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다로보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유명한 시인 T. S. 엘리엇(1888~1965)이 쓴 시의 한 구절이다. 도스토옙스키가 10대 시절 농촌 생활의 추억을 갖고 있는 그의 옛 가족 영지 다로보예에 갔을 때 문득 엘리엇의 그 시구가 생각났다. 눈이 채 녹지 않은 드넓은 검은 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찌푸린 날씨 속에 진눈깨비가 오는 듯 마는 듯 내렸다. 흔히 4월의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종종 이 시구에 빗대어 이야기하는데, 역사적 사건만을 갖고 보면 어찌 4월만 잔인하겠는가? 그럼에도 4월이 되면 사람들은 언제나 이 독특한 시구를 곧잘 떠올린다. 4월을 상징하는 말처럼. 이 구절은 엘리엇의 유명한 시집 <황무지>의 ‘죽은 자의 매장’이라는 긴 시의 맨 앞에 나온다.
죽은 자의 매장
- T. S. 엘리엇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황무지, 황동규 옮김, 민음사, 1995>
다로보예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을 향해 모스크바를 떠난 것은 우리나라의 식목일인 2019년 4월 5일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예약제 박물관
아침 7시, 출발할 때부터 조금 흐린 날씨였다. 그런데 다로보예로 다가가면서 자동차 앞 유리에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 그냥 비가 아니고 눈이 섞인 진눈깨비였다. 모스크바의 동남쪽에 위치한 다로보예는 지도상의 거리는 188km이지만, 모스크바 어디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 거리가 많이 다르니 약 200km 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과거에는 톨스토이의 영지가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처럼 툴라주(州)에 속해 있었지만, 지금은 모스크바주에 속해 있다. 박물관과의 약속은 오전 11시로 되어 있었다. 4시간 앞서 출발한 것이다. 도로가 나쁘지 않아서 승용차로 4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는 아니지만, 아침 시간 모스크바의 교통 체증을 감안해 조금 일찍 출발한 것이다. 가는 도중 주유소 편의점에서 핫도그를 아침으로 먹었다. 11시에 다로보예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을 관리하는 자라이스크 역사문화 박물관 사무실에서 해설사를 만나 함께 다로보예 옛 도스토옙스키 영지에 있는 박물관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차는 방문자가 제공해야 한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박물관인 셈이다. 방문객이 많지 않아 늘 지키고 있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 사무실에서 다로보예 영지까지는 차로 20분가량 걸린다. 자라이스크에 도착하니 11시 10분 전이었다.
사무실 건물은 자라이스크 크렘린(*러시아의 성곽을 크렘린이라고 한다) 안에 있었다. 돌로 된 높은 성곽은 견고해 보였다. 차를 성문 앞에 주차한 후 아치형 성문으로 들어가니 전면에 황금빛 돔의 정교회 성당이 저만치 보였고 성문 안 바로 오른쪽의 달걀색 건물에 박물관 사무실이 들어 있었다. 크렘린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러시아에서 가장 작은 크렘린이 자라이스크 크렘린이란다. 러시아의 오래된 옛 도시들에는 거의 크렘린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잘 아는 모스크바의 크렘린이다. 러시아어 발음으로는 ‘크레믈’이다. 몇 년 전 톨스토이의 옛 영지가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에 갈 때도 툴라 크렘린에 들른 적이 있는데, 자라이스크 크렘린보다 훨씬 컸다.
유해 없는 도스토옙스키 아버지 묘소
박물관 예약은 동행한 박정곤 전 고리키 문학대학 교수가 했다. 박 교수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살집 좋은 중년 여인과 함께 나왔다. 해설사 엘레나 페트로바(Elena Petrova) 씨였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성문 앞에서 차가 출발했고 엘레나는 우리를 먼저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 미하일의 묘소가 있는 모노가로보 성당으로 안내했다. 성당은 보수 공사 중이었다. 보수를 위해 세워놓은 비계에 도스토옙스키 부모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러니 마치 도스토옙스키를 기리기 위해 보수 중인 것처럼 보였다. 성당 규모는 크지 않았다. 묘소는 성당 바로 앞에 있었다. 엘레나 페트로바 씨는 “묘소에는 유해가 없으며, 유해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가묘인 셈이다. 페트로바 씨는 “아버지 미하일의 유해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10년 전쯤 세워놓은 묘소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리(나와 박정곤 교수)는 어리둥절했다. 왜 그렇게 됐을까?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는 다로보예 영지를 1831년에 샀다. 다음 해인 1832년에는 약 2km 떨어진 체레모슈냐 땅도 샀다. 다로보예 영지에는 농노 20가구 정도가 살았다. 1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체레모슈냐는 이보다 작았다. 도스토옙스키 가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페트로바 씨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먼 조상은 타타르(*몽골계) 핏줄이며, 오래전에 폴란드에서 살다가 다시 러시아로 들어와 벨라루스에 살았다.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 미하일은 벨라루스 도스토예프에서 태어났으며 성직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우크라이나로 가게 되어 그곳에서 성장했다. 미하일도 부친의 뒤를 이어 성직자가 되려고 신학교에 갔다가 진로를 바꿔 1809년 모스크바의 황실 의학 아카데미에 진학했다. 그 후 1812년 나폴레옹 전쟁 때는 군의관으로 복무했고, 전쟁 후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빈민 구제 병원에서 일했다. 제법 큰 규모의 병원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병원에 딸린 의사들의 숙소 건물에서 1821년 차남으로 태어났다. 한 살 위의 형 미하일(*아버지와 이름이 같은데 이는 러시아에서 흔한 일이다)이 있었고, 도스토옙스키 다음으로 다섯이 더 태어났다. 모두 7남매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어릴 적 농촌 생활의 추억
도스토옙스키 가계가 정말 귀족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도 있다. 페트로바 씨의 설명으로는 원래 귀족이었는데 서류상으로 증명하지 못하다가 1828년에 증명이 돼 공인을 받게 되었고, 아버지 미하일이 그동안 열심히 모은 돈으로 3년 후 다로보예의 영지를 사들인 것이라고 했다. 귀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처음 몇 해는 여름이면 가족이 모두 이곳에 와서 즐거운 전원생활을 누렸다. 도스토옙스키는 50대 중반인 1876년에 쓴 그의 단편소설 『농부 마레이』에서 이곳에서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즐겁게 회상한다.
“나는 호두나무 가지를 꺾어서 개구리를 잡을 회초리를 만들고 있었다. 호두나무는 자작나무처럼 단단하지는 않았지만 참으로 예뻤다. 또한 작은 곤충과 풍뎅이들도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나는 이들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상당히 근사한 것들도 있었다. 나는 또한 주홍색 바탕에 까만 점이 있는 작고 잽싼 도마뱀도 좋아했다. 뱀은 무서웠지만 그것과 마주치는 경우는 도마뱀보다 훨씬 드물었다. 이곳에는 버섯이 거의 없었다. 버섯을 따려면 자작나무 숲속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나는 그리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일생 동안 내가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것은 버섯과 산딸기가 자라고 작은 벌레들이랑 새들 그리고 고슴도치랑 다람쥐들이 살고 있는 산이었다. 나는 썩은 나뭇잎들의 축축한 향기가 너무도 좋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우리 마을의 자작나무 숲에서 나는 향기가 느껴진다. 이런 인상들은 온 생애에 걸쳐서 남을 것이다.”
그런데 영지를 산 지 6년 후인 1837년 2월 어머니 마리야가 폐결핵으로 사망한 후 집안 분위기가 갑자기 변했다. 아버지는 이해 5월 장남 미하일과 차남 표도르(도스토옙스키)를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데려가 중앙 공병학교 입학을 목표로 한 기숙학교에 들여보냈다. 아버지는 그 후 7월 1일 자로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병원을 퇴직한 후 바르바라와 베라 등 어린 두 딸을 데리고 다로보예로 들어갔다. 이해 9월에 두 형제가 공병학교에 응시했으나 형 미하일은 신체검사에 불합격되었고, 도스토옙스키만 합격했다. 아버지는 다로보예로 들어간 후 부인을 잃은 슬픔에 영지에서 들어오는 수입도 시원치 않아 술에 취해 지내는 일이 잦아졌다. 성격마저 변해 농노들을 심하게 다뤘다고 한다. 그는 1839년 6월 체레모슈냐 숲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공식 사인은 뇌졸중인데, 농노들을 가혹하게 대하다가 그들에게 목 졸려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묘소가 없어졌을 가능성
도스토옙스키는 죽기 4년 전인 1877년에 다로보예를 방문했는데 이때 모노가로보 성당 묘지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둘러봤다. 박물관의 기록에는 도스토옙스키 영지는 아버지가 죽은 후 둘째 여동생 베라가 소유했고, 그 뒤 그녀의 딸인 마리야가 관리하다가 소유권이 소멸됐다. 20세기 들어와서 소유권이 없어졌다면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귀족과 지주의 땅과 재산이 몰수될 때 그렇게 됐을 것이다. 혁명 후 러시아에서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하여 많은 성당이 파괴되고 종교 활동이 탄압을 받았으므로 이때 성당 묘지도 관리하는 사람 없이 내버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묘지의 표지가 뒤죽박죽이 되었다면 쉽게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 아버지의 유해를 찾고 있다는 얘기 같았다. 도스토옙스키 아버지 묘지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다시 차를 타고 다로보예로 향했다. 도중에 작은 호수를 지나게 되었는데, 4월 초순인데도 호수 전체가 아직 녹지 않은 채 얼음에 덮여 있었다. 아직도 밤이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호수도 다로보예 영지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다로보예의 도스토옙스키가(家) 옛 영지를 다녀온 다음 날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을 찾아갔다. 바실리 페로프(1834~1882)가 그린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 등을 보기 위해서였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러시아 미술의 진수들이 전시되어 있는 러시아 미술의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책에서만 보던 러시아의 유명한 미술 작품들을 마주할 설렘 속에 줄을 섰다.
삼엄한 검색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오전 10시에 문을 연다. 2019년 4월 6일 토요일이었던 이날, 개관 20분 전쯤 도착했지만 관람객의 줄이 이미 담 밖으로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 미술관은 줄을 서서 티켓을 먼저 산 후 들어가는 게 아니고 줄을 서서 검색대를 통과한 다음 티켓을 사도록 되어 있다. 검색이 우선이라는 이야기다. 검색대는 공항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검색대를 통과하니 들고 간 트렁크를 열어보라고 했다. 귀국하는 날이어서 트렁크를 가지고 갔었다. 이전에는 검색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검색을 철저히 하는 듯했는데 이유가 짐작은 되었다.
한 해 전에 이 미술관에서 큰 사건이 하나 있었다. 2018년 5월 이곳에 전시되어 있던 일리야 레핀(1844~1930)의 유명한 작품인 ‘이반 뇌제와 아들’(1885년 작)을 한 술 취한 30대 남성이 금속 봉으로 훼손해서 난리가 났었다. 취객은 전시장을 돌아다니다 관람객 접근 방지용 금속 봉으로 작품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작품이 3군데 이상 찢어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림 속 이반 뇌제의 얼굴과 손 부분은 손상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그림은 러시아 미술사에서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주의 회화의 세계적 걸작으로도 꼽힌다. 범인은 처음에는 술에 취해 저지른 짓이라고 진술했으나 나중에 법정에서는 진술을 바꿨다. 술에 취해 그런 것이 아니라 이반 뇌제(1530~1584)가 황태자를 때려 숨지게 한 사실을 그린 그림을 걸어놓으면 외국인들이 러시아의 황제를 뭐라고 여기겠느냐면서 그걸 막기 위해 자신이 그렇게 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1913년에도 정신병을 앓고 있던 사람의 공격을 받았으나 당시에는 일리야 레핀이 살아 있어 그가 직접 복원했다.
폭군의 역사화인 레핀의 ‘이반 뇌제와 아들’
이반 뇌제는 역사상 폭군으로 유명한 제정 러시아 최초의 차르다. 성질이 나빴던 그는 1581년 어느 날 임신한 황태자비의 옷차림이 단정치 않다고 마구 때려 며느리가 유산하게 만들었다. 이에 황태자 이반이 아버지에게 항의하자 차르는 불같이 화를 내며 쇠 지팡이로 아들을 사정없이 내리쳤다(*이반 뇌제가 아들을 살해한 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대체로 위의 이야기가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들이 얼굴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반 뇌제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아들은 결국 3일 후 죽고 말았다. 3년 후인 1584년 이반 뇌제가 죽고 둘째 아들 표도르가 황위를 계승했으나 그가 1598년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바람에 이후 오랫동안 혼돈의 시대가 이어졌다.
일리야 레핀은 이러한 역사의 이야기를 소재로 ‘이반 뇌제와 아들’을 그렸다. 그림 속에서 이반 뇌제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아들을 끌어안고 정신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쳐다보는 표정 묘사가 일품이다. 매우 생생해서 보는 이들을 전율케 한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명작 중 하나인데, 훼손된 부분의 복원을 위해 옮겨놓는 바람에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페로프가 그린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은 물론, 유명한 러시아 문인들의 초상화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러시아 국민 시인 푸시킨, 러시아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대표적인 초상화가 여기에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는 17번째 전시실에 있었다. 바실리 페로프가 1872년에 그린 것이다. 오랫동안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다. 초상화는 ‘트로이카’ ‘망자의 이별’ 등 페로프의 다른 명작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초상화는 도스토옙스키가 4년간의 유럽 방랑을 청산하고 돌아온 다음 해인 1872년 5월에 완성됐다. 완성됐다고 하는 까닭은 이 그림이 그 전해인 1871년 말부터 그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초상화에 대해서 여러 해설이 있지만 미망인 안나의 회고록에 적힌 기록이 좀 더 사실적이어서 지난 1월호(2019년)에 이어 다시 인용한다.
초상화에 대한 안나의 회고
“그해(1871년) 겨울에는 모스크바의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이자 미술관 소유주인 트레티야코프가 남편에게 미술관에 소장할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를 위해 유명한 화가인 페로프가 모스크바에서 왔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 일주일간 그는 매일 우리를 찾아왔다. 페로프는 그야말로 다양한 정서 상태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도스토옙스키)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논쟁을 유도하면서 남편의 얼굴에서 가장 특징적인 표정을 포착해냈다, 그것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예술적 사고에 몰입해 있을 때의 표정이었다. 페로프는 ‘도스토옙스키의 창작 순간’을 초상화에 붙박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의 서재에 들어갔다가 그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떠오른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마치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을 때는 아무 말 없이 서재를 빠져나오곤 했다. 나중에 이야기하다 보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자기 생각에 완전히 빠져서 내가 들어온 것도 눈치 채지 못했고, 내가 자기 방에 다녀갔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페로프는 똑똑하고 친절한 사람이어서 남편은 그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참석했다. 페로프에 관해서는 정말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
트로이카
트로이카는 러시아어로 숫자 3을 의미하지만 흔히 삼두마차, 즉 3마리의 말이 끄는 러시아 특유의 썰매나 마차를 뜻한다. 3인조를 의미하기도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를 그린 페로프의 대표작 중 하나가 ‘트로이카’(1866년 작)다. ‘트로이카’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17호실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같은 벽면에 있었다. 10세 전후의 세 어린이가 추운 겨울날 아침에 힘겹게 물동이를 실은 썰매를 끌고 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뒤에서 아이들의 아버지인지도 모를 어른 하나가 온 힘을 다해 밀고 있다. 19세기 중반 러시아 민중의 힘든 삶을 그린 그림이다. 당시 화가들은 시대상을 그리는 것을 예술가의 사명으로 알았다.
이 그림 역시 차르 치하 도시 빈민의 한 모습을 담고 있다. 지쳐 보이는 아이들 모습에 ‘짠’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림이 그려진 1866년은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농노해방이 선포된 지 5년 된 해이다. 농노해방으로 농민들이 이전처럼 지주의 소유물 취급은 받지 않아도 되었지만 삶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많은 농노가 도시로 나왔으나 도시 빈민의 수효만 불릴 뿐이었다.
그림 속 어린이들이 도시로 이주한 이전 농노의 아이들인지, 원래 도시에 살던 빈민가의 어린이들인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