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았다. 그리고 맑았다. 지난 27년, 롱런의 비결일 것이다. 편안해 보였다. 꽤 긴 공백 기간을 가졌지만 조바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행복해 보였다. 쌓고 또 쌓아 올린 단단한 내공일 것이다. 그 끝에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됐을 것이다. 잘 웃는 엄정화는 참 예뻤다.
1993년 영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로 데뷔한 그녀는 곧바로 1집 앨범 <눈동자>로 가수로 데뷔했다. '배반의 장미' '포이즌' '초대' '몰라' '페스티벌' 등 수많은 히트곡을 쏟아내며 1990년대를 대표하는 '댄싱 퀸'이었다.
스크린 속 엄정화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았다.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해운대> <댄싱 퀸> <미쓰 와이프> 등 수두룩한 흥행작을 만들었다. 지난 2013년엔 <몽타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 무려 11년 만의 정규 앨범인 10집 <더 클라우드 드림 오브 더 나인>을 발표했다. 2010년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뒤 나온 앨범이라 더욱 의미 있다. 말 그대로 댄싱 퀸의 귀환이었다.
그녀는 <미쓰 와이프> 이후 5년 만에 코믹 액션 영화 <오케이 마담>의 '마담'으로 복귀했다. 생애 첫 해외여행에서 난데없이 비행기 납치 사건에 휘말린 부부가 평범했던 과거는 접어두고 숨겨왔던 내공으로 구출 작전을 펼치는 초특급 액션 코미디다. 극 중 엄정화는 테러범에게 공중 납치된 비행기에서 활약하는 전직 특수 요원을 연기한다. 영화 개봉 직전 그녀를 만났다.
<오케이 마담> 시사회를 마치고 "신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했어요. 어떤 의미일까요?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어요. 오랜만에 출연한 영화라 관객들이 잘 보셨을지 무지 궁금하고 떨렸거든요. 코미디 영화를 좋아하지만 점수를 후하게 주진 않는 것 같아서 반응에 신경이 더 쓰였어요. 한데 시사회가 끝나고 많은 분이 호평해주셔서 긴장감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어요.
그럼에도 코미디 장르를 선택한 이유가 뭘까요? 시나리오가 재미있었어요. 코미디에 액션이 믹스된 형태도 새로웠고요. '기분 좋게 보면 되는 영화'라는 무드가 좋았어요. 무엇보다 제가 액션에 대한 로망이 컸어요. 그동안 제게는 액션 장르 섭외가 안 들어왔거든요. 이제 소원 성취했습니다.(웃음)
도전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 전혀요. 물론 애초엔 잠깐 후회하기는 했어요. 엄청 추운 겨울, 액션스쿨에 처음 갔는데 가자마자 몸도 안 풀고 무작정 뛰라는 거예요. 춥기도 하고 숨도 차고…. 괜히 내 욕심에 영화를 망치는 건 아닌가, 후회하는 순간이 잠깐 있었죠. 한데 훈련이 반복되다 보니 그 코스가 편해지더라고요. 물론 나중엔 액션 동작이 몸에 익숙한 듯 안 붙어서 조바심도 걱정도 많이 하긴 했지만요.
액션, 해보니 어때요? 제가 지구력은 좋은데 순발력은 좋은 편이 아니에요. 뛰라고 하면 이 악물고 마라톤도 뛰겠는데, 순발력과는 별개잖아요. 막상 액션을 해야 하는 공간에 딱 들어서니까 어깨부터 부담감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스스로 액션을 겁내지 말자고 매일 다짐하는 날들이었어요. 그래도 전 액션이 참 좋아요!
5년 만에 영화에 컴백했어요. 5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냈나요? 데뷔 후 1년에 한두 작품씩 해오며 살았기에 작품을 기다리는 시간이 힘들긴 하더라고요. 흔한 말로,'이런 시기가 온 건가' '이런 나이가 온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스스로는 데뷔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진 게 없는데, 어쨌든 시간은 흐른 거잖아요. 그러다가 문득 이 시간을 내 시간으로 채우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랬더니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더라고요. 그러면서 서핑과 요가를 시작했는데, 제게 큰 위안이 됐어요. 스스로에게 집중하면서 내 마음 상태가 어떤지 살피게 됐죠.
호흡을 맞추는 박성웅 씨와는 어땠어요? 처음엔 성격을 모르니까 화면에 비친 모습을 보고 조금 어려워했던 건 사실이었어요.(웃음) 한데 실제로 만나니 지루할 틈이 없었어요. 수다가 끊이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아이처럼 사랑스러운 모습까지 있답니다. 이번에 함께 출연한 배정남 씨와는 동네 마실 나가면 만나는 사이인데, 함께 연기하게 될 줄 몰랐어요. 늘 봐오던 편한 동생을 촬영장에서 마주치니까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이상윤 씨는 화면으로 보면 늘 점잖고 스마트하잖아요. 그래서 실제로도 그럴지 궁금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선배를 잘 챙기기는 후배이고, 항상 배우는 자세가 인상적인 배우였어요. 연기에 대한 갈증이 많더라고요. 심지어 저희 단체 카톡에서 엉뚱한 말을 하는 사람이 이상윤 씨예요. 아재 개그를 좋아해요.(웃음) 좋은 사람들 덕분에 여러모로 힘을 받으며 촬영할 수 있었어요.
그러고 보면 그동안 상대 배우 복도 많았어요. <댄싱 퀸> 황정민, <미쓰 와이프> 송승헌과 호흡을 맞췄어요. 황정민 씨는 털털하고 수더분하고 '츤데레' 같아요. 송승헌 씨는 젠틀하고 따뜻해요.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죠.
현장 분위기가 무척 좋아서 회식도 잦았다고 들었어요. 부산에서 두 달간 촬영하며 자연스럽게 회식을 많이 하게 됐지요. 밥 먹다가 영화 얘기를 시작하면 괜히 맥주나 소주를 한잔하는 식이죠. 영화를 보면 제가 부어 있는 모습이 간혹 있을 거예요. 그게 회식의 여파랍니다.(웃음) 어쨌든 현장의 즐거웠던 에너지가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저는 참 좋았어요.
엄정화라는 연예인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엔터테이너예요. 가수와 배우, 지금의 엄정화에게는 어떤 느낌인가요? 어떤 게 천직일까요? 분명한 건 여전히 두 가지 모두 저를 설레게 한다는 거예요. 지난 10집 앨범이 나오기까지 10여 년이 걸렸어요. 목을 회복하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그 앨범은 그런 의미에서 제게 꼭 필요한 앨범이었어요. 저는 '가수 엄정화'를 많이 아껴요. 힘들게 해왔고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그래서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에도 책임감 있고 멋지게 내려올 거예요.
(정)재형이는 제게 특별한 사람이에요. 대화를 가장 많이 하는 친구이고, 거르지 않고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해주는 친구죠.
그 앨범에 실린 'She' 라는 노래의 가사를 직접 쓰기도 했어요. 계속 앞으로 가고 싶은데, 대중에게 계속 기억되고 싶은데, 그 안에 있고 싶은데 상황이 그렇지 않잖아요. 세월의 영향이 가장 크겠죠. 자연스레 뒤로 물러나야 하니까요. 목 수술을 하면서 10년 가까이 슬픈 시기를 보냈어요. 마음도 다쳤고요.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없다고 했을 때 정말 그런지 시험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때를 돌아보는 사람이 된 마음을 녹여낸 가사예요. 힘들게 녹음했지만 잘해낸 제 스스로가 자랑스럽기도 해요.
엄정화는 'She'를 통해 그동안 쉽사리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고된 하루가 저물어갈 즘에 / 저 석양 따라 번지는 이 외로 외로움 / 언제나 조금씩 버거웠지만 / 행복했던 순간들도 참 많았으니까 / 나였지만 내 것은 아닌 것 같아 / (중략) 나 언제나 그 속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다 / 시간만큼 내 맘은 빠르질 못해 / 아직 난 이만치 뒤에 있는데 / 안녕하지 못한 내 안의 작은 슬픔이 / 보여선 안 될 비밀이 되는 게 힘들어 /(중략)/ 소리 내 울지 말자 / 쉿 아무도 모르게 쉿
많은 후배가 롤 모델로 엄정화를 꼽아요. 제가 제일 오래된 선배잖아요. (웃음) 맏언니죠. 예전 영상을 보면 너무 어리고 예쁘던데, 그때는 몰랐어요. 나이 때문에 내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힘들기도 했고요. 저 때만 해도 가수와 연기를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제가 겪은 어려움과 한계를 후배들은 안 겪었으면, 나이 때문에 못 하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후배들에게 힘을 받고 있으니까 후배들에게도 제가 힘이 됐으면 좋겠어요. 나이 들면 드는 대로 그런 모습을 녹여가며 연기와 음악 모두 오래 하고 싶어요.
정작 본인의 롤 모델은 누구일까요? 윤여정 선배님, 김희애 선배님 등등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는 제 또래 여배우들과 선배들 모두 존경해요. 서로를 바라보며 힘이 되고 꿈이 되는 것 같아요.
요즘 '환불원정대'가 화제예요(환불원정대는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이효리가 제시한 걸 그룹이다. 이효리를 포함해 엄정화, 제시, '마마무' 화사와 걸 그룹을 결성하겠다고 한 농담에서 시작했다. 가요계 센 언니들로 이들과 함께라면 어느 매장에서도 쉽게 환불이 될 것 같다는 의미로 지은 그룹명이다). 처음엔 '환불원정대'가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어요. 요즘 친구들은 정말 작명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요.(웃음) 어쨌든 기분이 좋았어요. 사석에서는 모르겠지만, 무대 위에서는 항상 강해 보이길 원했거든요. 무대에서는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최근에 다 같이 첫 회동을 했는데 반가웠고, 재밌었어요. 함께할 수 있는 음악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혹시 '싹스리'의 음악을 들어봤어요? '다시 여기 바닷가'를 들어봤는데 괜스레 울컥하던걸요. 그 바닷가에 제가 앉아 있는 느낌이었어요.
데뷔 후 지난 27년간 호불호 없이 사랑받는 스타예요. 정말 감사하죠. 덕분에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일할 수 있었고, 이렇게 반겨주시기까지 하니 너무나 감동이죠. 사실 제가 특출난 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천운이라고 생각해요.
주변에 좋은 사람, 오래된 친구가 참 많아요. 살다 보면 힘든 순간들이 있잖아요. 희로애락이 있기에 기쁨도 더 크죠. 특히 연예인이라는 직업은 괴롭고 힘든 순간을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잖아요. 그럴 때 친구들이 제게 큰 힘이 돼요. 모든 친구를 좋아하지만 특히 (정)재형(가수)이라는 친구는 제게 특별해요. 대화를 가장 많이 하는 친구이고, 제게 거르지 않고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해주는 친구이기도 하고요. 제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옳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모든 것을 재형이와 상의하는 편이네요. 그래서 그 친구에게 어떤 리뷰를 들었을 땐 힘이 나고 확신이 들어요.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가 어디예요? 하와이와 발리요. 서핑 때문에 주로 갔었죠. 특히 발리의 바투볼롱이라는 해변을 좋아해요.
몸매 관리 비법도 궁금해요. 20대 때는 운동의 필요성을 못 느끼다가 30대 초반부터 운동을 시작했어요. 한데 운동이 너무 싫은 거예요. 그럴 때마다 '난 운동을 즐기고 있어' '운동하는 내 모습은 너무 멋있어' 하고 마인드컨트롤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운동이 일상이 됐죠. 몸은 거짓말을 안 하잖아요. 최근엔 요가를 꾸준히 하고 있는데, 요가를 하다 보면 힘들어서 무념무상이 돼요. 딱 끝나고 나면 물리치료를 받은 것 같은 가벼운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많은 이들이 새 앨범을 기대하고 있어요. 작년부터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계속 겹치면서 못 했어요. 지금은 마음속으로 함께 작업하고픈 프로듀서 몇 분만 추려놓은 상태예요. 차근차근 준비해나가려고요.
영원히 우리 곁에서 '엔터테이너'로 남을 거죠? (웃음) 즐겁게 해나가고 싶은데, 여러 가지 환경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다를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제가 좋아하는 걸 놓치지 않고 계속해나가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 시절의 모습을 녹일 수 있는 노래와 연기를 하는 사람이고 싶어요. 두 가지 일에 대한 고민을 끝없이 안고 살겠지만 그것 역시 기대가 됩니다. 쭉 지켜봐주세요!
화려한 언변은 아니지만 그 눈빛, 손짓, 말투에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는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라이프스타일 #서핑 #요가 #슈퍼
반려견 슈퍼, 요가와 서핑, 여행과 꽃 그리고 친구들을 사랑하는 그녀의 일상은 소소하지만 싱그럽다. 따뜻하고 단단하다. 가수 정재형은 그녀의 오랜 친구다.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이이자 여행 메이트이기도 하다. 서로의 일상에 깊게 개입돼 있는 이들의 우정은 엄정화의 SNS 곳곳에 녹아 있다.
그녀의 라이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인공이 바로 반려견 슈퍼다. 슈퍼와 함께 하는 동네 산책은 그녀의 중요한 하루 일과다.
"난 네가 너무 좋아."
"너는 참 어쩌면 이때에 내게 와주었니. 너로 인해 매일이 든든해, 즐거워. 내가 잘 지켜줄게 슈퍼야."
엄정화는 SNS를 통해서도 슈퍼에 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고백한다. 본지와의 인터뷰 자리에도 '슈퍼'가 함께했다.
"요즘 제가 일정이 많아 자주 집을 비우거든요. 오늘은 편한 자리니까 슈퍼를 데리고 왔어요(웃음). 우리 슈퍼가 10개월이 된 아기인데 말을 엄청 잘 들어요. 점점 어른이 돼가고 있어요."
바다를 닮은 그녀는 하와이와 발리를 좋아한다.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서핑 여행은 그녀의 힐링법이다. 엄정화의 일상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