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지기, 제2의 인생을 누리다
경기도 양평 문호리에 자리한 일러스트레이터 김혜경 작가의 집. 푸른 마당과 평화로운 전원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울과는 공기가 다르네요. 가을 냄새도 나고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50년 지기 강효문 씨와 김혜경 작가가 해사한 미소로 반긴다. 두 사람의 반려견 캔디와 머루가 자연스레 어우러진 모습에서도 이들의 친분이 너끈히 감지된다.
"우리는 초등학교 동창이에요. 제가 혜경 작가 집에 자주 놀러 오곤 합니다. 친구는 그림을 그리고, 저는 요리를 하거나 바느질을 하면서 작업을 함께하죠. 이렇게 일상을 나누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게 참 좋아요."
은퇴 후 직함을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즐기는 강효문 씨. 나이키코리아를 거쳐 신세계인터내셔널에서 첫 여성 임원으로 일했고, 스와로브스키 한국 지사장을 맡는 등 30여 년간 패션업계에 몸담은 그녀는 제2의 인생을 살뜰히 꾸리는 중이다. 직장 생활을 하던 당시에도 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터. 요리, 바느질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주변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고 소통하는 '무니스오픈키친'을 기획하는 등 이전과는 결이 다른 일상을 차곡차곡 쌓는 중이다.
6년 전, 이곳에 터를 잡은 김혜경 작가는 텃밭을 가꾸는 등 전원생활을 만끽하며 작품 활동에도 한층 여유롭게 임하고 있다. 그녀의 주된 작업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작품이다. MBC <뽀뽀뽀>, EBS의 다양한 어린이 방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아동 출판 분야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주변 자연과 소박한 일상에서 영감을 받는다는 그녀의 그림에는 특유의 말갛고 안온한 느낌이 깃든다.
"원래는 금속공예를 전공했는데, 어린이 그림의 포근하고 순수한 느낌에 매료됐죠. 작업을 할 때면 제 마음까지 순수하고 깨끗해지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그런지 자연 속에서 영감을 얻으며 작업하는 게 도움이 많이 됩니다."
얼마 전 두 사람은 이탈리아로 배움의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토스카나에서 20일 동안 지내며 요리를 배우는 색다른 경험을 함께 했다. 이처럼 익숙하게 일상을 나누는 두 사람이 작년에 새로운 동행을 시작했다. 유기견 돕기 재능기부 프로젝트 '세이브더독(Save the dogs)'이 그것이다.
유기견을 살리는 작지만 위대한 움직임
두 사람은 또 한 명의 50년 지기, 제주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김희주 대표와 의기투합해 세이브더독을 기획하고 운영한다. 재능기부로 마련된 원데이 클래스를 열고 재료비를 제외한 수강료를 유기견 보호센터에 기부하는 것.
"반려동물 1천만 시대라고 하잖아요. 반려견이 늘어난 만큼 유기견도 많아지고 있어요. 버려진 유기견은 아픈 경우가 많아요. 당장 치료해야 하는데 비용이 턱없이 부족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죠. 세이브더독을 통해 얻은 수익금은 유기견들을 구조하거나 치료하고, 해외 입양을 후원하는 데 쓰이고 있어요."
강효문 씨와 김희주 대표가 세이브더독의 기획과 운영을 총괄하고, 김혜경 작가는 포스터와 티저를 제작하며 시너지를 발휘하는 중이다. 김혜경 작가의 손길로 완성된 따뜻한 그림 포스터는 프로젝트를 널리 알리는 데 힘을 실어주고 있다.
"강아지와 어린이가 닮은 구석이 많아요. 무엇보다 순수하잖아요. 제 그림이 유기견을 살리는 데 보탬이 된다면 더없이 기쁘지요. 오랜 친구들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고받으면서 유의미한 작업을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해요."
세이브더독의 클래스를 진행하는 강사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힌 이들이다. 대가 없이 그저 마음만으로 나서는 이들은 고맙고 소중한 존재다. 인형을 만드는 김혜경 작가와 프렌치 요리를 선보이는 이혜승 셰프도 그들 중 하나다.
손맛으로 엮는 우리의 행복한 시간
김혜경 작가의 집에서 단 5분 거리에는 또 다른 김혜경 작가의 공간 '폴의 인형 작업실'이 자리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조르르 앉아 있는 뜨개 인형이 시선을 끈다. 이곳은 일주일에 한 번, 문호리 '언니들'의 아지트가 된다. 뜨개질을 함께 하고 음식을 나누는 '잇뜨피아'라는 모임이 열리는데, 이들의 회합은 경쾌하기 이를 데 없다. 요즘 오가는 이야기는 세이브더독으로 모아진다. 김혜경 작가가 세이브더독 강사로 참여한 건 지난 5월에 열린 두 번째 행사부터였다. 인형 만들기 클래스를 진행하며 자신의 재능을 기꺼이 기부했다.
"저 또한 강아지를 기르다 보니 공감되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죠. 클래스를 진행하면서 사실은 제가 배우는 게 더 많았어요.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들이 오셔서 놀랐고요. 다들 좋은 마음으로 즐겁게 참여해주시니 저도 행복했어요."
김혜경 작가는 인형 작가가 되기 전에는 30년 넘도록 광고 크리에이터로 살았다. 대홍기획, 제일보젤, TBWA 등 내로라하는 광고 회사를 거친 후 현대·기아차그룹의 임원이 되기까지 현업에서 쉼 없이 달려왔다. 당시 그녀는 바느질을 작은 구원처럼 마주했다.
"그때는 앞만 보고 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광고는 승률이니까요. 이겨야 하는 삶에 익숙했지요. 취미 생활로 바느질을 했는데, 온전히 저한테 집중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곤 했어요. 은퇴 후 작은 공방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리라 다짐했죠. 지금은요? 삶이 한결 여유로워지고 마음도 편안해졌어요. 늘 한 시즌 앞서 살다가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돌아보면서 살고 있죠."
그저 손길 가는 대로 대충 만들 것. 그녀가 지향하는 인형은 예쁘고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멀다. 어딘가 부족한 듯하지만 가만히 바라보게 되는 얼굴이 대부분이다.
"인형은 잘 만들면 안 돼요. 되레 못생긴 얼굴이 보면 볼수록 서서히 예쁘게 보이더라고요. 사람도,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완벽하지 않은 우리와 닮은 모습이지요. 저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늘 완벽하려 했고요.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내려놓은 마음가짐이 인형의 얼굴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인형을 왜 만드는지 묻는 질문에 "그냥 좋으니까요"라는 그녀의 답변에서 단순 명료한 행복 공식이 드러난다.
"반려동물 1천만 시대라고 하잖아요. 반려견이 늘어난 만큼 유기견도 많아지고 있어요.
세이브더독을 통해 얻은 수익금은 유기견들을 구조하거나 치료하는 데 쓰여요.
생각보다 많은 분이 세이브더독의 취지에 공감하고 함께해주시니 정말 감사하죠."
맛있는 인생, 관계라는 양념
점심시간이 되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들. 문호리에서 20분 남짓 굽이굽이 오르막길을 따라 닿은 곳은 이혜승 셰프의 작업실이다. 막내 이혜승 셰프가 언니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프랑스 가정식으로 만찬을 즐길 참이다. 샐러드 리오네즈와 라타투이를 분주히 준비하는 이혜승 셰프의 손길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인다. 첼로를 전공한 이혜승 셰프는 유학차 건너간 프랑스에서 요리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귀국 후 첼리스트의 꿈을 잠시 접고 프렌치 비스트로를 운영했고, <마스터셰프 코리아>에 출연해 준결승에 오르면서 성실하게 닦아온 요리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유학 시절 요리는 단순히 생존 기능이었어요.(웃음). 물가가 비싸니 김치를 직접 담그기 시작했지요. 다른 유학생들에게 게장이나 물김치를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고요. 하다 보니 즐겁더라고요. 한국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죠. 각각의 음식을 만들기까지 저마다의 순서와 방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구나, 과정이 중요하단 걸 깨달았어요. 음악과 닮은 점이 많더라고요."
이혜승 셰프는 요리를 할 때마다 음식의 본질을 잊지 않으려 공을 들인다. 맛있는 요리, 예쁜 요리보다 먹음직스럽게 만드는 것. 무엇보다 그녀는 차림 메뉴를 고민할 때 조화와 관계에 집중한다. 레시피를 개발할 때도 다르지 않다.
"샐러드, 메인 요리, 디저트 등 주로 코스 요리에 나올 법한 메뉴를 개발하곤 하는데 맛의 조화, 식감의 어울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맛이 잘 어우러져야 좋은 음식이라고 생각해요.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의 관계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요? 그간 재능기부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기회가 없어 아쉬웠는데, 마침 세이브더독을 만났죠. 이번에 처음 참여하는 거라 기대가 많이 됩니다."
이혜승 셰프는 서울에서 열리는 세이브더독 행사에 참여하는 설렘을 드러냈다. 자만하지 않고 음식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 셰프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진심이 세이브더독 원데이 클래스에서도 고스란히 전해지길 바란다.
손으로 하는 일에는 마음이 오롯이 담길 수밖에 없다. 따로 또 같이, 각자의 영역에서 충실히 활동하는 동시에 기분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는 네 사람. 앞으로도 행복을 배양하는 비옥한 관계 속에서 새록새록 늘어나는 꿈을 보듬을 것이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오래도록 함께.
행복의 선순환, 세이브더독의 꿈
행복의 선순환, 세이브더독의 꿈 2017년, 반려견 캔디와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즐기던 강효문 씨는 친구 김희주 대표가 운영하는 카페 '키친오즈'에 들렀다 우연히 유기견 구조 단체 회원을 만났다. "갑자기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후다닥 나가더라고요. 유기견이 발견돼 구조하러 간다고요. 병을 앓는 강아지들을 치료하고, 임시 보호 후 해외 입양을 보내는 일을 하고 있던 거죠. SNS를 팔로하고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어요. 내가 도움이 될 수 없을까 하던 차에 유기견 치료 비용이 급하게 필요한 상황이 닥친 거예요. 사비로 100만원을 지원했지요."
이후 강효문 씨는 제주에서 숙박 시설을 운영하던 지인의 부탁을 받고 양말 인형 만들기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했다. 당시 모인 수강료를 유기견 보호센터에 보낸 것을 시작으로 재능기부 형식의 기부 프로그램을 떠올리게 됐고, 조금씩 움튼 생각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며 김희주 대표와 함께 세이브더독을 만들었다. 첫 번째 행사는 지난해 12월에 진행했다. 홍신애 셰프, 이선영 요가 강사 등 지인들이 힘을 보태며 단 이틀 만에 강사가 세팅됐다. 동시에 마켓을 열어 제품을 기부하는 셀러를 모집했다. 지인부터 동네 이웃까지 참여 의사를 밝히며 운동화, 청바지 등을 기부했고, 1,200만원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올해 5월에 열린 두 번째 행사는 더욱 풍성하게 진행됐다. 알음알음으로 소식을 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겠다며 연락을 해와 클래스와 마켓이 더 다채롭게 꾸려졌다. "생각보다 많은 분이 세이브더독의 취지에 공감하고 함께해주시니 정말 감사하죠. 기부금은 잘 모으는 것만큼 잘 쓰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참여해준 강사님들이나 물품 기부자분들께 수익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투명하게 공유하고 있어요." 세이브더독은 서울에서 세 번째 행사를 진행하고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할 예정이다. 사람과 동물의 행복한 동행, 아름다운 선순환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란다.
세이브더독 'Fun Class Week in Seoul 2019'
9월 23일부터 29일까지, 세이브더독의 세 번째 행사가 서울에서 열린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주일 동안 원데이 클래스가 진행되는 것. 프랑스 가정식을 비롯해 인형 모빌 만들기, 반려견 그림책 만들기, 브라이트닝 요가 체험, 스테인드글라스 만들기, 이탈리아 가정식 티라미수 만들기, 카시트를 활용한 카드 지갑 만들기 등 다채로운 클래스가 마련됐다. 재료비를 제외한 수강료는 서울 지역 유기견 보호센터에 기부된다. 자세한 내용은 세이브더독 인스타그램(@save_the_dogs_onedayclass_jeju)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