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로 대동단결한 여심
그동안은 미처 몰랐다. 트로트가 이토록 신이 나고, 이토록 파워풀하고, 이토록 애절한 장르라는 걸 말이다. ‘끼쟁이’ 트로트 가수의 무대 매너를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났는지 궁금해진다. 어깨가 들썩거리다가도 코끝이 찡해지는 이들의 고퀄리티 무대는 코로나19로 웃을 일 없는 우리를 쥐었다 폈다 난리도 아니다.
지난달 본지의 설문 조사를 보면 3040세대 여성들의 트로트에 대한 인식 변화도 알 수 있다. ‘트로트는 심금을 울리는 우리 가요의 대표 장르다’(30%), ‘열풍에 휩쓸려 들어봤는데 의외로 좋다’(19%), ‘스트레스 풀리는 신나는 노래다’(24%)라는 반응이 상위를 차지했다. 가장 좋아하는 트로트로는 장윤정의 ‘어머나’, 김연자의 ‘아모르파티’ 순으로 나타났고, 국민 트로트로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심수봉), ‘남행열차’(김수희) ‘아모르파티’(김연자), ‘어머나’(장윤정)를 꼽았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는 ‘2020 트로트’는 더 이상 할아버지, 할머니가 부르던 뽕짝이 아니다. 어떤 곡보다 세련된 ‘요즘 장르’다.
당연히 트로트 예능도 줄줄이 쏟아진다. 그 서막을 연 것은 TV조선 <미스트롯>(2019)이다. 이른바 비주류 장르인 트로트에 맞춘 최초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당시 종편 사상 유례없는 시청률 18.1%를 기록하며 광풍을 일으켰다.
미스코리아 대회 콘셉트를 차용해 평범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틀을 깼으며, 실력파 무명 가수들의 무대는 그동안 아이돌 가수의 무대가 멋짐의 끝인 줄 알았던 젊은 세대에게 배신감마저 느끼게 할 만큼 훌륭했다. ‘대형 소속사의 작품’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끼와 자신의 실력, 내공으로 만들어진 무대라 짜릿함과 감동을 동시에 선사했다. <전국노래자랑>과 <가요무대>만으로는 허전했던 중·장년층의 흥까지 돋워 온 세대가 트로트의 맛에 푹 빠지는 ‘세대 대통합’을 이룬 것이다.
신예 스타도 배출했다. 국악인 출신의 실력자 송가인은 연예인의 연예인이자 방송가 흥행 보증수표가 됐고, 송가인의 대항마로 주목받는 홍자도 청순한 외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매너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트로트 열풍의 화룡점정은 TV조선 <미스터트롯>(2020)이다. 날로 뜨거워지는 트로트 열풍에 화력을 더하고 차세대 트로트 스타를 찾는 <미스터트롯>은 <미스트롯>과 포맷은 같지만 참가자를 남성으로 국한했으며,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회만 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잘 만든 고퀄리티 예능이다. 종편 역대 최고 시청률(35.7%), 전체 예능 프로그램 중 역대 2위를 기록하는 이변을 일으키며 종편 예능의 역사를 다시 썼다. 걸출한 스타도 배출했다. ‘트로트계의 BTS’라 불리는 장민호는 올해로 데뷔 22년 차인 베테랑 가수로 아이돌, 발라더를 거쳐 현재 트로트계의 황태자로 인생 3막을 열었다. 최종 승자 임영웅은 훈훈한 외모, 애절한 보이스와 뛰어난 가사 전달력으로 나이를 초월해 ‘여심’을 대동단결시킨 국민 가수가 됐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누나가 딱이야’ 등 센스 있는 가사와 재미있는 멜로디로 이름을 알린 현역 가수 영탁과 13살 트로트 천재 정동원도 섭외 0순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성 가수들도 대세에 합류했다. 현재 방영 중인 SBS <트롯신이 떴다>(2020)는 한국 트로트계 전설들의 K-트로트 세계 정복기를 그린다. 김연자, 설운도, 주현미, 진성, 장윤정 등 ‘트롯신’ 5명에 남진이 합세한 최강 라인업으로 연일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다.
이렇듯 지금 연예계는 지각변동이 한창이다. 예능계는 ‘젊은 트로트 가수’라는 신인류로 새롭게 세팅되고, 걸쭉한 트로트 가수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 쨍쨍한 햇빛 아래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송가인을 모르는 초등학생이 없고, 임영웅의 팬클럽 회원은 소녀부터 할머니까지다. 전에 없던 신구 통합이 트로트라는 장르에서 일어난 2020년은 훗날 대중가요 역사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될 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