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은이는 지난해 7월, 남편 김동현과의 30년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협의이혼했다. 김동현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부부는 오랫동안 빚더미를 떠안고 있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친 상태였다. 이혼 후의 삶도 녹록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부지런히 움직였다. 다시 방송국으로 출근했고 콘서트를 준비하며 차근차근 '가수 혜은이'의 자리를 찾아갔다. 그사이, 잊고 있었던 새로운 에너지들이 충전됐다. 한때 물밀듯이 밀려들던 공허함과 허무함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오늘의 혜은이가 웃을 수 있는 이유다.
황혼 이혼의 속사정
소식이 알려진 후에 연락 많이 받으시죠?
근간에는 활동이 많지 않아 이혼 소식이 알려진 뒤에도 조용히 지나갈 줄 알았거든요. 이렇게 많은 분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가수가 아닌 여자 혜은이는 늘 구설에 시달렸으니까요. 이혼 소식이 알려지는 게 부담이 되고 두렵기도 했는데, 오히려 많은 분이 자기 일인 양 격려하고 공감해주셔서 위로가 됐어요.
이혼 후 1년이 지났어요.
처음에는 헛헛하고 공허한 마음이 컸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니 점점 덤덤해지더라고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요. 지금은 굉장히 자유로움을 느껴요. 요즘에 제 표정이나 행동이 밝아졌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오늘도 들었고요. 반포로 거처를 옮겨 아들과 살고 있어 심심할 겨를도 없어요.
이혼 얘기가 처음 나왔던 때를 기억하나요?
김동현 씨가 먼저 말을 꺼냈어요. 그동안 힘든 일이 있어도 이혼하지 않으려고 서로 애쓰고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김동현 씨가 보기에 제가 너무 딱했나 봐요. 어느 날 뜬금없이 "진심으로 미안하다. 수고했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데 기분이 참 묘했어요. 그동안 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던 사람인데 그땐 그 말이 왜 달리 들렸는지 모르겠어요. 평소였다면 저도 "매번 말로만 미안해? 미안하면 나한테 잘해!" 했을 텐데 아무 말도 못 하겠더라고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걸 알았으니까요. 그 순간 만감이 교차했어요.
살면서 순탄하기만 한 부부가 어디 있겠냐만, 혜은이의 지난 30년은 유독 고됐다. 그녀에게 결혼 생활은 비빌 언덕인 동시에 언제나 넘어야 할 산이었다.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싱어퀸'으로 사랑받았지만 1990년 김동현과 결혼한 이후 꾸준히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려왔다. 김동현의 영화 제작 실패와 보증 문제로 혜은이가 거액의 빚더미를 떠안은 적도 있었다. 가세가 기울자 빚을 탕감하기 위해 방송을 포기하고 밤무대에 섰다. 혜은이는 "그땐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했다"고 착잡하게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 갖은 노력에도 위기는 계속 찾아왔다. 김동현은 부동산 투자 등의 문제로 인해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다섯 차례 사기 혐의로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원치 않았으나 불미스러운 일이 계속됐고 더 이상 솟아날 구멍도, 솟아나고자 할 기운도 없었다. 혜은이와 김동현은 모두 지친 상태였다.
결국 빚 때문에 이혼 얘기가 나온 건가요?
그동안 김동현 씨는 저에게 알리지 않고 사업에 성공해 저를 호강시켜주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시간은 자꾸 흐르고 생각만큼 일이 잘 안 풀리니까 본인은 얼마나 속상하고 초조했겠어요. 김동현 씨가 저에게 "다 내려놓고 이제는 편안하게 살아봐"라고 말하는데 문득, 나랑 이혼하면 이 사람도 더 이상 불안 속에 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혼이라는 선택이 나뿐만 아니라 이 사람에게도 자유를 주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그래서 이혼했어요. 덤덤한 마음으로 법원에서 도장 찍고 돌아서는데 아무 말도 못 하겠더라고요. 그때 김동현 씨가 "미안하고 고맙다"고 그러더라고요. 눈물이 쏟아졌죠. 지금도 서로에겐 미안한 마음이 커요.
어른스럽고 성숙한 이별을 하셨네요.
부부가 살다 보면 안 좋게 헤어질 때도 있지만 이왕이면 좋은 이별로 마무리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그동안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구태여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지도 않아요. '일부종사 못 하면 안 된다'는 옛말을 생각하면 이혼을 선택한 게 안타깝기도 하지만, 모든 일엔 다 때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저희의 이혼이 좀 더 빨리 이뤄졌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어요.
김동현 씨와 연락은 하고 지내나요?
원수가 돼 헤어진 건 아니잖아요. 방송국에서 김동현 씨 찾는 전화가 저한테 걸려오면 제가 얘기를 전달해줘요. 김동현 씨의 오랜 친구들이 저에게 "얘 왜 연락이 안 돼요?" 하면 전화번호를 알려주기도 하고요. 제가 지방 공연을 많이 다니다 보니까 집을 비웠을 때 아들을 만나러 오기도 하더라고요. 가끔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서 갖다주거나, 강아지 사료도 사다 줘요. 근데 희한한 게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도 요즘은 대면해서 만나는 게 좀 쑥스럽더라고요.(웃음) 이게 무슨 마음일까요?
아쉬움이 남아서일까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우습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김동현 씨에게 아내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 했어요. 가장 아쉽고 미안한 점이 그거예요. 흔히 내조라고 하잖아요. 물론 저도 일을 하다 보니까 그랬지만, 밥을 차려준 적도 없고 하다못해 셔츠 다림질도 한 번 안 해줬던 것 같아요. 30년 동안 김동현 씨가 오히려 절 많이 챙겨줬어요. 저 대신 정리 정돈도 해주고 물건 못 찾아서 허둥지둥하면 금세 찾아서 손에 쥐어주고. 속으로 '우리 성별이 바뀐 거 아냐?' 싶었죠.(웃음)
김동현 씨는 어떤 남편이었어요?
굉장히 가정적이고 섬세한 사람이에요. 일이 없으면 밖에 나가질 않아요. 다만 주변에 좋지 않은 사람들과 엮이는 일이 많았어요. 김동현 씨 약점 중 하나가 귀가 얇은 거예요. 본인도 그걸 알면서 주변 정리를 제대로 못 하니까 곁에서 보기 참 안타까웠죠. 근데 따지고 보면 제 탓도 컸어요. 저도, 남편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알아서 잘하겠지' 싶었거든요. '악처'가 돼야 집안에 중심이 잡힐 텐데 제가 이래라저래라 참견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땐 남편을 자유롭게 두는 게 미덕인 줄로만 착각했어요. 신혼 때 제가 기선 제압을 잘했더라면 서로 아픈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 같아요. 지금은 떨어져 있으니 그저 기도해요. 김동현 씨가 주변 사람들 말에 솔깃해하지 말고 휘말리지 않고, 아프지 않기를요.
결혼, 도대체 뭘까요?
한마디로 정리해도 되나요?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자녀들도 엄마의 새 출발을 응원해주죠?
저는 그동안 참 우여곡절이 많았잖아요. 그럴 때마다 아이들이 '우리 엄마 참 열심히 사신 분이다'라고 인정해주는 게 큰 힘이 됐어요. 이혼하고 나서 우리 딸이 저한테 카톡을 보냈거든요. "엄마, 누구의 아내도 아닌 누구의 엄마도 아닌 가수 혜은이로 행복하게 살아"라고요. 그걸 보는데 왈칵 눈물이 났어요. 남들 시선이야 어쨌든 간에, 이혼이라는 게 자식에게 참 부끄러운 일이잖아요. 그런데도 "엄마, 아빠 편하신 대로 결정하세요"라고 이해해주는 게 너무 고맙죠.
어느 날 뜬금없이 "진심으로 미안하다. 수고했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동안 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던 사람인데 그땐 그 말이 왜 달리 들렸는지 모르겠어요. 만감이 교차했어요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지난 인생을 돌이켜보면 어때요?
정신없었어요. 뭘 정리하고 돌아볼 겨를도 없었죠. 데뷔하고서 늘 스캔들 때문에 뭇매를 맞았잖아요(혜은이는 히트곡 '당신은 모르실 거야'의 작곡가이자 스승 고 길옥윤과 스캔들에 휘말려 곤욕을 치른 바 있다). 그때도 '내가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까지 가수를 해야 하나?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그저 노래가 좋아 노래할 뿐인데' 하며 후회를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가 신앙을 갖고 아이를 낳으면서 생각을 바꿨어요. '스캔들에 휘말리는 건 인기가 있기 때문이고 결혼 생활이 힘든 건 남편을 내조하지 못한 내 잘못이다'라고요.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전 미쳤을 거예요.
외유내강 스타일이시네요.
어찌 보면 독한 사람이라는 거죠?(웃음) 요새는 사람들이 스캔들이나 루머를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제가 활동할 당시만 해도 스캔들이 하나 터지면 중죄를 지은 것처럼 질타를 받았어요. 그런 일에 휘말려 연예인 못 하겠다고 떠난 사람도 많았죠. 이렇게 오랜 시간 소문을 전부 견뎌낸 건 아마 제가 유일하지 않을까요? 데뷔 후 저에게 많은 수식어가 따라붙었는데 그중 하나가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사람'이었어요. 근데 저는 누구한테 보호받을 스타일은 아니었던 거죠. 독한 사람이니까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삶을 천천히 돌아보는 건 나중 문제네요.
그렇죠. 앞으로의 몫이에요. 정리해야 할 것이 많아요. 생각해보면 저는 언제나 새 출발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지금도 벌써 65살인데, 빈손 탁탁 털고 또다시 시작하는 거잖아요.
지금의 혜은이를 설레게 하는 건 뭘까요?
내 삶에 대한 기대요. 지금까지 달려왔던 세월보다 앞으로 나아갈 세월이 더 짧을 텐데, 그 시간을 잘 보내고 싶어요. 요즘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거든요. '빠삐용'은 섬에서 이가 다 빠진 노인이 돼서도 야자 열매를 담은 포대를 안고 바다로 탈출하잖아요. 그게 딱 지금의 제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뭐가 기다리는지, 어떤 삶이 나를 덮쳐올지 모르지만 막연한 자유와 기대를 느끼고 있어요. 물론 좋은 일이 가득했으면 좋겠어요. 요즘의 저를 가장 설레게 하는 힘이에요.
데뷔 45주년인데 실감하세요?
전혀요! 그만큼 오랜 시간 사랑받았다는 말이겠지만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마음만은 데뷔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거든요. 보세요. 저는 나이 먹었어도 늘 이런 차림이에요(혜은이는 보라색 후드 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누가 65세에 이러고 다니겠어요. 제가 제 나이를 실감하지 못하니까 그런 거죠. 그렇다고 딱히 실감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인간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자기가 보고 싶은 것과 믿고 싶은 것만 본다고. 그게 딱 저예요.
요즘 관심사가 뭐예요?
딱히 취미가 없어요. 평생 일만 했기 때문에 요즘에도 일해요.(웃음) 무엇보다 콘서트 준비로 한창 바빠요. 5월 29일부터 대학로 소극장에서 진행하는데, 사실 소극장 공연은 수입이 안 돼요. 그저 저를 사랑해주신 분들에게 보답하는 마음 하나로 준비하고 있어요. 시간이 안 되는 분들도 언제든 와서 볼 수 있게 한 달 동안 넉넉히 공연할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공연을 많이 만들어가려고 해요. 이번에 특히 기대가 되는 게, 코로나19 예방 차원에서 제가 직접 행동수칙 동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릴 거예요. 이런 경험도 처음이고 단체로 마스크를 쓴 관객 앞에서 공연하는 것도 처음이라 기대가 돼요. 요즘 경기도 힘든데 코로나19를 뚫고 티켓을 구매해주신 분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고마워요.
이제 방송에서도 자주 볼 수 있겠죠?
그동안 방송 출연을 거의 안 했어요. 좀 움직여보려고 해요. 얼마 전에 신곡도 발표했으니 열심히 활동해야죠. 혜은이는 65세가 돼서야 자유로워졌어요. 이제라도 다시, 가수 혜은이로 살아가고 싶어요. 많이 지켜봐주세요.
혜은이에게 좋은 인연이 생기면 다시 마음의 문을 열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시 사랑을 하는 대신 "아름답게 늙고 아름답게 노래하며 아름답게 은퇴하고 싶다"고 했다. 앞으로 시작될 혜은이의 이야기들은 딱 혜은이답게, 아름답게 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