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주안이와 집에 단둘이 있게 된 날이었다. 게임기의 리모컨이 고장 나서 AS를 맡겨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외출을 삼가야 하는 시기라 주안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기가 꺼려졌다. 한참을 고민 끝에 주안이에게 30~40분 정도 집에 혼자 있을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녀석은 숨도 쉬지 않고 “응!” 이라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그동안 혼자 집에 있는 게 무섭다며 항상 엄마, 아빠를 따라나서던 아들이었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혼자 씩씩하게 집을 지키고 있겠노라고 대답했다.
예상치 못한 외출에 나는 급하게 생각나는 당부 사항을 모조리 쏟아내기 시작했다. 뛰지 말고, 아무에게도 문 열어주지 말고, 벨을 눌러도 대답하지 말고, 가스 불 만지지 말고, 세탁기 만지지 말고 등등…. 나의 두서없는 당부를 가만히 듣고 있던 주안이는 “아빠! 나 아홉 살이야. 어린애 아니거든. 다 알아! 그러니까 빨리 다녀오세요. 마스크 꼭 쓰고! 손 꼭 씻고!”라며 오히려 나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훌쩍 커버린 녀석의 모습에 순간 뿌듯함이 느껴졌지만 처음 주안이를 혼자 두고 나서는 외출이라 불안감이 요동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전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집을 나온 나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볼일을 본 후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서 “주안아~!” 하고 외치며 헐레벌떡 들어오는데, 어째 집 안이 고요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어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주안이를 부르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썰렁한 공기에 아찔한 기분마저 들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안방 문을 열었다.
있다. 주안이가 있었다. 누가 온 줄도 모르고 태블릿PC를 들고 게임에 푹 빠져 있는 녀석. 이불 속에 포근하게 파묻혀 여유로운 표정으로 게임에 집중한 모습이 왜 그렇게 고맙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지. 묘한 기분이 들며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너 이 녀석! 불러도 대답 안 해서 깜짝 놀랐잖아!”라는 꾸지람에 주안이는 “어? 아빠 왔어? 아이스크림도 사 왔네? 감사합니다! 우리 같이 맛있게 먹으면서 이거 하자!”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스크림을 물고 아들과 함께 게임을 하면서 나는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부모님은 외출할 때 늘 TV 리모컨을 집 안 어딘가에 숨겨놓고 가셨다. 하루종일 숙제는 안하고 TV만 보며 시간을 보낼까 우려하는 마음에 부모님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부모님의 작전에도 누나와 나는 그 리모컨을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래서 나는 늘 부모님이 외출하실 때를 좋아했다. 누나와 리모컨을 찾아 마음껏 TV를 보며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주안이도 그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제약 없이 모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그때의 나처럼 행복하지 않았을까.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그 시기를 주안이가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니 뭉클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하기도 했다. 가끔 녀석에게 달콤한 자유를 선물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사랑해, 손주안!
글쓴이 손준호
1983년생으로 연세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뮤지컬 배우다. <팬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오페라의 유령> 등 다수의 뮤지컬에 출연했다. 지난 2011년 8살 연상의 뮤지컬 배우 김소현과 결혼해 2012년 아들 손주안 군을 얻었다. 뭘 해도 귀여운 주안이의 행복을 위해 고군분투 중인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