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운 나이에 떠난 천상 희극인
“다음 생에도 나로 태어나고 싶다.”(2015년 EBS 프로그램 <지식채널e>) 개그맨 박지선이 생전에 했던 말이다.
개그맨 박지선(36세)이 지난 11월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자택에서 모친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현장에 도착했을 당시 두 사람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경찰은 두 사람 모두 외상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날 현장에서 발견된 유서 성격 메모에 박지선이 생전 앓던 질환과 관련된 내용이 언급됐다고 밝혔다. 최초 신고자는 박지선의 부친이다. 두 사람이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경찰에 알렸다. 경찰은 정확한 사인 규명을 위해 시신 부검을 고려했으나, 유족의 의사를 존중해 부검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11월 5일 치러진 박지선의 발인식에는 유족과 동료 개그맨들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지선은 영결식장을 나와 몸담았던 KBS 건물 등을 마지막으로 방문하고 장지인 인천가족공원에 영면했다.
박지선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연예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특히 그의 생일을 하루 앞두고 이 같은 소식이 알려져 안타까움이 더 컸다. 고인이 세상을 떠난 날부터 빈소에는 많은 동료 연예인의 발길이 이어졌다. 송은이, 유재석, 박성광, 김민경, 김원효 등 개그계 동료들을 비롯해 친분을 쌓아왔던 배우 이윤지, 박보영, 박정민 등이 빈소를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웃기는 게 제일 행복해”
늘 환한 미소로 대중 앞에 섰던 박지선. 생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가족과의 코믹한 일화를 누리꾼들과 공유해왔던 그가 어머니와 함께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이 더 커지고 있다. 특히 함께 숨진 어머니와 한 편의 시트콤 같은 일상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박지선의 트위터에는 “아침에 화장실 변기가 터진 줄 알고 놀라서 나가봤더니, 엄마가 거실에서 전기담요로 청국장을 띄우고 있었다. 집에 화장실이 5개는 생긴 기분” “엄마 차를 얻어 타면 재미있다. 엄마는 내비게이션이 300m 앞에서 우회전이라고 하면 3m 앞에서 우회전을 한다. 오늘도 뜻하지 않은 서울 구경을 한다” “오랜만에 부모님 영화 보고 오시라고 <부당거래> 영화표를 끊어드렸다. <부당거래>를 보고 온 엄마가 ‘그 유지태가 연기를 참 잘하더라’ 하신다. 도대체 어떤 영화를 보고 온 걸까” 등 코믹한 일상이 실려 있다.
과거 박지선을 조롱하는 듯한 글에 부친이 직접 답글을 달았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지난 2007년 네이버 지식인에는 “박지선 진짜 여자예요? 다들 여자라는데 저는 남자 같아요! 제발 알려주세요”라는 질문이 올라왔다. 게시물이 올라온 1년 뒤 장문의 답글이 달렸다. 해당 답글에는 박지선의 출생지부터 성장 과정 등 내용이 빼곡하다. 글 말미에는 “박지선은 속이 깊고 겸손하고 남을 많이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서 “내 딸 박지선의 건강과 무궁한 발전이 함께하길 바란다”고 적혔다.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다가 글 말미에 ‘내 딸’이라는 표현으로 부친임을 밝힌 것이다.
박지선은 1984년 인천에서 태어나 고려대에서 교육학과 국어교육학을 전공했다. 성적에 맞춰 교육학과에 갔을 뿐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4학년이 된 그는 수순대로 임용고시 학원에 갔고, 문득 ‘내가 여기에 왜 있지’라는 생각을 한다. 이후 박지선은 자신이 행복을 느꼈던 순간을 되짚어본다. ‘친구들을 모아놓고 웃겼을 때’가 떠올랐다. 박지선은 그 자리에서 개그맨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2007년 KBS 22기 공채 개그맨으로 선발돼 개그계에 진출했다. “참 쉽죠잉~”이라는 대국민 유행어로 명성을 쌓은 박지선은 데뷔한 해 KBS 연예대상 신인상을 시작으로 매해 우수상, 최우수상 등 상을 휩쓸었다. 그는 상을 받은 뒤 수상 소감에서 “피부 트러블로 화장을 전혀 못한다”며 “20대 여성으로서 화장을 못 해서 슬퍼하기보다 개그우먼이 화장을 못 해 더 웃기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지선은 개그 외에도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KBS2 퀴즈 쇼 <1 대 100>에서 1인 우승자 자리에 올라서는가 하면, 뛰어난 노래 실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연기자로서도 활약했다. 그는 MBC 시트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박하선의 동료 영어 선생님 역으로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의 캐릭터를 연기했다. 당시 박지선은 챙이 큰 모자에 양산을 쓴 다소 과한 모습으로 연기를 했는데, 그 안에는 마냥 웃지 못할 사정이 있었다. 그가 앓고 있던 ‘햇빛 알레르기’ 때문이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감독 김병욱 PD는 “박지선이 피부 질환으로 야외 촬영이 어려운 점을 고려해 캐릭터에 반영했다”고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다.
고인을 힘들게 한 ‘햇빛 알레르기’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의 햇빛 알레르기를 앓았던 박지선. 그는 인터뷰에서도 예민한 피부 때문에 야외 활동이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햇빛만 보면 모기에 물린 것처럼 퉁퉁 붓고, 외출이 불가능할 정도로 피부염 증상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모친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유서에도 “딸이 피부병 때문에 힘들어했으며, 최근 다른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피부병이 악화해 더 힘들어했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햇빛 알레르기가 심한 경우 정신적인 질환까지 얻을 수 있다. 햇빛을 완전히 피한 채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어려운 데다 실내에서도 일부 조명 등으로 인해 증상이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01년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의 부인 한나로네 여사도 햇빛 알레르기 고통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바 있다.
햇빛 알레르기는 태양 광선에 노출된 후 피부에 발진 증상이 나타나거나 가려움증이 생기는 질환이다. 피부에 따라 증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햇빛 노출 후 피부에 물집이 생기거나 노출된 부위가 빨갛게 부풀어 오를 수도 있으며, 가려움증이 생기기도 한다.
질환의 주요 원인은 태양 광선이지만, 유전적 요인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일부 항생제와 진통제, 소독약, 자외선차단제에 포함된 화학물질, 기존에 앓고 있던 피부염이 악화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증상이 가라앉지만, 심한 경우에는 스테로이드성 연고를 발라야 한다.
연예계 추모 행렬 ‘멋쟁이 희극인… 잊지 않을 게’
박지선의 사망 소식으로 연예계가 큰 슬픔에 빠진 가운데, SNS에는 그를 추모하는 게시물이 잇따라 올라왔다. 고인과 절친한 사이로 알려진 배우 이윤지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박지선을 향한 메시지를 수차례 올려 그리움을 전했다. 박지선이 사망한 다음 날 맞은 생일에는 고인이 생전 좋아했던 캐릭터 ‘펭수’ 모양의 케이크 사진을 올리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개그 콤비로 알려진 개그맨 박성광도 추모의 글을 남겼다. 박성광은 “일상 곳곳에서 네 생각이 나겠지만, 그때마다 사진처럼 환히 웃는 얼굴로 널 기억할게. 그곳에선 아프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고 외출도 마음껏 하고 좋아하는 강아지도 안고 자고 나중에 만나서 우리 같이 또 개그 하자”며 고인을 추모했다. 이 밖에도 배우 소유진, 방송인 안현모, 개그맨 김영철, 김지민, 신봉선, 박나래 등이 애도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