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원조’ 손정우 미스터리
텔레그램에서 자행된 일명 ‘n번방 사건’이 알려지기 1년 전, 비슷해 보이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한 사건이 있었다. 다크웹(Dark Web)에서
‘웰컴투비디오(W2V)’라는 사이트를 개설해 아동 성착취 영상을 제공, 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24세 한국인, ‘손정우 사건’이다.
그는 해당 사이트를 운영하며
3년간 44억원가량의 불법 수익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영국 등 국제
공조수사 끝에 검거된 310명의 회원 중 한국인만 223명에 달했다.
개설자이자 최고 운영자 손 씨는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3년,
2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형기는 4월 27일에 이미 다 마쳤으나
아동 음란물 배포, 자금 세탁 등 9개 혐의로 기소된 미국에서 손 씨의 송환을
요청하며 사건은 새 국면을 맞게 됐다.
결론적으로 지난 7월 6일
서울고법 형사20부(강영수·정문경·이재찬 부장판사)는 검찰이 청구한 손 씨에 대한
범죄인 인도를 허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웰컴투비디오’와 관련한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 관련 수사가 아직도 국내에서 진행 중인 만큼 손 씨가 미국으로 송환되면
수사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민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정을
내린 사법부의 판단에 많은 이들이 들끓는 공분을 표출했다.
‘웰컴투비디오’가 뭐길래?
손 씨의 미국 송환 불허 논란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손 씨가 개설한
‘웰컴투비디오’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웰컴투비디오’는 특수한 브라우저를
통해서만 접속이 가능한 다크웹의 한 사이트로, 다크웹은 익명이 보장되고 IP
추적이 불가능한 폐쇄형 웹사이트다.
보안이 철저해 과거 군사 기밀을
공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작 의도와는 다르게 무기 거래, 살인 청부, 해킹, 마약
거래 등 범죄에 악용되는 경우가 빈번해 ‘전 세계 범죄의 온상’으로도 불린다.
2016년 송희경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다크웹 불법
사이트는 1,547개에 이르며 그중 마약 거래 사이트가 423개, 불법 금융 사이트가
327개, 불법 포르노 사이트 122개, 해킹 사이트는 96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손 씨는 이러한 보안성을 토대로 ‘웰컴투비디오’라는 유·아동 성착취
영상 공유 사이트를 개설했다. 15세 미만 성 착취물만 취급한다는 규칙을 내건 손
씨는 2015년 7월부터 2018년 3월까지 약 2년 8개월 동안 4,000여 명에게 22만 건의
유·아동 성 착취물을 제공하고 비트코인 등으로 약 44억원을 챙겼다.
‘웰컴투비디오’가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로 성장한 데에는
단순히 영상을 판매, 배포한 것뿐만 아니라 회원들이 서로 영상을 교환하고 사고팔
수 있도록 공유의 장을 마련한 것이 결정적이다.
이 사이트에선 2년
8개월 동안 128만 명의 회원이 가입했고, 아동 음란물 수십만 건의 다운로드가
일어났다. 피해 아동 중에는 10대 청소년, 2~4세로 보이는 미취학 아동뿐만 아니라
생후 6개월 된 영아까지 등장해 충격을 더했다.
영상물을 교환하거나
내려받기 위해 ‘새로운’ 영상을 업로드해야 했던 회원들은 이 과정에서 아동들을
무자비하게 감금, 납치, 성폭행했고 미국, 스페인, 영국 등에서 구조된 아동은
20명이 훌쩍 넘었다. 손 씨가 직접 촬영에 가담하거나 지시하지 않았더라도 이러한
영상 제작과 업로드 구조를 설계한 당사자이기에 엄중한 처벌은 피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미국은 ‘웰컴투비디오’ 사용자 34명의 이름과 나이를
공개하고 영상을 내려받은 일부 회원에게 징역 5~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미연방법상 아동 성 착취물을 배포하는 행위는 전과 여부와 상관없이 최소 의무
형량이 5년부터 시작된다.
국내에서는 미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솜방망이 처벌이 이뤄져 공분을 샀다. 한국인 회원 223명 중 실제 경찰에
검거돼 법원 선고까지 받은 사람은 고작 40여 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실이 입수한 1심 판결문 42건을 보면, 징역형이 내려진
경우는 단 1건도 없었다. 벌금형이 가장 많았고 집행유예가 7건, 선고유예가
1건이었다. 실형을 받은 이는 운영자이자 개설자인 손 씨가 유일하다.
아동 기관 취업제한 명령을 받은 사람도 손 씨를 포함해 10명에
불과했다. 아동 기관 취업제한 제도는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로 형을
선고받은 이가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에 취업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제도인데
사법부는 대다수의 가해자들에게 “취업제한 명령을 발령해서는 아니 될 특별한
사정이 있다”는 모호한 이유를 들어 취업제한 명령에 대한 면죄부를 줬다.
미국 소환 불허, 왜?
미국 법무부는 범죄인 인도 조약에 따라 ‘자금세탁방지법’을 토대로 한국에 손 씨의
강제 송환을 요구했다. 2018년 8월 아동 음란물 배포 등 9개 혐의로 미국에서 손
씨를 기소했지만 이중 처벌 금지 원칙에 따라 이미 한국에서 처벌받은 혐의를
제외하고 돈세탁 혐의에 대해서만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한 것이다. 미국
자금세탁방지법에 따르면 자금 세탁 규모가 50만 달러 이상일 경우 최대 징역 20년,
50만 달러 미만이면 최대 징역 10년을 선고받을 수 있다.
국내에서
받은 처벌과 비교하면 수십 배에 달하는 미국의 엄격한 처벌 기준에 드디어 손 씨가
죗값을 달게 받을 수 있을지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오랜 심사숙고 끝에 지난
7월 6일, 재판부는 손 씨의 범죄인 인도심사 3차 심문기일을 통해 “아동·청소년 성
착취 범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립되길 희망하며 손 씨를 미국으로 인도하지
아니한다”고 밝혔다.
이어 “손 씨에 대해 국민의 법 감정에 부합할
정도로 실효적인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점, 국내 법정형이 현저히 가볍고,
아동·청소년 성 착취 범죄에 대한 문제의식이 미약한 사법 운영을 해왔다는 비판이
있었다”면서도 “손 씨를 법정형이 더 높은 미국으로 보내 정의를 실현하게 하고
범죄를 예방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공감하지만 주권 국가로서 주도적으로 형사
처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법원이 미국 송환 불허 결정을
내리면서, 손 씨는 즉각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됐다. 이러한 재판부의
판단에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SNS를 중심으로 ‘#사법부도_공범’이라는
내용의 해시태그 운동이 전개됐고, 손 씨의 범죄인 인도심사 청구 사건을 맡은
강영수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의 대법관 후보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국민청원에
하루 만에 30만 명이 동참했다.
법무부 양성평등정책 특별자문관
서지현 검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법원) 결정문을 두 눈 부릅뜨고 보시라,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 한 글자도 안 맞는다. 우리나라에서 터무니없는 판결을
받은 자를 미국으로라도 보내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해달라고 국민이 그토록
염원하는 것에, 최소한 부끄러움이라도 느꼈어야 한다”고 분노했다.
이어 ‘#처음부터끝까지틀렸어한글자도안맞아, #권위적인개소리,
#수사기관입법기관운운말고 너만잘하면됨, #법원도공범이다,
#끔찍한대한민국’이라는 해시태그를 덧붙여 재판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전 세계 수사기관이 힘을 합쳐 추적한 사건인 만큼 한국 사법부의
결정에 외신들도 크게 실망한 모양새다. 영국 BBC 방송의 로라 비커 서울 특파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한국 검사들은 배가 고파서 달걀 18개를 훔친 남성에게 18개월
형을 요구한다. 이것은 세계 최대 아동 포르노 사이트를 운영한 손정우와 똑같은
형량”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이번 손정우 사건을 통해 드러난 국내
사법부의 양형 기준과 처벌 한계에 법조계의 제대로 된 방안과 대안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여전히 양형 기준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디지털 성범죄에 네티즌들은
“n번방 사건 이후에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만큼이나 탄력적이고 유연한 제도 개선이 필요한 때다.
내 아들을 고소합니다
손 씨의 미국 송환 불허 뒤엔 그를 감싸는 아버지가 있었다.
1 아들을 고소한 아버지
손 씨의 아버지는 지난 5월 미국 송환을 막기 위해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으로
자신의 아들을 고소했다. 결론적으로 손 씨 아버지의 고소는 ‘미국 송환 불허’라는
엄청난 결과를 안겨줬다. 재판부는 “손씨의 신병을 미국으로 넘기는 것보다
우리나라에 두고 수사를 하는 것이 시급하고 중대하다”고 밝혔다. 손 씨의 직접적인
수사가 필요한 건은 아버지가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으로 고소한 건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고소가 ‘신의 한 수’가 아니었냐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
2 “흉악 범죄는 아니잖아요”
앞서 손 씨의 아버지는 탄원서를 통해 아들의 미국 송환을 반대하며 “식생활이
다르고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성범죄인을 마구 다루는 미국 교도소로 송환된다면
본인이나 가족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아들은) 원래부터 흉악한 애가 아니기
때문에 교도소 생활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라고 언급해 논란을 빚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로 방영된 인터뷰에서도 “(아들이) 살인, 강간 등 흉악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느냐”며 옹호해 많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3 “부양할 가족이 생겼습니다”
손 씨는 2심 선고 2주 전 혼인신고서를 접수시키며 양형을 감형받았다. 재판부는 손 씨가 결혼을 하고 부양가족이 생겼다는 사유를 참작해 징역 18개월을 선고했다. 일각에서는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갑작스럽게 혼인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선처를 받을 목적으로 ‘매혼(買婚)’을 주도한 손 씨 아버지의 큰 그림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다. 법조계 전문가들 역시 “재판부가 손 씨를 불러 결혼의 진위를 정확하게 파악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