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연예인은 김혜수다. 마을 언덕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앞에서 드라마 <사모곡>(1987) 타이틀 시퀀스를 촬영한다는 소식에 구경꾼들은 언덕 아래 주차장에 모여 배우들을 기다렸다. 배우들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오자 마을 어른들은 모두 중견 배우들에게 나를 비롯한 ‘코찔찔이’ 초등학생들은 ‘태권소녀’ 김혜수에게 달려갔다. 버스가 떠날 때 피곤한 표정으로 황급히 커튼을 여미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신인인 김혜수는 끝까지 손을 흔들었는데, 그 얼굴이 너무 예뻐서 ‘천사가 있으면 저렇게 생겼겠지?’ 생각했다.
귀한 지면에 왜 잡스러운 사담을 늘어놓냐면, 그게 김혜수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김혜수보다 경력 긴 연예인도 있고, 연기로 더 큰 성취를 거둔 배우도 있고, 한때나마 스타성으로 김혜수를 능가한 배우도 있다. 하지만 내리 33년을 톱 배우이자 톱스타로 지낸 이는 없다. 이건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추억을 뒤져보면 누구든 어딘가에 그녀가 관련된 페이지 한 장쯤은 나온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그는 하이틴 시절부터 자신의 성장을 고스란히 전시하면서, 때로 캐릭터가 아닌 ‘김혜수’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그 자리를 지켜냈다. 아무리 대중에게 이미지가 좋아도 카메라 뒤에서 자칫 삐끗하면 강제 ‘재충전’당하기 십상인 연예계에서 그가 보낸 세월은 고스란히 그의 인품을 증거한다. 특히 내 세대는 김혜수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 성장했다. 수많은 친구에게 흑역사를 남긴 ‘김혜수 메이크업’뿐만이 아니다. 그가 제시한 글래머러스하고 당당하면서도 동성에게 우호적인 여성상은 독보적인 것이었고, 우리 사회를 다양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배우로서의 김혜수는, 휴, 말을 말자. 다만 우리가 아는 그 ‘언니’ 느낌이 극대화된 영화가 최근작 <국가 부도의 날>인데, 안 본 분들이 있다면 꼭 봤으면 좋겠다. 흔치 않은 여성 원톱 영화인 데다 캐릭터가 꽤 매력적이다. 김혜수가 맡은 역은 IMF 구제금융 신청에 반대하는 경제 전문가로, 부하직원들이 공손히 구두를 신겨줄 만큼 카리스마 넘치지만 고위 관료들에게선 여자라고 대놓고 무시도 당한다. 김혜수의 피로와 분노, 절박함이 뒤섞인 연기는 영화에 깊이감을 더한다.
눈치챘겠지만 새삼 김혜수 얘기를 꺼낸 건 지난달 터져나온 뉴스 때문이다. 어머니의 10억대 빚 때문에 김혜수가 한동안 언론에 오르내렸다. 김혜수 측은 2012년 이미 어머니로부터 전 재산으로도 모자랄 만큼 빚을 떠안고 연을 끊었노라 밝혔다. 수십 년간 얼마나 비슷한 일이 많았을지 짐작 가능한 게, 김혜수 측 입장문에서는 지쳐있음이 묻어나고, 어머니의 인터뷰는 남 얘기하듯 태연하다. 물론 가족을 언제나 사랑하고 공경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서로에게 너무 짐이 될 때는 거리를 두는 것도 방법이다. 그게 오히려 문제 당사자를 강하게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김혜수는 연예인의 연예인이다. 그래서 더 단호한 대처를 기대하게 된다. 물론 무슨 짓을 하든 김혜수는 김혜수니까, 우리들의 언니니까, 언제까지나 응원을 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