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제품은 다 나쁠까?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품기 시작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많이 화학물질에 노출된 채 살고 있을까? 이 의문은 문명과 편리를 앞세운 화학제품의 고삐 없는 진보에 제동을 걸었다. 불편한 의심을 촉발한 건 무려 6,521명의 피해자와 1,433명의 사망자를 낳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다. 그 전까지 사람들은 ‘죽기야 하겠어? 어느 정도는 감안해야지’ ‘안 그래도 바쁜데 그 세세한 걸 어떻게 다 지키고 살아?’와 같은 생각으로 화학제품이 주는 편리에 손을 들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그 무심함과 안일함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결정적 계기다. 일상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화학제품이 목숨을 빼앗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사람들은 이제 성분표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치약, 화장품, 세제 등의 생활 제품과 먹거리를 구매하는 일상적 행위가 공포와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일이 된 시대에 성분을 살피는 것은 취향이나 삶의 질을 높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자신을 굳이 ‘케미포비아(화학물질에 대한 공포증, 또는 생활 화학제품을 꺼리는 사람들)’로 분류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이 흡입 독성 물질이 함유된 탈취제, 유해한 액체질소 과자, 발암물질에 무방비한 생리대, 살충제 달걀, 생식 기능 이상을 유발하는 물질이 검출된 요가 매트 등 일상에 깊이 침투한 유해 화학물질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여성들이 뷰티 제품을 구매하기 전 시판 화장품의 주의 성분, 알레르기 유발 성분을 알려주는 플랫폼 앱 ‘화해’를 켜고 지금 사려는 제품이 자신에게 안전한지 체크하는 건 이제 꽤 흔한 쇼핑 습관이 됐다.
‘노케미’족은 새로운 삶의 방식도 만들었다. 노케미 라이프(No-Chemi Life) 혹는 케미컬 프리 라이프(Chemical Free Life)로 불리는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이들은 세제, 탈취제, 화장품 등 화학 성분에 노출되는 제품을 직접 만들어 쓰거나 유해 성분을 포함하지 않은 제품을 꼼꼼히 살피고 구매한다. 단순히 몸에 끼치는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환경에 끼치는 악영향까지 살펴 전문가에 준하는 지식으로 성분, 기술력 등을 분석해 정보를 공유하는 컨슈니어(소비자 ‘consumer’와 기술자 ‘engineer’를 결합한 신조어) 역시 노케미 라이프가 낳은 새로운 유형의 소비자다.
상명대 소비자분석연구소 이준영 교수와 화학에너지공학과 강상욱 교수는 저서 <케미컬 라이프>에서 이러한 ‘경계’가 한국인 특유의 안전불감증을 완화하고 정부와 기업의 안전 관리 정책·대책의 필요성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화학제품은 안 쓰는 게 상책이다’라는 선입견, 잘못된 정보로 인한 편견은 오히려 안전한 ‘케미컬 라이프’를 방해한다. 전문가, 노케미족과 함께 최소한의 상식과 기준을 갖고 화학제품으로부터 살아남는 법을 알아봤다.
알고 보면 쓸모없는 당신의 화학 상식
안전하다고 판명된 화학 성분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배신하거나 뉴스가 ‘미확인’ 가설을 양산하는 상황과 종종 마주한다. 화학제품에 관한 잘못된 정보 혹은 새롭게 판명된 연구 결과 등이 뒤엉킨 상황에서 우리의 안전할 권리는 더욱더 위태해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믿을 수 있는 건 ‘믿을 만한 전문가’의 안내와 그 가이드라인 속에서 분별력과 기준을 갖추는 일. 특히 철석같이 ‘진리’라고 믿는 사실들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노케미’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먹거리에 관한 가장 큰 오해는 제품 전면에 찍힌 ‘무첨가’ 표시를 곧 ‘안전성 인증’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강상욱 교수는 ‘무첨가’가 건강한 식품의 기준이 되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제품에 ‘무첨가’라고 적혀 있어도 표시된 몇 가지 첨가물을 제외하고는 다른 대체 첨가물을 사용한 경우가 많다.그렇기 때문에 첨가물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고, 표시된 첨가물이 들어 있지 않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즉 MSG 무첨가를 내세우는 대신 향미 증진제를 쓰거나, 합성 보존료를 첨가하지 않았다고 광고하면서 산도 조절제, 합성 착향료, 색소 등을 넣었을 수도 있다는 뜻. 참고로 우리가 ‘나쁜 성분’으로 생각하는 MSG가 미국 국립연구원에선 ‘나트륨 섭취를 30% 줄여주는 천연 구성 성분’으로 발표되며 오히려 인체에 무해한 식품 성분으로 간주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냉동 수산식품, 냉동식품, 빙과류, 어묵류, 레토르트 식품, 배추김치 등의 식품에 ‘식품안전관리인증(HACCP)’ 마크를 부여한 제품 역시 맹신하면 안 된다. 제조 업체가 직접 관리하는 대신 위탁 고용한 컨설팅 업체를 통해 인증 과정을 진행할 뿐 아니라 정부의 사후 관리도 철저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 이준영 교수는 살충제 달걀 농장의 59%가 HACCP 인증을 받은 농장이었다는 사실을 예시로 들며 “식약처가 인증하는 HACCP 마크를 획득했다 하더라도 식품 위생과 안전이 크게 보장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한다.
노케미 라이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들이 가장 쉽게 시도하는 천연 세제 사용 역시 늘 안전한 건 아니다. 베이킹소다, 식초, 소금 등으로 과일이나 채소, 그릇을 세척하는 건 괜찮지만 청소를 목적으로 분무기에 넣고 욕실, 주방 등에 뿌리는 건 금물. 즉 먹는 건 괜찮지만 흡입은 위험하다는 뜻이다. 강상욱 교수는 식초의 아세트산을 기관지에서 거르지 못하면 위와 달리 유해 물질 안전망이 없는 폐와 폐포에 직접 닿아 위험하다고 설명한다. 그 밖에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BPA 프리 플라스틱 용기 역시 ‘환경 호르몬’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이 오해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브랜드 혹은 특정 제품이 명확한 인증 정보 없이 ‘친환경’ ‘오가닉’ ‘바이오’ ‘내추럴’ ‘에코’ 등의 추상적인 단어를 내건 채 ‘좋은 제품’으로 위장하는 마케팅 전략인 ‘그린 워싱(Green Washing)’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한국소비자원이 지난 2016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녹색 관련 표시를 한 제품 중 46%가 허위 과장 표현을 하거나, 중요 정보를 누락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법정 인증 마크는 쏙 뺀, 그럴듯한 ‘라벨’은 알아서 거르자.
가장 중요한 건 ‘화학 성분’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이나 거부감을 지양하는 일이다. 스위스 의학자 파라켈수스가 “독과 약의 차이는 용량에 달려 있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유해하다고 알고 있는 화학 성분은 용량에 따라 독이 되기도 하지만, 약이 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일방적 성분 배제보다는 총량을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선 국가 차원에서 화장품, 의약품, 식품 등에 따라 적용·관리되는 체계를 벗어나 소비자가 유해 성분에 얼마나 노출됐는지를 통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통합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