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세대 패션 디자이너이자 최다 패션쇼를 진행한 현역 디자이너예요. 2020 S/S 서울패션위크 무대를 선보인 소감은요?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 컬렉션부터 시작하면 60번 정도, 서울패션위크 무대만 21번째예요. 2020 S/S 서울패션위크는 저의 패션 여정이 묻어나는 '나침반 없는 삶(Life Without a Compass)'을 주제로 삼았어요. 컬렉션도 인생도 어떻게 보면 지도에도 없고 나침반도 없는 항해를 하는 것 같아요. 미지의 바다 같은 삶을 발길 닿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항해하며 직면하는 도전과 모험의 파도에 즐겁게 몸을 맡겼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어요. 패션계의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고, 패션 시장의 구조 자체도 유통 중심으로 바뀌면서 컬렉션을 통해 대중에게 자신을 알리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하지만 권투의 토너먼트 경기처럼 최고만 살아남아야 하는 경쟁의 장에서 컬렉션은 신진 디자이너에게는 좋은 기회임이 분명해요. 서울패션위크가 디자이너와 소비자의 욕구를 두루 만족시키는 지렛대 역할을 톡톡히 해내길 기대하고 있어요.
매 시즌 컬렉션 주제를 정하는 작업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디자이너로서 옷을 만드는 것보다 시즌마다 테마를 정하는 것이 더 힘들어요. 좋은 환경에서 체계적으로 패션 교육을 받은 요즘 디자이너들과는 달리 주제 하나를 정하는 데도 시간도 많이 걸려 늘 오랫동안 고민을 해요. 먼저 영감을 주는 패턴을 정하거나, 광목으로 드레이핑 작업을 한 후 감성을 덧입히는 작업을 하며 컬렉션의 전체적인 스토리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특히 선호하는 브랜드가 있나요?
어떤 스타일이나 브랜드를 선호하기보다는 일주일 동안 스케줄을 참고해 철저히 TPO에 따른 룩을 고수하고 있어요. 오늘처럼 빅팍의 남성복 라인도 자주 입고, 그 시즌에 핫한 브랜드가 있으면 그 브랜드의 옷을 구입해 입어보기도 해요. 특정 브랜드로 풀 착장하거나 값비싼 것을 입고 신는다고 패셔너블해 보이진 않아요. 그날그날의 감정에 따라 다양한 아이템을 섞어 만드는 룩이 곧 자신만의 스타일이자 패션이라고 생각해요.
K-패션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해외에서 컬렉션을 하면서 K-패션의 덕을 많이 보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Made in Korea' 하면 우리 옷에 대한 인지도가 낮아 비싼 가격을 받을 수 없었는데 이제는 가격 저항이 별로 없어요. 오히려 해외 브랜드들이 어떻게 하면 한국 시장에 뛰어들 수 있을지 고민하고, 루이 비통의 회장이 해마다 한국을 방문할 정도로 한국 문화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돼 있어요. 한국 패션계가 포화 상태라고들 하지만 인터넷이나 소셜 미디어 같은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했잖아요. 아직은 덜 다듬어졌지만 재치 있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무장한 신진 디자이너를 서울패션위크에서도 많이 볼 수 있고요. 이런 K-패션을 향한 전 세계의 관심을 잘 활용하면 재능 많은 한국 디자이너들이 세계시장으로 진출하는 좋은 발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디자인을 할 때 영감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디자이너의 모든 감성은 세상의 흐름에 집중돼 있기 때문에 어느 한곳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말할 순 없어요. 주위의 모든 것이 영감이 될 수 있고, 때론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찾은 영감으로 아름다운 디자인을 탄생시킬 수도 있거든요. 어떤 형체나 물건보다는 어린 시절의 향수 같은 감성적인 것에서 새로운 영감이 떠올라요.
지난 2015 S/S 컬렉션부터 두 딸이 이끄는 아트워크 그룹 '줄라이칼럼'과 함께하고 있어요. 한결 신선해졌다는 반응이에요.
오랫동안 여성복을 만들었지만 직접 입어보지 못해서인지 스타일링에 어려움이 있었어요. 구조적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옷들을 빅팍의 타깃이 되는 그들 세대의 감성으로 부드럽게 매만지는 작업을 해주니 고맙고 든든하죠.
몇 달 전 오픈한 빅팍 라운지가 패션계에 화제가 됐죠.
뉴욕에서 계속 컬렉션을 하다 보니 옷에 대한 바이어들의 관심이 많아졌어요. 해외시장에서 더 잘 알려진 빅팍의 옷을 한국에서도 구매하고 싶다는 요청도 있었고요. 빅팍의 라운지 매장은 바이어와 상담할 때 편안하게 더 많은 옷을 보여줄 쇼룸 개념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이곳에서 파티도 했고요. 지인들에게 청담동에 오면 카페에 가지 말고 여기 들러 커피 한잔하라고 얘기해요. 후배들에게도 여기에 옷을 가져다 걸어놓으면 수수료 없이 팔아주겠다고 했어요. 빅팍 라운지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요즘 패션이 상업성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 안타까워요. 패션이란 상업성과 예술적 가치가 공존해야 지속될 수 있거든요. 저는 후배들에게 패션을 평생 직업으로 선택했다면 서두르지 말라는 얘기를 자주 해요. 요즘 평균수명도 늘어났고 모든 환경이 좋아졌잖아요. 기술적 능력, 예술적 가치에 상업성의 비율을 균형 있게 잘 섞어 천천히 내공을 다지다 보면 디자이너로서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어요. 디자이너만의 자존심을 담아 자기 주체성도 꼭 지켜나갔으면 해요.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요?
이제는 나를 완성시키려고 욕심내기보다는 한국 패션이 세계 패션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뿌리 역할을 하는 좋은 선배로 남고 싶어요. 그런 역할을 빅팍 라운지에서 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죠.
마지막으로 패션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패션은 곧 감정이라고 말해요. 거울을 볼 때 자신을 투영해 대화하는 것처럼 늘 감정을 느껴야 해요. 음악, 영화, 전시 등 주변의 모든 것에서 느끼는 감정이 곧 패션이라는 매개체로 표출될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