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로보예의 도스토옙스키 자연 박물관
다로보예 도스토옙스키 옛 영지까지 가는 길은 좁은 시골길이었지만 포장이 되어 있었다. 작은 호수를 지나 조금 더 가니 저만치 앞에 짙은 쑥색의 단층 나무집이 보였다. 사진에서 보아온 다로보예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이다. 집 밖에는 낮은 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리고 입구 옆에는 도스토옙스키 얼굴이 들어 있는 커다란 전시장 표지가 우뚝 서 있었다. 박물관이라고 하기엔 너무 옹색하여 전시장이라고 한 것 같다. 보통 통나무집이라고 하는데, 정작 와보니 통나무는 아니고 두꺼운 널판으로 지은 집이다. 옛 사진에서 보면 이 자리에 통나무로 만든 집이 있었다. 새로 지으면서 이 같은 나무집으로 만든 모양이다.
해설사 엘레나 페트로바 씨는 이 집은 별채라고 했다. 아버지 미하일이 1831년 다로보예 영지를 산 후 방 세 개짜리 집을 지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모친이 살아 있을 때였다. 그래서 별채에서 살게 되었고 이 자그마한 별채가 지금 다로보예 도스토옙스키 자연 박물관의 유일한 건물이다. 다른 박물관과 달리 ‘자연 박물관’으로 명명된 것은 남아 있는 집은 보잘것없지만, 도스토옙스키가 10대 시절 뛰어놀던 주변의 숲과 너른 벌판을 모두 하나의 박물관으로 봐달라는 의미 같았다. 별채는 사실 박물관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다.
텅 빈 내부에는 몇 가지 사진과 조그맣게 만들어놓은 옛 영지 내 가옥들의 모형, 그리고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전부다. 영지를 물려받은 둘째 여동생 베라의 딸 마리야가 피아노를 잘 쳤기 때문에 전시해놓은 것이라고 했다. 마리야는 루빈스타인에게 피아노를 배웠다고 페트로바 씨가 말했다. 우리는 가족들의 사진이 있는 벽 앞에서 한참 동안 그녀의 설명을 들었다.
문지기에게 살해당한 큰 여동생 바르바라
가족사진은 도스토옙스키 7남매 중 도스토옙스키의 제일 아래 남동생 니콜라이를 뺀 6명의 사진과 도스토옙스키 아내 안나와 딸 류보피, 아들 표도르 등 셋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형 미하일, 동생 안드레이, 장녀 바르바라, 차녀 베라, 막내 여동생 알렉산드라, 베라의 딸 마리야, 도스토옙스키가 좋아하여 소설 『백치』를 헌사한 것으로 유명한 베라의 또 다른 딸 소피야의 사진 등이 영지 숲을 배경으로 한 액자 안에 편집되어 들어 있었다(*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4남 3녀 즉, 7남매 중 둘째로 순서는 다음과 같다. 미하일, 표도르, 바르바라(여), 안드레이, 베라(여), 니콜라이, 알렉산드라(여)). 페트로바 씨는 도스토옙스키의 바로 아래 여동생인 바르바라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바르바라 얘기는 이곳에 와서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말한 내용은 이런 것이다.
바르바라는 돈 많은 남편과 헤어져 부유하게 살았으나 주위에 인색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그러다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전당포 노파 자매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처럼 어느 날 문지기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 살인은 도스토옙스키 사후의 일이므로 『죄와 벌』과는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다.
불확실한 내용이 많아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아버지 도스토옙스키의 전기를 쓰기도 한 딸 류보피는 “도스토옙스키가의 사람들은 모두 극도의 신경쇠약증이었다”고 했다.
벌판을 보고 있는 도스토옙스키 동상
전시물에 대한 설명을 다 들은 후 별채에서 나와 근처의 도스토옙스키 동상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가는 도중에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함께 앉아 차를 마시던 나무 그루터기들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도스토옙스키 가족이란 아버지 미하일과 어머니 마리야 그리고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어린 자녀들을 말한다.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단란하게 차를 마시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그려졌다.
잠시 더 걸으니 동상 뒷면이 보였다. 동상은 너른 벌판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앉아 있는 형상이다. 페트로바 씨는 동상의 시선은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모스크바에서 다로보예로 들어오는 길 쪽에 맞춰져 있다고 했다. 동상은 작지 않았으나 기단이 낮아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기단을 낮게 한 것은 ‘서민과 함께한다’는 의미란다.
동상의 뒤쪽으로는 도스토옙스키가 어릴 적 뛰어놀던 오래된 숲이 있다. 페트로바 씨는 우리를 숲속으로 안내해 도스토옙스키가 숨바꼭질을 했다는, 아래 줄기가 움푹 팬 큰 나무도 보여주었다. 숲에서 나와 다시 동상 쪽으로 갔다. 멀리 넓은 농토 저 너머에 보이는 숲이 체레모슈냐 숲이라고 했다. 도스토옙스키 아버지 미하일이 숨진 채 발견된 곳이 그 근처 어디일 것이다. 다로보예와 체레모슈냐는 붙어 있는 땅이 아니고 2km가량 떨어져 있다고 했다. 이어 엘레나 페트로바 씨는 우리를 단편소설 『농부 마레이』의 현장으로 안내했다. 동상이 바라보고 있는 쪽에서 조금 왼쪽 방향으로 나아갔다. 동상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농부 마레이』의 추억
『농부 마레이』는 1876년 2월 <작가일기>에 실린 짧은 단편이다. 내용상으로는 에세이에 가깝다. 시베리아 옴스크 유형소에 있을 때인 29살 무렵으로, 그곳에 들어간 첫해인 1850년 봄으로 추측된다. 부활절 주간이어서 유형소에서도 죄수들에게 다소 관대해지는 기간이었다. 술을 마시거나 추잡한 노래를 부르고 욕설과 말다툼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침상 밑에서 몰래 도박판을 벌여도 눈감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유형수들의 숨통을 터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부활절 주간 둘째 날, 폴란드 정치범 M-쯔끼가 “나는 이 강도들이 싫다”고 낮은 목소리로 씹듯이 말하면서 도스토옙스키의 옆을 지나갔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말을 들은 후 수용소 나무 침상에 돌아와 벌렁 누워서 머리 밑에 팔을 베고 눈을 감았는데, 문득 20년 전 9살 적 다로보예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도스토옙스키는 9살 적이라고 했는데, 도스토옙스키 아버지가 영지를 산 것은 도스토옙스키가 10살 때이고 도스토옙스키가 가족들과 같이 여름을 보내려 이곳에 처음 온 것은 11살 때이므로 나이를 아무리 줄여도 11살 때라고 해야 할 것이지만, 이 글은 형식상 단편소설이므로 굳이 따질 일은 아니다). 버섯을 따려고 숲속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깊은 정적을 깨고 “늑대가 온다”는 고함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도스토옙스키는 두려운 나머지 똑같이 “늑대가 온다”고 비명을 지르며 근처에서 말을 몰며 밭을 갈고 있던 ‘마레이’라는 이름의 농부에게 달려갔다. 마레이는 도스토옙스키 영지의 농노였다. 50살쯤 된 마레이는 키가 컸으며 빽빽이 자란 밤색 턱수염을 갖고 있었다. 어린 도스토옙스키는 달려가서 한 손으로는 그의 쟁기를,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이렇게 전개되는 단편 『농부 마레이』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며 마무리된다.
“어디 보자, 단단히 놀랐구나, 아이고!”
그는 머리를 내저었다.
“괜찮아 얘야, 아이고, 이 꼬마야!”
그는 갑자기 팔을 내밀어서 내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자, 괜찮다니까. 예수님이 너와 함께 있는데 뭘, 십자가를 그어라.”
그러나 나는 성호를 긋지 않았다. 내 입술 끝이 떨리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모습이 특히 더 그를 놀라게 했던 것 같다. 그는 흙이 묻어서 손톱이 까매진 자신의 두툼한 손가락을 살며시 들어서 내 떨리는 입술을 만졌다.
“자, 자, 얘야.”
그는 나에게 어머니 같은 넉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느님, 이걸 어쩌면 좋아, 아이고!”
나는 마침내 늑대란 없으며 내가 들었던 ‘늑대가 온다’는 고함 소리는 환청이었음을 납득했다. 그렇더라도 그 고함 소리는 너무나 분명했다. (…)
그런데 갑자기 20년이 지난 뒤에 그 시베리아 땅에서 그때의 만남이 그토록 선명하게, 그리고 그토록 세세한 장면까지 떠오른 것이다. 요컨대 그 만남이 내 마음속에서 자신도 모른 채로 잠자고 있다가 그래야 할 때에 불현듯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생각났다는 얘기다. 가엾은 농노의 그 어머니 같은 부드러운 미소가, 그리고 그가 성호를 긋던 모습이, 머리를 흔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
그것은 빈 들판에서 이루어진 둘만의 만남이었다. 하지만 오로지 신만은 이 일자무식한 러시아 농노—당시에는 자신의 자유의 가능성을 기대하지도 못했을뿐더러 짐작조차도 못하던(*러시아에서 농노해방 선언은 이때부터 약 30년 후인 1861년에 있었다)—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깊고도 고상한 인간의 감정을, 그리고 섬세하고 여성스럽기까지 한 그 부드러운 마음을 저 높은 곳에서 보고 있었을 것이다. (…)
그러고 나서 침상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갑자기 내가 이 불행한 인간들(*수용소의 농노 출신 유형수들을 일컬음)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음을 문득 느꼈던 것이 기억난다. 또한 나의 모든 적의와 분노가 내 가슴속에서 마치 기적처럼 사라져버렸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마주치는 얼굴들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걸어갔다. 머리를 깎이고 얼굴에 낙인이 찍힌 이 농부들, 술 냄새를 풍기면서 목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이 저주받은 농부들, 이들 역시 마레이와 똑같은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날 저녁 나는 또 한 번 M-쯔끼를 만났다. 불행한 사람! 그에게는 나의 마레이와 같은 추억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나는 강도들이 싫다!’라는 시선으로밖에는 이 농부들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아니, 폴란드인들은 그 당시에 우리보다 더한 고생을 겪고 있었다!
(『영원한 남편 외』 중 ‘농부 마레이’, 정명자 옮김, 열린책들, 2010)
이 단편은 도스토옙스키가 어린 시절 자기 집 농노에 대해 가졌던 기억이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만난 농노 출신의 거친 유형수들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폴란드인 정치범들의 러시아 농노 출신 죄수들에 대한 감정을 못마땅해하면서….
엘리엇의 시구(詩句)가 떠오르게 한 풍경
어린 도스토옙스키가 밭을 갈던 농부 마레이를 만났을 것으로 짐작되는 넓은 밭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군데군데 제법 두껍게 쌓여 있었다. 그 같은 자연의 모습 속에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문득 T. S. 엘리엇 <황무지> 속의 시구 ‘4월은 잔인한 달~’이 떠오른 것이다. 엘리엇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 것이 단지 자연을 표현한 것이었다면 벚꽃과 목련, 개나리, 진달래가 만발하는 한국의 4월 풍경에서는 그 뜻을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막 동면에서 깨어나려는 눈 섞인 4월 초순 러시아의 축축한 검은 대지 위에서는 그 시구가 그럴듯하게 다가왔다.
그러면 4월의 잔인함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22년에 발표되었다. 산업화와 전쟁으로 황폐해진 인간의 모습을 그린 시라고 한다. ‘잔인한 달’이라는 구절에 대해 흔히들 ‘망각과 무지 속에 안주하고 싶은 인간에게 봄은 새 생명의 움틈과 같은 새로운 자각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봄은 가장 잔인한 계절이다’라고 해석한다. 해석은 그럴듯하지만, 얼른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런가 하면, 약하디약한 생명들이 겨우내 얼었던 땅을 뚫고 세상에 나오는 것을 작가가 ’잔인하다’고 표현했다는 해석도 있다. 위대한 시인의 언어를 어찌 쉽게 풀이하겠는가. 우리는 다로보예를 그렇게 둘러본 후 엘레나 페트로바 씨를 자라이스크 크렘린까지 다시 차로 잘 모셔다드리고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다음 호에 계속)
아들을 죽인 러시아의 황제 아버지들
러시아 역사를 보면 잘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다. 자기가 너무 잘났기 때문에 아들이 시원치 않아 보이는 모양이다. 조선 시대에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무 견제 장치도 없는 전제 체제에서는 설령 자식이라고 하여도 군주에게 잘못 보이면 목숨을 보존할 수 없다. 주위에 그 자식을 변호해줄 사람도 없다. 누가 절대 권력자인 황제에게 싫은 소리를 하겠는가?
지난 호에 자신의 쇠지팡이로 황태자를 직접 때려죽인 폭군 이반 뇌제(1530~1584)를 그린 일리야 레핀의 역사화 ‘이반 뇌제와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로 일컬어지는 표트르 대제(1672~1725) 역시 아들을 죽인 아버지 황제였다. 그때의 역사적 상황을 그린 그림을 소개하기에 앞서 지난 호에서 마치지 못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바실리 페로프 그림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다.
망자의 이별
‘망자의 이별’(1865년 작)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17번 전시실의 ‘트로이카’ 바로 옆에 전시된 작은 화폭의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도 ‘트로이카’에서처럼 그 시대 러시아 민중의 짙은 슬픔이 느껴진다. ‘트로이카’에서 추위 속에 물통을 힘겹게 끄는 세 어린이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기도 한다. 국내 책자에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여행’ 등으로 번역되어 있기도 한데, ‘망자의 이별’이 원뜻에 가까운 번역이다. 이 그림은 추운 겨울날 죽은 아버지를 매장할 곳을 향해 관을 실은 허름한 말썰매를 타고 가는 어린 남매와 어깨가 축 처진 아이들 엄마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두 남매를 데리고 살아가야 할 앞날을 생각하면서 깊은 근심 속에 남편을 매장하러 가는 엄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 앞을 바라볼 여유도 없다.
상인의 집에 도착한 가정교사
페로프의 작품 ‘상인의 집에 도착한 가정교사’(1865년 작)도 당시의 사회 풍속도다. 돈 많은 상인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는 가냘픈 젊은 여성이 거드름을 피우며 문 앞에 서 있는, 비싼 벨벳 가운을 입은 뚱뚱한 상인 앞에 잔뜩 주눅이 든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야단맞는 학생처럼 서 있다. 당시에는 몰락한 귀족의 자녀나 고학생들이 부유한 상인의 집 등에서 가정교사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페로프는 사생아였다. 아버지는 귀족이었으나 작위는 물론 성도 물려받지 못했다. 공식 문서에는 대부의 이름을 따서 바실리예프라는 성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미술학교에 다닐 때부터 사람들이 그를 페로프라고 불렀다. ‘페로’는 러시아어로 펜이란 뜻이다. 그가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그의 선생이 붙여준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도 이 별명을 좋아해 이름으로 굳어졌다. 그의 태생과 인생이 그러해서인지 페로프는 소외된 러시아 민중의 삶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그것을 자신의 화폭 속에 많이 담았다. 그는 당시 예술가의 사명에 충실했던 작가였다. 1882년 48세로 생을 마쳤다.
아들을 죽인 표트르 대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1917년 300년 만에 막을 내린 제정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군주로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다. 그는 낙후된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엄청난 유럽식 개혁을 추진했고 유럽에 다가가기 위해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기까지 했다. 1703년 표트르 대제가 발트해에 면한 네바강 하구에 새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도록 명령하자 많은 세습 귀족들이 반발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는 자기가 마음먹은 일을 철회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천도를 강하게 밀어붙여 1713년 마침내 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이전했다.
불만 세력이 황태자 알렉세이(1690~1718)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황태자 알렉세이는 표트르 대제가 버린 첫 황후 예브도키야 로푸히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의 생모를 수도원에 유폐한 데 대한 반감이 컸다. 그 같은 반감 때문인지 알렉세이는 아버지 표트르 대제의 개혁 정치에 대해서도 늘 불만을 갖고 있었다. 대제는 알렉세이가 후계자 수업을 게을리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특히 군사 업무에 무관심한 데 대해서는 분개하기까지 했다. 알렉세이는 아버지와 달리 신체적으로도 허약했고 명석하지도 못했다. 사치스러운 면도 있었다.
표트르 대제는 알렉세이에게 “후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황태자의 자리를 박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는 건강도 좋지 않고 황제의 재목이 못 되니 후계권을 거두어달라고 아버지에게 요청한 일도 있다. 아들을 늘 못마땅해하던 표트르 대제는 알렉세이에게 후계자 수업을 잘 받지 않으려면 차라리 수도승이 되라고 했다. 그는 속으로 아들을 수도원에 유폐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1716년 어느 날 아버지를 피해 오스트리아로 도피했다. 아버지는 이 같은 도피를 왕권 찬탈을 위한 음모로 여겼다.
표트르 대제, 후계자를 못 정하고 죽다
대제는 추밀원 총독 톨스토이 백작을 시켜 오스트리아에 있는 알렉세이를 설득해 러시아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알렉세이는 돌아오자마자 황태자 지위를 박탈당하고 감금 상태가 됐다. 아버지가 직접 아들을 심문했다. 공모자를 대라고 했고 형리들에게 알렉세이를 고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문은 가죽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었다. 두세 차례 가혹한 매질이 가해졌고 알렉세이는 1718년 6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감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표트르 대제는 알렉세이가 죽기 이전부터 또 다른 후계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알렉세이가 죽기 3년 전인 1715년 리투아니아 농노 출신의 마르타 스카브론스카야와 결혼해 낳은 아들 표트르(*러시아에는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경우가 흔하다)가 있었다. 이 여인은 뛰어난 미모에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려서 결혼한 남편이 있었으나 전쟁터에서 표트르를 만나 그의 정부(情婦)가 됐고 이름도 예카테리나로 바꿨다. 그녀는 1712년 표트르 대제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황후 대관식까지 치렀다. 알렉세이가 그처럼 비참하게 죽고 난 후 표트르 대제는 예카테리나에게서 난 새 아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후계자 문제는 그의 희망대로 되지 않았다. 알렉세이가 죽은 다음 해인 1719년, 4살짜리 새 후계자도 죽고 만 것이다. 표트르 대제는 예카테리나에게서 열 명쯤 아이를 낳았는데 모두 어려서 죽고 딸 둘만 남았다.
그는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죽었다. 혼돈이 계속되다가 황후 예카테리나가 차르가 되었다. 그녀는 제정 러시아의 여황제 시대를 연 첫 번째 인물이 됐다. 역사화 ‘알렉세이 황태자를 심문하는 표트르 대제’는 니콜라이 게(1831~1894)가 1871년에 그린 작품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들 알렉세이를 쏘아보는 아버지의 눈매가 매섭다. 부자지간의 따스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정치가 뭐고 권력이 뭔지, 잘난 아버지를 만난 불행한 아들의 모습을 니콜라이 게가 사건이 난 지 한 세기 반이 더 지난 후 상상력을 동원해 그린 것인데, 당시의 상황을 실감 나게 잘 표현해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