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외국이 배경인 동화를 읽고 자라났음에도 그곳이 외국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청어와 베이컨을 구워 먹고 검은 빵 한 덩어리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으며 일상적으로 파이를 굽는 사람들과, 밥과 된장찌개와 김치를 즐겨 먹는 내가 다르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마치 아수라 백작처럼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있는 소녀인 나의 절반은 낡은 흰 셔츠를 입고 닳아빠진 가죽신을 신고 있는 소년 이반이었다. 그들의 땅과 나의 땅은 다르지 않았다.
그런 내가 낭만적인 이국을 동경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기억을 되짚어보면 ‘슈바빙’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열쇠를 목에 걸고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다가 텅 빈 집으로 돌아가던 내가 ‘아스팔트킨트’라는 것을 알게 해준 책. 전혜린이 살았고 남은 생 내내 그리워했던 슈바빙을 생각하면 향수가 피어오른다. 세상에, 가보지도 못한 도시를 그리워하게 되다니. ‘회색의 포도(鋪道)와 레몬빛 가스등’이 있는 풍경을 그린 듯 떠올릴 수 있게 되다니.
슈바빙을 그리워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모두 전혜린에게 전염된 이들이다. 그가 서른한 살에 이른 죽음을 맞이한 다음 해인 1966년에 유고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나왔다. 이 책은 1960년대와 1970년대 베스트셀러로 오르며 전혜린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출간되자마자 16주간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던 이 책뿐 아니라 그가 번역한 책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도 전혜린 열풍에 한몫했다.
그가 죽은 그해 8월 두 명의 여고생이 “나는 전혜린과 똑같이 고독하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동반 자살했다. 이 열기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으며, 지금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잔잔한 스테디셀러로 남았다.
1934년 조선총독부 고급 관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그는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천재라는 평가를 받던 그의 아버지는 아이가 서너 살이었을 때 이미 한글과 일본어를 직접 가르쳤다. 그 또한 지도교수였던 신태환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서 1세기에 한 번쯤 나올까 말까 한 천재”였다. 서울대 법학과 입학 후 독일문학에 심취한 그는 재학 도중 학교를 중퇴하고 독일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집안이 정해준 남자와 결혼한 그는 딸 하나를 둔다. 귀국해서 서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등에서 강의하며 수많은 에세이를 발표하고 독일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가 싶더니, 성균관대학 조교수가 되는 해에 이혼을 하고 그다음 해에 자살한다.
중학교 때 이미 ‘절대로 평범해져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던 그. “완전한 환희나, 절망, 무엇이든지 잡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것에 의해서 뒤흔들려보고 싶다. 그런 순간에 대해서 갈증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했던 그. “모든 평범한 것, 목적 없는 것, 무기력한 것, 비굴한 것을 나는 증오한다! 자기 성장에 대해 아무 사고도 지출하지 않는 나무를 나는 증오한다.”라고 열렬하게 일기장에 적어넣던 그. 지금도 나는 그의 영향력 아래 있다. 슈바빙 하면 떠오르는 안개 같은 그리움이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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