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다가온다. 나는 올해도 고향에 가지 않는다. 어릴 때 나는 집안마다 한 명씩 있는, 결혼도 안 하고 변변한 직업도 없어 온 가족에게 걱정이나 끼치는 늙은 철부지 역할을 장차 나 자신이 맡을 줄 몰랐다. 내가 경상도 시골을 벗어나 서울은 물론, 동남아를 누비며 살 거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조카들 입장에서는 내가 무얼 하며 사는지 모르겠는데 한 번씩 이국적인 차림으로 나타나 집안을 휘젓고 가는 '미국 이모' 비슷한 존재일 거다. 명절에 가족과 어우러져 음식을 나누는 대신 나는 그 비슷한 풍경이 담긴 영화를 보기로 했다. <색, 계> <라이프 오브 파이> 등으로 유명한 이안 감독의 초기작 <음식남녀>(1994)다. 거기엔 꼭 나 같은 인간이 나온다.
극 중 대만 요리의 대가 '주사부(랑웅 분)'는 일찍 아내와 사별하고 딸 셋을 혼자 키웠다. 평생 요리를 했지만 이제는 미각을 잃어가고 있다. 그 모습이 황혼처럼 쓸쓸하다. 딸들 중 첫째는 기독교에 심취한 과학 교사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옛사랑을 못 잊어 연애를 안 한다며 안타까워한다. 둘째는 세련되고 자신만만한 커리어 우먼이다. 영화는 둘째가 "아파트를 샀다. 곧 집을 떠날 거다"라고 발표하는 데서 시작한다. 막내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가족은 그를 마냥 어리게만 본다.
한동안 영화는 1990년대 신여성을 대변하는 둘째 '가천(오천련 분)'이 보수적인 가정과 갈등을 겪으며 자기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리려는 것 같다. 그런데 반전에 반전이 이어진다. 가장 어린 막내가 과감한 연애와 결혼으로 가장 먼저 집을 떠나고 보수적인 첫째마저 인생의 큰 변화를 겪고 집을 떠난다. 그사이 잘나가던 둘째 '가천'은 사기를 당하고 데이트하던 남자와도 헤어진다. 회사에서는 해외 발령이라는 큰 기회를 제안하지만 최근 가까운 동료를 잃은 아버지와 둘만 남게 된 '가천'은 머뭇거린다. '가천'은 자기에게 주어질지 몰랐던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지만 또 한 번 반전이 찾아온다. 아버지가 아무도 모르게 연애를 해왔으며 이젠 결혼해서 집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거다. 그의 발표에 가족 모두 기절초풍. 그 소동 신은 봐도 봐도 웃음이 나는 장면이니 직접 찾아보시라.
이쯤에서 독자들은 '나 같은 인간'이 누굴 뜻하는지 눈치챘을 거다. 나는 '가천'이 어머니와 온 가족의 추억이 깃든 집을 혼자 정리하는 장면에서 항상 새벽 공기를 마시듯 청량한 기분이 든다. 그는 쓸쓸하지만 홀가분하게 자신의 미래를 준비한다. 내가 요즘 그런 기분을 느낀다. 물론 당신이 가족을 떠나거나 남겨져본 경험이 없더라도 이 영화의 엔딩은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다. 대만 요리의 아름다움, 장인 정신에 대한 존경, 음식을 나눈다는 것의 의미, 1990년대 풍속과 세대 갈등 등 풍부한 메시지를 가족 소동극 안에 심어둔 감독의 통찰력도 놀라운데, 이 모든 것을 신 하나로 아우르고 희망까지 제시하는 엔딩에서는 감탄을 넘어 감동이 휘몰아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엔딩에서 항상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만다. 어쩌면 이 영화는 추석에 혼자 지내는 나보다 가족을 만나는 이들에게 더 유용할지 모른다. 한 발 물러서서 각자의 삶을 응원하며 이따금 따뜻한 음식을 나누는 것, 그게 성숙한 가족의 모습이란 합의가 있으면 명절이 더 즐거울 테니까. 글 이숙명(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