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함이 당신을 더 성장시킬 겁니다"
명진 스님
문경 봉암사를 비롯해 해인사, 송광사, 용화사, 상원사 선방 등을 돌며 40안거를 마친 수좌 출신 승려. 5·18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1994년 조계종 총무원장 3선 반대 집회를 주도해 종단 개혁의 발판을 마련했다. 대표 저서로는 <힘 좀 빼고 삽시다>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 <스님, 어떤 게 잘 사는 겁니까> 등이 있다.
Q 공포스러운 요즘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주변엔 코로나19로 죽는 사람보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아요.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사람은 연 2,000명 가까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공포는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코로나19로 이토록 두려움에 떠는 이유는 뭘까요?
막연한 공포심.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더욱 심하게 움츠러들게 만드는 거예요. 백신도 없고, 치료제도 없으니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죽을 수 있다는 막연한 공포를 느끼는 거잖아요.
저는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가 과연 이러한 재앙에 대해 불평불만을 할 자격은 있을까? 이번 수해만 해도 그래요. 인간이 자연에게 저지른 만행이 너무나 많잖아요. 자연을 보호하고 훼손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에요. 공포심만 느끼기보다 지금 우리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돌아볼 때라는 거죠.
Q 불안함을 호소하는 현대인이 많습니다.
인간은 태어났을 때부터 의지를 많이 하고 삽니다. 아주 어릴 땐 부모한테 의지하고, 성인이 됐을 땐 배우자 혹은 종교에, 더 나이가 들면 자식에게 의지하고 살지요. 돈이나 명예, 학벌, 직장 등에 의지하고 사는 사람도 있고요.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대상들이 과연 의지할 만한 존재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의지가 되고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아닌 경우가 많잖아요. 권력에 의지한 권력자가 영원한 경우가 있었나요? 최고 권력을 자랑하던 사람들도 한순간에 초라하게 사라지고 말았잖아요. 익숙한 것들에 의지하고 살다 보면 혼자 설 생각을 못합니다. 익숙함을 벗어나면 불안하니까, 자립하고 독립하려는 생각조차 못 하는 거죠.
인간은 어차피 불안한 존재예요. 그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불안함에 어딘가 의지하기보다 혼자 서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Q 무엇이 이토록 불안할까요?
인간에게 가장 큰 불안함은 아마 죽음에 대한 거겠죠. 죽음이 왜 두려울까요? 아무도 죽음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죽어봤고, 죽었다 온 사람도 있고, 죽음에 대한 지도나 경험이 있으면 결코 무섭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보통 여행을 할 때 가이드가 있는 패키지 여행을 가면 편하잖아요. 배낭 하나 메고, 지도 하나 들고 아주 생경한 곳으로 혼자 떠난다면 어때요? 불안하지만 모르는 곳으로 향해 가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두려움과 호기심, 긴장감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 복잡한 과정 속에 분명 깨달음도 얻겠죠.
저는 그러한 감정들이 인간의 내공을 키운다고 생각합니다. 불안함에 긴장하는 두뇌 작용들이 우리를 더 진화하고 성장하게 만들 것이라는 거죠.
Q 어떤 게 잘 사는 걸까요?
'나'는 누구일까요? 부모님이 정해주신 이름 속 내가 아니라, 친구들이 바라보는 내가 아니라, 직장에서의 내가 아니라 진짜 '나'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사실 너무나 많은 거짓 속에 둘러싸여 살고 있어요.
모두 인간들이 정해놓은 약속된 허구일 뿐인데 말이죠. 우주가 어디서 끝나는지, 시간은 어디서 출발해 어디로 가는지, 허공의 끝은 어디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가장 정확한 답은 '모름'이에요. 하지만 우리에게 모른다는 것은 불편하고 어색하고 싫은 일이잖아요. 모든 걸 알기 위해, 답을 찾기 위해 점점 더 거짓된 세상 속으로 파고들어 허구들과 얽히고설키며 살고 있죠.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하나님, 부처님에게 미루고 진실은 외면하면서 말이에요.
앎의 세계를 버리고 모름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 앎이 모두 빠져버린 자리에 모름으로 꽉 채우고 진실한 세상을 마주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된 내 세상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Q 어렵네요.
반대로 너무 쉬워서 그 길로 가지 않는 것일지도요. 천 명의 사람이 있다면 천 개의 세계가 있는 거예요. 자신의 세계관을 왜곡됨 없이 자신의 눈으로 바라볼 줄 안다면 결코 불행하지 않을 겁니다.
쉽게 말해 힘을 좀 빼고 살라는 거예요. 스포츠를 예로 들어볼게요. 구기운동도 마찬가지고 킥복싱처럼 타격이 필요한 운동은 힘이 빠져야 해요. 그래야 결정적인 순간에 힘이 들어가면서 타격을 할 수 있지 잔뜩 힘이 들어간 상태에서는 위협적이지 않을뿐더러 상대방의 위력에도 부드럽게 반응할 수가 없어요.
삶도 똑같아요. 너무나 익숙해져 있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뇌 작용이 부드러워진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위협에도 알맞게 잘 대응할 수 있는 것이라고요.
Q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런 실험도 있었잖아요. 헐값에 내놓아도 팔리지 않는 싸구려 가방에 명품 로고를 붙여놓고 백화점에 전시해두니 비싼 가격에 금세 팔렸다고요.
인간이란 이토록 무지하고 어리석은 존재예요. 착각된 사고가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진실을 볼 수 없게 만들었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허구들 속에서 권력을 가지고, 물욕을 채우는 이들이 지금은 깔깔거리며 행복할지는 모르나 결국은 허전함이 몰려오게 될 겁니다. 그러다 방황을 하게 되면 그 방황 자체가 눈뜨임으로 가는 것인데 그걸 가르쳐주는 사람도 주변엔 없겠지요.
모름으로 간다는 것은 앎에 대한 해방이에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려는 노력을 해보세요. 우리는 어쩌면 실존하지 않는 것들에 얽매여 너무나 불행하고 우울하고 절망스러워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Q 관계에 대한 어려움도 힘들어요.
저 역시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절 미워하면 고통스러워요. 마치 칼에 찔리고 베인 것처럼 마음이 쓰라리고 아프죠. 반대로 부도덕한 사람이나 좋지 못한 사람이 날 미워하면 전 오히려 좋아요.
관계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공자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공자님은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는 질문에 "부도덕하고 저질인 놈도 좋아하고, 좋은 사람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간사한 사람이다. 나쁜 사람들은 미워하고 착한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 그게 진짜 좋은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오히려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요.
Q 종교인으로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가 있나요?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거나 강자가 약자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과연 두고만 보는 것이 옳은 행동인가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어느 신학자가 말했듯이 미친 사람이 버스를 운전하며 사람을 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데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해줄 것인가, 버스에 올라타 미친 사람을 끌어낼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고요.
종교인으로서 정치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듣고 있지만 저는 정치적인 발언을 통해 득 본 것이 하나도 없어요. 적당히 맞추고 적당히 굽신거리고 적당히 참고 살았다면 오히려 더 득을 봤겠지요.
그렇지만 제가 목소리를 높이는 곳에는 늘 약자가 있어요. 사회적으로 약자들이 핍박을 받을 때 자비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인이 그저 입 다물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걸까요?
Q 기성세대에게.
우리는 거의 100년 동안 전쟁처럼 살았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국방권과 외교권을 단 한 번도 자주적으로 행사해본 적이 없는 나라예요. 100년을 그렇게 살았으니 이제 우리 국민들도 자존의 문제에 눈뜰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에게 분단의 영향은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 전 분야에서 나타납니다. 우리에겐 공식적인 적이 하나 있는 거잖아요. 우리 몸도 어디 한 군데가 막히면 순환이 안 되는데 적을 두고 사는 일은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한곳으로 소모되는 일이겠어요.
일본에서는 노벨상 수상자가 20명이 넘게 나왔습니다. 노벨상이 대단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인물이 많다는 거잖아요. 우리는 의식 속에 항상 하면 안 되는 무언가가 있어 완전히 자유롭게 생각하고, 상상하고, 표현할 수 없어요. 생각의 자유는 헌법에도 나오는 인간의 천부적인 자유인데 말이에요. 우리 기성세대들은 젊은이들에게 마음대로 살고 생각하고 공부하고 즐길 수 있는 세상을 넘겨주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해요.
Q 현대인들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말.
늑대가 오랜 시간 길들여져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동물, 개가 됐잖아요. 때 되면 밥도 주고, 산책도 시켜주고, 따뜻하게 재워도 주니까 편안하겠죠. 하지만 개에게는 늑대의 DNA가 있어요. 맹수를 피해 달아도 나고, 사냥도 하고, 마음껏 들판을 활보하며 돌아다니고 싶은 욕망이오.
우리가 과연 개가 될 것인가, 늑대가 될 것인가는 독자들의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길들여지고 익숙해져서 편하긴 하겠지만 그것이 과연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목줄에 감겨 주인만 쳐다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개가 될 것인가, 자유로이 밀림을 떠도는 늑대가 될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한번 생각해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