질병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트라우마로 내원하는 이들에게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해주나요?
트라우마로 인한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응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하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머리로는 괜찮다는 것을 아는데 몸이 반응하니까 스스로 수치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정 사건 이후, 혹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힘들고 지금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느껴지면, 힘들다는 것을 가족이나 주변 지인들에게 알리고 전문가를 찾아가 검사를 받는 게 좋습니다. 주변의 도움을 받는 것이 트라우마 극복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죠. 적절한 시기에 도움을 받아 본인에게 필요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우리의 뇌 안에 장착돼 있습니다.

김준기는…

김준기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트라우마 연구자이자 식이장애 전문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연세의료원 정신과에서 수련 후 식이장애 클리닉 <마음과 마음> 원장, 한국 EMDR 협회 이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 등이 있다.

CREDIT INFO
에디터
김연주
취재
박현구(프리랜서)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각 연예인 SNS
2022년 03월호
2022년 03월호
에디터
김연주
취재
박현구(프리랜서)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각 연예인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