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자 크러쉬가 돌아왔다. 정규 앨범이란 타이틀로는 5년 6개월 만의 일이다. 따뜻한 음색, 감미로운 음률, 서정적인 가사로 언젠가부터 추운 계절이면 생각나는 크러쉬의 음악이 적시적기에 등장한 느낌이다. 2012년 데뷔 이후 발표하는 곡마다 음원 차트를 휩쓴 그는 ‘차트 이터’로 불리는 자타 공인 음원 강자다. SBS <괜찮아, 사랑이야>의 OST ‘잠 못 드는 밤’을 시작으로 tvN <도깨비>의 OST ‘beautiful’를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거머쥐었다. 뛰어난 프로듀싱 능력을 갖춘 싱어송라이터 크러쉬는 R&B를 기반으로 폭넓은 사운드를 소화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오고 있다. 내놓는 작업물마다 반응이 좋아 ‘흥행 보증 수표’가 된 그가 이번에는 호흡이 짧은 미니나 싱글, EP가 아닌 정규 앨범을 들고 나타났다.
평소 에디터가 생각하는 크러쉬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때로는 쓸쓸한 감성의 R&B 가수로, 때로는 악동 같은 힙합퍼로, 때로는 순수한 청년 예능인으로 기억됐기 때문이다. 인터뷰이로 만난 그도 그랬다. 말쑥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 그는 쑥스러워하면서 인기 가수답지 않은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넸다. 추운 날씨, 먼 걸음에 대한 감사의 말도 잊지 않았다. 음악 이야기를 시작하자 달라진 눈빛으로 긴 침묵과 진지한 고민을 반복하던 그가 반려견 ‘두유’ 이야기를 할 땐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답변을 쏟아냈다. 오랜 시간 이야길 나누고도 크러쉬에 대한 에디터의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정부터 일출까지
크러쉬는 이번 앨범이 ‘일기장’ 같은 앨범이라고 운을 뗐다.
“이번 수록곡은 대부분 제 일기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실제 일기장에 적혀 있는 내용을 가사로 발췌하기도 했고요. 그중 ‘Alone’이 타이틀곡이 된 이유는 음악으로 많은 분을 위로해드리고 싶어서예요. 저 역시 외로움, 아픔, 슬픔을 느낄 때면 음악을 들으며 치유 받았거든요. 솔직한 제 이야기를 통해 많은 분들과 상처에 대해 공감하고 싶었어요.”
크러쉬는 이번 앨범에서 다양한 실험과 연구를 거듭했다. 단순히 아날로그 감성으로 가득 차 있는 음악을 만들기보다 당시의 방식을 활용해 실제 그때의 소리를 최대한 녹여내려 노력했다. 아날로그 시대의 뮤지션들은 어떤 악기를 썼는지, 어떤 방식으로 녹음했는지, 어떤 마이크를 썼는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우연히 보게 된 신중현 선생님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다양한 시대를 골라서 사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더라고요. 공감해요. 예전의 감성과 문화들을 저희는 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으니까요. 그 시대를 살진 않았지만 흉내 내는 것을 넘어 그 음악에서 재미를 찾고 흥미를 느끼다 보니 자연스레 제 음악에도 녹아들었어요.”
앨범의 테마는 3년 전, 반려견과 나섰던 한강 산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wonderlust>를 준비하던 어느 이른 아침, 해가 뜬 동쪽 하늘과 깜깜한 서쪽 하늘의 경계선에 선 그는 한참을 사색에 잠겼다. 그때 자아 성찰과 함께 이번 앨범의 콘셉트를 떠올렸다. 덕분에 이번 앨범은 이른 새벽부터 늦은 새벽까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 트랙이 배치됐다. ‘자정부터 일출까지’라는 앨범명 그대로 수록된 12곡을 차례로 들으면 마치 한 사람의 하루를 돌아보는 기분이다. 리스너들에게 이 앨범은 하루에 불과하지만, 크러쉬의 3년이라는 시간이 녹아 있다.
“제 영혼을 갈아 넣은 앨범이에요. 처음 이 앨범을 구상하기 시작한 게 꽤 오래전이었으니까요. 오랜 시간 좋은 곡과 아이디어들을 냉동실에 차곡차곡 보관해왔어요. 틈틈이 꺼내 작업하고 넣어두고를 반복했죠. 제가 가야 할 길과 방향성에 대해 집중하고 연구한 결과 나온 완성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지금도 여전히 그 과정에 놓여 있지만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 많은 경험과 깨달음을 얻었거든요.”
1부터 100까지 완벽을 추구했던 이전 앨범들과는 결이 다르다. 강박관념 대신 강약 조절에 주력했다. 힘을 줄 때는 주고, 빼야 할 때는 빼면서 다이내믹하지 않아도 음악의 잔향이 오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특히 2015년 이후 4년 만에 자이언티와 함께 완성한 ‘잘자’라는 곡은 그 의미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잘자’는 크러쉬가 미래의 아이에게 바치는 곡으로 좋은 아빠이자 남편이 되고 싶은 바람을 담았다. 이 외에도 이번 크러쉬의 앨범엔 많은 이들의 손길이 닿았다. 친누나인 싱어송라이터 노브(nov)도 작곡에 참여했다.
“누나와는 어릴 때부터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꼭 곡 작업을 위한 대화가 아니더라도 누나와 대화를 하다 보면 좋은 아이디어나 생각들이 떠오르거든요. 우리가 주고받은 이야기가 하나의 가사로 정리될 때가 있어요. 편하게 나눈 이야기 속에서 탄생한 가사들이라 무엇보다 친근하고 자연스럽죠. 저도 그렇고 누나도 그렇고 서로 많이 의지하고, 기대고, 교류하는 사이예요.”
12곡 중 무려 7곡을 함께 작업한 홍소진 프로듀서도 빼놓을 수 없다. 아이유 밴드로도 활동 중인 그녀는 이번 앨범의 일등 공신이다. 실제로 1990년대를 살아온 그녀가 당시의 음악에 푹 빠진 크러쉬와 소통하며 수도 없이 음악적 교감을 나눴다. 그녀와 작업한 곡들은 여전히 냉동실에 가득 쌓여 있다.
크러쉬는 그동안 음원 차트의 절대 강자로 군림해 왔다.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를 기록하며 유난히 폭이 넓은 팬층을 형성한 뮤지션이다. 실패 없이 이어진 연이은 흥행에 대한 부담감은 없을까. 대중성을 얼마나 고려하며 곡을 만드느냐는 질문에 그의 똑 부러진 대답이 돌아왔다.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제 나름대로 항상 겸손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어떤 노림수가 확실한지 알고 계속 그것만 고집한다면 뮤지션으로서 성장할 기회를 잃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오히려 더 새로운 음악에 도전하고 자신의 취향에 맞게 최적화해 좋은 결과물로 선보이는 게 진정한 뮤지션의 숙명이죠. 한두 해 음악하고 그만둘 게 아니잖아요. 오래오래 좋은 음악을 들려드리는 게 제 궁극적인 목표예요.”
요즘 가요계의 시끄러운 사재기 논란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사재기는 근절돼야 하는 게 맞으니까요. 정당하게 음악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습니다. 열심히 음악을 하고 만드는 입장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에요.”
크러쉬는 2019년 아메바컬처를 떠나 싸이가 수장으로 있는 피네이션으로 소속사를 옮겼다. 집과 녹음실만 오가는 그에게 그러한 변화가 곡 작업에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앨범 발매에 대한 목표 의식이 뚜렷해진 계기가 됐다.
“싸이 선배님과는 처음 봤을 때부터 대화가 잘 통했어요. 이번 앨범에서는 음악적인 부분에 도움을 받았다기보다 큰 그림에 대한 조언을 잘 해주셨죠. 선배님은 사운드적인 부분에서 이해도가 높은 아티스트예요. 여러 도전에 대한 지원을 아낌없이 받아 더 좋은 작품이 나왔다고 생각해요.”
크러쉬는 이번 앨범을 작업하면서 선배 가수 나얼과도 많은 이야길 나눴다. 좋은 음악을 수없이 많이 함께 들으며 음악적 교감을 나누는 식이었다.
“언젠가 나얼 선배님과 꼭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요즘 1990년대 음악을 오마주한 곡들을 작업 중이라고 말씀드리니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시고 좋은 곡을 많이 소개해주시더라고요. ‘너 90년대 가수 누구 알아?’ 하고 물으시며 다양한 명곡을 들려주셨죠. 선배님과 함께한 모든 시간이 좋은 수업 시간이 됐어요.”
크러쉬는 2년 전 공황장애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보며 자신도 같은 처지라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유행이 끝나면 옷장 속에 갇혀 잊히는 옷처럼 자신도 쉽게 소모되고 버려지는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그를 휘감았다. 무대에 서는 게 무서웠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게 두려웠다.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홀로 지낸 그는 외로움과 슬픔이 만든 스트레스를 통해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예전에는 오늘만 산다는 생각으로 매사에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강했어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았던 거죠. 2년 전, 마음이 아픈 시기를 보내며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어요. 이제는 오늘이 아닌 미래를 보며 오래 음악을 하고 싶어요. 걱정하기보다는 즐겁고 재미있게 음악을 하려고요. 목표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내 인생이 어디까지 와 있나 고민이 많았지만 그 답을 찾진 못했어요. 여전히 여행하고, 방황하고 있어요.
음악적으로도, 삶적으로도요. 벌써 답을 찾는다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성장통
1992년생인 그는 올해 20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게 됐다. 지난 20대를 되돌아보며 크러쉬는 스스로를 ‘탑승 수속 중인 한 젊은이’로 비유했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은 막연한 여행을 떠나려는 ‘여행자’라는 것. 다가올 30대에는 그 목적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했다.
“내 인생이 어디까지 와 있나 고민이 많았지만 그 답을 찾진 못했어요. 여전히 여행하고, 방황하고 있어요. 음악적으로도, 삶적으로도요. 목숨이 닿는 데까지 좋은 음악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제 인생에 너무나도 큰 목표이기 때문에 벌써 답을 찾는다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요즘은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하며 스트레스를 치유하고 있다. 자연스레 하루 세 번 이상 반려견을 데리고 나서는 외출이 생각을 환기하고 스트레스에 갇힌 자신을 힐링시켜준다고.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음악적 영감을 얻기도 하고 앨범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와 함께하는 반려견 ‘두유’도 SNS상에선 이미 슈퍼스타. 팔로어 수가 10만 명을 훌쩍 넘었고, 두유의 시선으로 작성된 피드가 업데이트 때마다 화제가 되며 ‘랜선 이모’ ‘랜선 삼촌’들의 ‘좋아요’를 유발하고 있다.
“반려견의 계정을 제가 관리하는 건 아니에요.(웃음) 두유가 직접 하죠. 잠잠하지만 무게감 있게 잘 관리해왔더라고요. 제가 자고 있을 때 주로 활동하는 것 같아요.”
오랜 시간 크러쉬와 함께한 두유는 반려견을 넘어 인생의 동반자다. 그의 SNS에 도배되는 것은 물론, 앨범 재킷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두유는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제 영감의 원천이에요. 두유를 보면 미안한 게 참 많아요. 훈련으로도 교정되지 않는 예민하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면 이 친구가 제 아픔이나 상처를 다 가져가서 그런가 싶거든요. 나중에 두유가 세상을 떠나면 많이 힘들겠죠. 그래서 더 앨범에 기록하려고 해요. 예전 앨범 재킷과 비교하면 두유도 많이 늙은 것 같아 마음 한편이 짠해요.”
공백기 동안 곡 작업에만 몰두했던 그가 여가 시간에 집중한 건 드라마였다. JTBC <SKY 캐슬> 이후 이토록 드라마에 푹 빠져 지낸 건 처음이다.
“얼마 전 KBS2 <동백꽃 필 무렵>을 정주행했어요.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특히 드라마를 보면서 OST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어요. 음악을 통해 (작품의) 장면을 연상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힘이 아닐까 싶어요.”
OST 제안은 언제나 좋다는 그가 조심스럽게 한마디 덧붙였다.
“tvN <도깨비>는 아직 못 봤어요. 1월쯤 한 번에 몰아서 보려고요.(웃음)”
인터뷰 내내 크러쉬는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자아 성찰을 거듭하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의 성장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좋은 음악’이라는 말을 수차례 반복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좋은 음악’이 무엇인지 물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음악은 들었을 때 좋은 음악이에요. 이번 앨범을 작업할 때도 (머리보다는) 귀를 믿었어요. 화려한 테크닉으로 힘을 주는 것보다 좋은 사운드와 좋은 편곡, 좋은 선율을 가장 베이식하게 사용해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들었을 때 좋은 음악. 그게 바로 ‘좋은 음악’ 아닐까요?”
크러쉬의 음악은 늘 사랑받는다. 비단 그가 만든 곡이 아닌, 그가 참여한 곡들조차도 대중은 믿고 듣는다. 음악을 대하는 그의 진중한 태도를 보면 누구나 그 이유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