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을 다 바쳐서 믿었던 그 사람." 마리아가 주현미의 '울면서 후회하네'를 열창한 순간, TV조선 예능 <미스트롯 2>의 심사위원과 패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을 한 22살의 미국 소녀가 심금을 울리는 트로트 장르 특유의 감성을 어색함 없이 표현했기 때문. 이윽고 1절이 채 끝나기 전에 <미스트롯 2> 최초이자 외국인 참가자 중 최초로 '올 하트'를 받았다. K-팝 아이돌을 꿈꾸며 혈혈단신 한국으로 건너온 미국 소녀 마리아가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는 순간이었다. 마리아는 <미스트롯 2> 최종 12위까지 올랐고 K-트로트 인기 가수 대열에 합류했다.
"제가 12위까지 올라갈 거라는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어요. 지원자가 2만 명이라고 해서 첫 번째 경합에만 합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두 번째 경합에서 탈락하겠지 생각했는데, 이게 웬일이에요? 합격한 거예요. 참가자 중엔 10년 동안 트로트를 불렀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2년밖에 안 된 제가 합격하다니…. 꿈같은 시간이었죠. 요즘엔 앨범 준비를 하고, 제게 어울리는 트로트곡을 직접 쓰고 싶어서 작곡을 공부하고 있어요."
마리아에게 한국 가수로서 길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미국 뉴저지에서 개최된 한인회 노래 대회에서부터였다. 아버지가 직접 도전을 권유했고, 그녀는 그룹 '포미닛'의 '미쳐'를 선곡해 노래, 랩, 춤을 선보였다. 해당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상품으로 받은 마리아는 단순 관광이 아닌 한국행을 결심했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나라에서 홀로 도전하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포기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용기를 내자는 마음이 앞섰다.
"한국에서 실패할까봐 무서웠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어요. 부모님 역시 걱정하시긴 했지만 도전하고 싶다면 해보라고 용기를 주셨죠. 제가 어떤 선택을 해도 존중해주시거든요. 제가 한국에서 실패하고 미국으로 돌아와도 나무라지 않고 '고생했다'고 말해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죠. 그래서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든든한 백이었어요."
그렇게 부푼 꿈을 갖고 온 한국은 마치 제2의 고향처럼 느껴졌다. 처음 온 곳이었지만 첫발을 디딘 순간부터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아이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Mnet 예능 <너의 목소리가 보여> <유학소녀>, JTBC 예능 <히든싱어>, KBS2 시사·교양 <아침마당> 등에서 끼를 발산했지만 아쉽게도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마리아는 '내가 순정을 바친 한국이 내 마음을 외면했다'는 생각에 침울해하다가 우연히 가수 주현미의 노래를 들었는데 그 순간 그녀의 마음이 울렸다. '비 내리는 영동교'와 '울면서 후회하네'는 마치 마리아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땐 아이돌이 되고 싶어 노력을 많이 했는데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어요. 혼자서 실망도 많이 했죠. 그러다 우연히 영화 <귀향>을 봤는데 국악을 바탕으로 한 음악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더라고요. 한국 전통음악을 찾아 듣다가 주현미 선생님의 노래를 듣게 됐는데 딱 제 마음을 표현한 거예요. 삶에 대한 이야기, 부모님과 고향에 관한 노랫말에 공감했죠. 특유의 '꺾기'는 말할 것도 없이 좋았고요. 그렇게 트로트 가수를 꿈꾸기 시작했어요."
가장 좋아하는 디즈니 캐릭터는?
제가 어렸을 때 머리가 굉장히 길었는데 그 모습이 라푼젤과 비슷했어요. 또 성에 갇혀 힘든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어릴 적 저와 비슷한 것 같아서 라푼젤을 좋아해요.
한국어는 독학으로 공부했어요
마리아는 '신사동 그 사람' '정말 좋았네' '러브레터' '잠깐만' '추억으로 가는 당신' 등 주현미의 노래를 부르며 트로트 가수로서 초석을 다졌다. 가사의 의미가 헷갈릴 땐 주위에 물어가며 뜻을 깨달았고 트로트 특유의 감성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1년 3개월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미스트롯 2> 출연이라는 기회가 주어졌다.
"미국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오롯이 재능과 자신감만 보는데 한국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외모도 경쟁력 중 하나더라고요. 외국인이라서 노래 가사를 외우는 것만으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안무와 외모까지 신경 쓰려니 이만저만 바쁜 게 아니었어요."
마리아에게 <미스트롯 2> 출연은 1등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마리아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이 생각은 경합 회차가 올라갈수록 '이 정도면 충분할까?'라는 의문으로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장윤정의 말 한마디 덕분이었다.
"장윤정 선생님이 제게 '외국인치고 트로트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잘한다'라는 말을 해주셨을 때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저는 외국인이 트로트를 불러서가 아니라 트로트를 잘 부르는 가수로 인정받고 싶었거든요. 그동안 한국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는데 겉도는 느낌이 있었어요. 아무리 한국말을 잘해도 외국인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죠. 그런데 장윤정 선생님의 말을 듣고 외국인 마리아가 아닌 마리아로서 한국에 동화된 느낌이 들었어요."
가수 마리아를 보고 감탄이 나오는 것은 노래 실력뿐만이 아니다. 마치 한국인 같은 한국어 실력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외국인 특유의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 발음에 그녀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짐작이 갔다.
"많은 분이 저에게 어떻게 한국어 공부를 했느냐고 물어보는데, 독학했어요. 문장 속 단어가 부드럽게 이어지는 영어와 달리 한국어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쉼이 있는데 그게 독특하게 들려서 좋아했거든요. 한 무료 강좌 사이트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하루빨리 잘하고 싶어서 한국어로 일기를 쓰곤 했어요. 제 한국어 실력의 절반 이상은 당시 공부했던 것에서 나오는 거예요. 한국에 와서 더 배우고 싶어서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 지원했는데, <미스트롯 2>에 출연하면서 한 달밖에 다니지 못해서 아쉬움이 커요."
마리아는 언제나 그녀의 선택을 응원하는 부모님 아래서 밝게 자랐다.
코로나19 종식 후 부모님이 한국에 오면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싶고,
어머니와 함께 셀프로 귀고리를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한국 아이돌은?
최근엔 '더보이즈'의 멤버인 큐가 최애 아이돌이에요. 친절하고 예의 바른 모습이 보기 좋아요. 또 '레드벨벳'의 조이는 별자리가 저와 같은 처녀자리라서, '엑소' 첸은 생일이 저와 같은 9월 20일이라서 좋아해요. 'BTS' 제이홉과 '아스트로' 차은우도 좋아해요.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딸 되고파요
마리아는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그녀에게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하는 팬들을 보며 인기를 실감한다. 또 팬카페에서 '국민 미국 딸 마리아'라는 문구가 적힌 풍선을 제작하고, 응원 문구를 적은 현수막으로 힘을 실어주는 것을 보며 감사함을 느낀다. 이 모든 것이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이룬 결과다. 그녀가 가수의 꿈을 이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부모님이다.
"아빠가 음악을 좋아하셔서 라이브 뮤직쇼나 디너쇼를 자주 보러 갔는데 항상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자연스럽게 저 역시 음악에 관심을 갖고 피아노를 배우고 합창단에서 코러스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되돌아보면 제가 음악을 한 것은 운명 같은 일이었어요."
마리아는 학창 시절 교우 관계가 원활하지 못해 심적으로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화목한 가정환경에서 밝게 자랐던 그녀는 중학교에 진학한 후 따돌림을 당해 우울증을 앓았다.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도 '내가 왜 살고 있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고.
"공부하고 성취감을 느끼면서 학업에 흥미를 느끼는 시기였는데 이면엔 우울함이 있었어요. 친구들과 관계가 힘들어서 심적으로 버거웠거든요. 또 당시 제가 짝사랑을 하고 있었는데 연애를 언제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했었어요. 친구들은 모두 연애를 하는데 저는 연애를 못 하니까 자신감이 많이 없었어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땅다람쥐 '깻잎이'와 시간 보내기요. 친구가 바빠서 대신 키우는 반려 땅다람쥐예요. 함께 산책하고 싶어서 천사 날개 모양의 하네스를 구매했는데 어서 빨리 깻잎이와 함께 산책하고 싶어요.
그만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었다. 각각 6살, 3살 터울의 오빠와 언니와 함께 비디오게임을 하며 즐거워했고, 작은 소품을 만들면서 시간을 보냈다. 손재주는 좋은데 그림은 못 그렸다며 웃는 마리아는 꿈을 이룬 자신을 보며 기뻐하는 부모님을 볼 때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주위에 '내 딸이 한국에서 유명한 가수'라고 자랑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빠는 제가 나온 유튜브 영상 조회 수를 점검하고 댓글도 찾아본다고 해요. 그런데 부모님이 한국에서 직접 본 게 아니라 제 인기를 실감하지 못하셨던 것 같은데 최근에 한국에 오셨다가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는 모습을 확인하곤 '우리 딸이 진짜 유명한 가수구나'라면서 행복해하셨어요. 말로 표현하진 않으셨지만 걱정도 한시름 던 것 같았어요."
하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속상했다고. 마음 같아선 한국 관광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예정된 스케줄이 있어 여의치 않았다는 것.
"부모님이 한국에 와서 한 달 동안 계시다 미국으로 돌아가신 지 일주일 정도 됐어요.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났는데 저와 함께 촬영을 하면서 부모님이 체력적으로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 미안했어요. 다음에 다시 부모님이 한국에 오시면 아빠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싶고, 엄마랑 동대문시장에 가서 자재 쇼핑을 하고 셀프로 귀고리를 만들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한국의 소울푸드는?
황태회막국수, 김치순두부찌개, 양평선지해장국, 불막창, 돼지껍데기. 모두 술안주이지만 술은 좋아하지 않아요.(웃음) 아! 떡볶이도 빼놓을 수 없어요. 어묵떡볶이, 로제떡볶이는 아무리 먹어도 또 생각나는 최애 음식이에요.
마리아는 코로나19가 종식되면 미국에 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어려서부터 자라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크다는 것. 미국에서 '미국 피자'와 '미국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며 소박한 꿈을 전했다.
"디즈니월드에도 가고 싶어요. 디즈니월드에 코스튬을 입은 캐릭터들과 아침 식사를 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어렸을 때처럼 캐릭터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싶어요. 그럴 때면 마치 제가 디즈니 영화 속의 공주가 된 느낌이 들거든요."
디즈니 영화 속 공주를 좋아하는 마리아는 동화 같은 사랑을 꿈꿀까? 앞서 학창 시절 친구들처럼 남자친구를 사귀어보고 싶었다는 그녀는 한국에 와서 그 꿈을 이루었다. 마리아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해봤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한국에서 첫사랑을 했어요. 드디어! 학창 시절에 꿈꿨던 시간이었죠. 그런데 장거리 연애를 하는 게 힘들어서 1년 정도 사귀다 헤어지게 됐어요. 지금은 좋은 추억으로 남았죠. 제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고요? 착하고 잘생기고 저와 개그 코드가 맞는 사람이요.(웃음) 무엇보다 사랑을 자주 표현해주는 사람이 좋아요. 제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달려올 수 있는,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최근엔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연예인들을 만나며 외로움을 덜었다는 마리아다. SBS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FC 월드 클라쓰로 합류하며 에바, 구잘, 아비가일, 사오리 등과 친분을 쌓게 된 것.
"나이는 다르지만 같은 상황에 놓여 있어서인지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정이 가더라고요. 특별히 고민을 토로한 적은 없는데 언제든지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는 언니들이 생겼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어요. <미스트롯 2>에 함께 출연한 양지은, 황우림 언니와 함께 친한 언니들이 생긴 기분이에요. 앞으로 연예계 활동이 더욱 기대돼요."
마리아는 비타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스스로 주변 사람의 기분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자신은 활력과 에너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단다. 그녀의 꿈은 이미 이뤄진 듯하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진행된 야외 촬영에 지친 기자와 스태프에게 "혈액형이 뭐예요? 제가 맞춰볼게요"라며 해피 바이러스를 전파한 그녀다. 트로트계에 마리아의 에너지가 넘실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