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기자는 영화 <무뢰한>(2015)을 보고 '뒤늦게' 전도연에게 입덕했다. 전도연은 극 중 상처 위에 또 상처를 안고 사는 한물간 '술집 여자'를 연기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회색빛 무드인 이 영화에서 전도연은 전도연이 아니라 그저 '회색'일 뿐이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그 어떤 사물보다 그레이 톤을 내며 묵직하게 극을 이끌었는데, 그 연기가 무척이나 깊고 아름다웠다. 강렬했다. 그렇게 완성된 <무뢰한>은 지금도 기자가 꼽는 최고의 한국 영화 중 하나다.
이렇듯 전도연이기에 가능한 영화가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설경구와 함께한 신작 <생일>은 '세월호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이종언 감독이 2015년부터 경기 안산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만난 세월호 유가족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극 중 전도연은 아들을 잃은 상처를 견디며 어린 딸과 살아가야 하는 여자 '순남'을 연기한다. 두 번의 거절과 긴 고민 끝에 선택한 작품이다.
남자 배우를 긴장시키는 여배우
두 번 출연을 고사했다고 들었어요.
세월호 이야기라는 말을 듣고 되물었어요. '지금 세월호 이야기를 하는 게 괜찮아요?' 하고요. 그렇게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펑펑 울었죠. 지인들도 대부분 걱정하며 출연을 반대했을 정도예요. 그도 그럴 것이 세월호 이야기는 여전히 과정 속에 있고,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니까요, 유가족들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도 중요한 문제였어요. 결국 세월호 영화였기 때문에 고사했고, 세월호 영화이기 때문에 용기 낼 수 있었어요.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게 결정적인 출연 이유였죠.
제작보고회 때 유독 긴장한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그 전까지 무서운 시간을 보냈어요. 누군가에게 제가 공격당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심지어 마음속으론 '개봉 안 하면 안 돼?'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예요. 실제로 제작보고회 때 손에 땀을 쥐고 앉아 있었어요. 한데 영화를 만든 우리뿐만 아니라 기자들 역시 조심스러워하는 걸 느낄 수 있어서 조금 안도했어요.
지금 기분은 어떤가요?
촬영이 끝난 뒤 감독님과 진도 팽목항을 다녀왔어요. 매어놓은 리본이 다 빛바랬더라고요. 씁쓸했어요. 우리 모두 잊지 말자고 했지만 어느 순간 희미해졌죠. 그걸 보는데 이 작품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를 홍보하고 있는 지금도 말 한마디가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예요.
엄마 역할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밀양>(2007)에서 자식을 잃은 엄마를 연기한 이후 다시는 비슷한 역할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가깝게 지내는 한 지인이 '네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네가 했으면 좋겠다'고 용기를 주셨어요. "괜찮아, 한번 해봐"라는 한마디가 제게 필요했던 것 같아요.
이번에도 어려운 역할이에요. 어려운 영화에만 출연한다는 시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군말 없이 잘하니까.(웃음) 물론 잘한다고 해서 즐기는 건 아니에요. 다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피하지 않는 거죠. 이번 역할도 어려웠어요. 끊임없이 의심을 해야 했거든요. 내가 '순남'을 표현하는 건지, 아니면 전도연으로 마음이 앞서는지 견제해야 했어요. 그래서 촬영하는 동안 끙끙 앓았어요. 몸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심하게 몸 쓴 적 있어요?'라고 물으시더라고요. 대중은 제가 얼마나 열연했는지 이제 궁금해 하지 않을 거예요. '어련히 잘했겠어' 하는 거죠. 그럼에도 영화적 기대치만은 가져주셨으면 해요.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나요?
'순남'이 아파트 방에서 우는 장면이 부담스럽고 무서웠어요. 시나리오에 명백하게 '아파트가 떠내려가라 운다'라고 적혀 있었거든요. 저는 힘들고 어려운 장면이면 오히려 미리 생각하거나 준비하지 않아요. 대사만 완벽히 외운 상태로 카메라 앞에 나서 자신에게 맡기는 편이거든요. 제가 느끼는 대로 하자고 생각했는데 그 지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무서웠어요. 카메라가 돌기 전까진 계속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촬영에 들어갔죠.
전도연이 해석한 '순남'은 어떤 사람인가요?
영혼 없이 떠도는 유령 같았어요. 이 여자의 삶은 무척 고통스럽죠. 실제로 저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순남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 계속 눈물이 났어요. 어떻게 자식을 키워내는지 잘 알기에 더 그랬죠.
이종언 감독과 인연이 남다르다고 들었어요.
<밀양>을 찍을 때 이창동 감독님의 연출부였고, 당시 저를 '언니', 전 '종언아'라고 부르는 사이였죠. 그랬는데 '저 이런 거 썼습니다, 언니와 하고 싶어요'라며 시나리오를 가져온 거예요. 시나리오를 읽고 바로 '감독님'이라고 불렀어요.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한 존중, 그리고 그에게 힘이 돼 주고 싶었거든요. 저는 신인 감독들과 작업을 많이 한 편인데, 시나리오가 좋으면 믿고 싶은 마음이 커요. 영화는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니까요. 그게 좋은 작품 아닐까요? 그 시작을 나와 같이 했다는 게 정말 좋아요.
설경구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후 18년 만에 만났어요. 그런데 어제 만난 사람처럼 너무 편안한 거예요. 기댈 수 있어서 좋았어요. 뭐랄까, 친정 오빠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때는 오빠에게 남성미가 있다는 걸 몰랐는데, 멋있게 나이 드시는 것 같아요.(웃음)
설경구가 생각하는 전도연은 어떨까.
계속 봐온 사이지만 작품으로 호흡을 맞춘 건 오랜만이라 궁금하다. "에너지가 더 깊어졌어요. 뭐랄까, 툭툭 던지는 말도 다 맞는 '도사' 같다고 해야 할까요.(웃음) 둘 다 대화를 나누며 연기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조율도 연습도 일절 없었어요. 그냥 담담하게 했어요. 서로 믿고 의지했죠."(설경구)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일부러 슬픔에 빠져 있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나름대로 제가 분위기 메이커였답니다. 적어도 (설)경구 오빠가 분위기 메이커일 리는 없잖아요.(웃음) 오빠도 그 나름 뭔가 하려고 했지만, 솔직히 유머코드가…. 그게 설경구식 유머였나 봐요.(웃음)
스크린 복귀는 3년 만이에요.(그 사이 드라마 <굿와이프>(2016)에 출연했다.)
특별히 끌리는 작품이 없었어요. 40대 중반이라는 나이 때문인지 제가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이 애매해진 것 같더라고요. 최근에는 블랙 코미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즐겁고 밝은 작품요.
흥행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도 궁금해요(전도연의 필모그래피에는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없다. 그만큼 쉽지 않은 영화를 선택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최근에 흥행이 저조해 내심 고민이 많았어요.(웃음) 혹시 나 때문인가? 내 연기가 부담스럽나? 하고요.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진 않아요. 단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출연한 영화는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이 있을까 봐 우려되긴 하죠. 그럼에도 전 다양한 장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내 영화에 천만 관객이 들면 세상이 달라 보일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달라지진 않을 거 같아요. 천만 관객 배우라고 해서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바뀔 거 같지도 않고요. 물론 제 영화를 좀 더 많은 사람이 봐줬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긴 하죠.
인터뷰 내내 콧등이 빨갰고, 때로는 활짝 웃었다.
예전보다 편안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46살의 여배우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전도연의 요즘은 잔잔한 듯 보였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평범한 엄마
공백기는 어떻게 보냈나요?
여배우로 화려한 삶을 살기도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저도 그냥 '무수리'예요. 아이 양말을 신기고 간식 챙겨주고 학교 보내고… 보통의 일상을 살지요. 나이가 들면서 간혹 사는 게 무료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었어요. 삶이 늘 즐거울 수만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그렇게 지내다가 문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특별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열심히 일하고 아이와 함께 잠들 수 있는 날들이 참 감사해요.
어떤 엄마인가요?
어렸을 때는 빨리 결혼해서 엄마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엄마가 되기 전엔 저는 뭘 해도 잘할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제가 뭐 하나를 해도 대충하는 성격은 아니잖아요(웃음). 오죽하면 남편이 '너는 다른 직업을 가졌어도 성공했을 거야"라고 하겠어요. 영화 속에서 제가 딸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 있어요. 그 모습이 실제 저와도 닮았어요. 아이에게 화를 내고 밤이 되면 "엄마가 미안해" 하며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스타일이죠.(웃음)
딸이 엄마 영화를 본 적이 있나요?
제가 출연한 영화가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이 많아서 아직 보진 못했어요. 띄엄띄엄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나오면 "엄마 나왔어" 하는 정도죠. 이 작품은 온기 때문에 저에겐 의미가 남달라요. 힘든 상황을 감사함으로 바꿀 수 있는 영화라서 딸과 함께 볼 거예요(그간 딸과 함께 본 영화는 <택시운전자> <신과 함께> <PMC:더 벙커> <극한직업> 등이란다).
여전히 건강한 외모예요.
언젠가부터 체중계에 오르던 습관이 없어졌어요. 가방에 있던 거울도 사라졌지요. 운동 마니아로 알려졌지만 사실 최근 몇 년간은 운동에 집중하지도 않았어요. 그럼에도 조금 핼쑥해 보이는 게 제 일상이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 규칙적인 생활을 해서인 것 같아요. 그래도 거울을 보면 뭔가 예전 같지 않아 슬플 때가 있지요. 방법이 없으니 그저 잘 받아들이려고요.
이번 작품이 전도연의 일상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시사회에 친구들을 초대하지 않는 편인데 이번 영화는 보통 사람들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큰마음 먹고 초대했어요. 워킹맘인 친구가 부랴부랴 퇴근해서 시사회에 왔어요. 영화를 보고선 "매일매일 내 삶은 왜 이렇게 힘들까 생각했는데 이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더라고요. 우리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인 것 같았어요. 저도 그래요. 특별한 것을 바라기보다 작은 것에 감사하게 됐어요. 사실 행복이라는 게 뭔가를 한다고 뚜렷하게 오는 건 아니잖아요. 아이와 우리 가족 모두가 건강한 것,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감사해요.
그녀의 요즘은 잔잔한 듯 보였다. 예전엔 지인들과 술 한잔하면서 영화 이야기하는 게 무척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일조차 노력이 필요하단다. 마음먹고 외출해야 하는데 잘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집에서 막걸리 한잔, 와인 한잔 마시는 게 좋다.
전도연은 인터뷰 내내 콧등이 빨갰고, 때로는 활짝 웃었다. 예전보다 편안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46살의 여배우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