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주지훈은 최근 5년간 소처럼 일하고 있다. 필모그래피가 빽빽하게 채워지는데 비슷한 이미지의 캐릭터는 하나도 없다. 최근엔 절대 악과 맞서고 있다. 선인과 악인의 이야기, 악과 정의의 싸움이라면 평범하겠지만 그 상대가 초능력과 좀비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특별하고 흥미롭다.
주지훈은 초능력을 쓸 수 있는 물건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숨겨진 음모와 비밀을 파헤치는 판타지인 MBC 드라마 <아이템>에서 정의로운 검사 ‘강곤’을 연기 중이다. 높은 시청률을 겨냥하고 만든 작품이라기보다 드라마에서 구현할 수 있는 최대의 스케일과 CG를 보여주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주지훈이 있다.
“<아이템>으로 4년 만에 드라마 촬영을 시작했어요. 처음 대본을 봤을 때 이야기가 재밌었고, 화려하고 스케일이 큰 VFX(시각 특수효과)가 드라마에서 어떻게 구현될지 궁금하더라고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잖아요. 가상과 현실을 어떻게 리얼하게 연결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신과 함께>를 복기했는데, 경험해봤기 때문에 더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은 오만함이더군요. 다만 영화 덕분에 감독님과 이견을 빨리 줄일 수 있었어요. 그건 굉장히 이득이었죠."
극에서 주지훈은 초능력을 이용해 액션을 펼치는데 이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다수와의 격투 신을 소화해야 한 것도 당연했다. 그는 영화에서 CG 효과를 경험한 덕분인지 자연스럽게 연기를 펼쳤는데, 정작 자신은 어려움이 많았단다.
“영화는 완벽한 가상의 공간이라 제약이 없었어요. 그런데 드라마는 현실 공간에서 일어나는 초능력이니까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요. 가짜를 진짜로 믿게 해야 되니까 더 정교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헷갈릴 때가 많아요. 그럴 때일수록 모두 합심해 회의하면서 결과를 만들어야 해요. ‘나는 배우야’라고 고집 피우면 도태돼요.”
주지훈은 그렇게 합심하면서 넷플릭스 <킹덤2>를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죽었던 왕이 되살아나자 반역자로 몰린 왕세자가 조선의 끝으로 가서 굶주림 끝에 괴물(좀비)이 된 이들의 비밀을 파헤치며 시작되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장르물의 대가라 불리는 영화 <터널>의 김성훈 감독이 연출했고, <시그널>의 김은희 작가가 대본을 썼다. 여기에 배두나, 주지훈, 류승룡 등 막강한 존재감과 연기력을 보여주는 배우들이 함께했다. 주지훈은 좀비로 변한 왕과 백성들을 보면서 진실을 파헤치는 왕세자 ‘이창’ 역을 맡았다. 극 초반에는 나약하고 수동적인 인물이지만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조금씩 의지를 갖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킹덤>을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고, 이웃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제작진은 좀비 특유의 질감보다는 세세한 설정에 더 고심했어요. 예를 들자면 우리 드라마에서는 좀비가 인간의 살갗을 물어뜯는 장면이 없어요. 감독님이 직접적인 표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공포감을 줘요. 감독님은 좀비가 공포스럽지만 동시에 불쌍한 존재라고 생각하셨어요. 자신의 의도로 좀비가 된 것이 아니고 먹을 게 없어 인육을 먹고 역병에 걸린 것이니까요. 작품은 연출가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화면이 달라져요. 그런 면에서 <킹덤>은 좀비를 괴물로 보지 않고 우리 이웃이고 부모이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주지훈은 극에서 자신이 맡은 캐릭터 ‘이창’에 대해 왕은 아니지만 백성들이 좀비로 변한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책으로 본 세상이 전부였던 ‘이창’에게 백성들의 굶주림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라고. 캐릭터에 깊이 몰입한 그는 작품에 대한 애정도 남다른데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의 특성상 시청률이나 관객 수와 같은 표면적인 결과물이 없어 시청자 반응을 직접 찾아봤다.
“SNS에 <킹덤>을 검색하고 시청자들이 좋아하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멋없는 모자를 쓴 애들은 목이 잘린다’거나 ‘이 사람들은 신발은 벗는데 모자는 벗지 않는다’ 등의 반응이 재미있더군요. 흥행한 좀비물을 예로 들면서 ‘K–좀비가 대단하다’고 해서 감동받았어요. 또 최근엔 발리로 화보 촬영을 갔는데 현지인 20~30명이 공항에 나와 계시더군요. 어떤 작품을 보고 저를 알게 됐는지 물어보니 <신과 함께>와 <킹덤>을 봤다고 답하셨어요. 이런 경험으로 인기를 체감하는 것 같아요. 자랑 같지만 이 정도면 자긍심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요?”
<킹덤>은 세계 최대 영화 및 TV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인 IMDB(Internet Movie Database)의 인기 TV쇼 부문에서 13위를 차지했다. 방영 시기를 따지지 않고 종영한 작품도 포함해 인기 순위를 매기기 때문에 의미가 더욱 큰 성적이다. 이 같은 인기에 힘입어 할리우드 진출을 꿈꿔도 될 것 같다고 하자 주지훈은 한국 콘텐츠에 자부심이 있다고 답했다.
“할리우드는 꿈의 무대이고 영광스러운 자리예요. 하지만 내가 한국에서 우리 콘텐츠를 더욱 열심히 만드는 것 또한 파급력과 파괴력이 있겠다고 생각해요. 배두나·이병헌 선배나 ‘방탄소년단’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열풍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생겼거든요.”
주지훈은 인터뷰 내내 농담을 곁들이며 솔직하면서도 위트 넘치는 입담을 자랑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그의 유머에 김성훈 감독도 넘어갔다. 김성훈 감독은 하정우를 보러 간 촬영 현장에서 주지훈에게 반해 캐스팅을 생각했다. 연기할 때 나오는 카리스마와 연기하지 않을 때 나오는 유머에 반했다고. 주지훈에게는 키만큼 우뚝 선 카리스마가 있고, ‘이창’이 지닌 시대의 아픔과 슬픔도 있는데, 발칙하리만큼 유머러스하고 발가락까지 장난기가 넘친단다. 주지훈의 그런 매력이 현장의 활력소가 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시즌2 촬영을 시작한 현장 분위기도 더없이 좋다.
“감독님이 시키면 고생스러운 일도 더 잘해내고 싶어져요. 묘한 마력 같은 게 있는 분이에요. 여행길이 고돼도 좋아하는 사람과 가면 즐겁고, 초호화 여행이라도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가면 집에 함께 가고 싶잖아요. 그것과 비슷해요. 감독님은 모든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분이에요.”
그의 이야기는 김은희 작가에 대한 칭찬으로 이어졌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설명하는 능력과 기술에 감탄했단다. 대본을 읽을 때 어렵다고 생각해도 막상 대사를 하다 보면 술술 나온단다.
“작가님은 상황을 잘 만들어놓는 분이에요. 연기하는 사람이나 시청자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황과 문맥, 감정으로 만들어놓으시죠. 시즌1의 ‘떡밥’이 회수되고 새로운 ‘떡밥’이 던져져요. 모든 순간이 폭발하죠. 대본을 읽고 류승룡 선배와 육성으로 놀랐어요. 우리가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잘 전달되고 있다는 생각에 힘을 얻고 있죠.”
정우성, 하정우 형들을 보면서 40대를 준비하고 있어요. 형들은 각자 다른 사람이지만 모두 인간미를 갖고 있어요.
형들을 보면서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인생이 흘러간다는 것을 배웠어요.
‘하나 더’는 없는 인생
주지훈은 최근 3년 사이 그야말로 ‘열일’했다. <신과 함께> 시리즈를 비롯해 <공작> <암수살인>까지 영화만 4편을 선보였다. 그사이 ‘쌍천만’ 배우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영화에 이어 <킹덤>까지 흥행하면서 ‘주지훈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쉬지 않고 작품을 찍는 주지훈. 그런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는 데뷔 초를 떠올렸다.
“<궁>으로 연기를 시작했는데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한동안 쑥스러워 재방송도 못 볼 정도였는데 되돌아보면 ‘그 나이, 그 시절에만 할 수 있는 장르인 청춘물에 더 출연해볼걸’이라는 생각을 해요.”
당시 그는 연기력 논란에 휩싸여 마음고생을 꽤 했다. 모델로 활동하며 연기 학원을 다니던 중에 우연히 <궁>에 캐스팅돼 데뷔했는데, 별다른 고민이나 생각을 하지 않고 연기했기에 논란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모델로 활동할 때 매니저 형이 조용히 어디를 가자고 하더군요. 그때 만난 분이 카메라 감독님이었어요. 웃고 떠들다가 연기를 해보라고 하시기에 즉석에서 영화 <유령> 속 정우성 선배 대사를 연기했죠. 대사를 하다가 눈이 아파 눈물이 흘렀는데 ‘왜 그러냐?’고 물으시기에 창피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감독님은 제가 감정을 갈무리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이를 계기로 캐스팅돼 아무것도 모른 채로 촬영 현장에 떨어진 그는 ‘욕’을 먹으며 연기를 배웠다.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혼자 힘들어했다.
“얼마 전 우연히 <궁>을 다시 봤는데 그때의 주지훈을 쓰다듬어주고 싶었어요. ‘그래. 녀석, 고생했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죠. 그 드라마 속의 저는 귀엽고 풋풋한데 한편으로는 애달파요. 혼자 힘들어했던 시간이 안쓰럽고요. 그러다가도 잔주름 하나 없는 얼굴을 보면서 감탄해요. 그때 저는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아기인 것 있죠.”
지금의 주지훈이 안쓰러워했던 20대의 주지훈은 연기력 논란을 벗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그러다가 그를 영화에 푹 빠지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사실 저는 영화를 챙겨 보지 않는 편이었는데, 어느 날 인터뷰를 하며 저의 부족함 때문에 창피함을 느꼈어요. 기자님이 저를 보고 어느 작품 속의 배우 같다고 하셨는데 영화를 보지 않아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그때부터 DVD로 영화를 찾아 보기 시작했어요. 상업 영화, 칸 수상작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찾아 봤죠. 그러다 보니 취향이 한쪽으로 집중되기도 했는데 지금은 밸런스를 맞췄어요.”
이 같은 시행착오는 주지훈의 필모그래피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그의 연기 스펙트럼은 상상을 초월한다. 마음의 상처를 지닌 과자점 사장(<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2009)이었다가, 다혈질인 노비(<나는 왕이로소이다>, 2012)가 됐다. 또 살아남기 위해 혈안이 된 나쁜 놈(<아수라>, 2016)이 되더니 아예 연쇄 살인마(<암수살인>, 2018)가 되고 저승사자(<신과 함께>, 2017~2018)가 됐다. 맡는 캐릭터마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새로움을 보여주는 그는 함께하고 싶은 감독님과 연기하고 싶은 대본이 끊이지 않으니 연기를 멈출 수 없단다. 30대에 할 수 있는 것은 미루지 않고 다할 작정이다.
“20대 때는 제 삶이 하나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달라요. 인생에 ‘하나 더’ 같은 것은 없어요.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해야 된다는 생각이에요. 달리기보다는 잘 걸어가려고 해요. 잘 맞는 사람들과 재미있게 놀면서요.”
1982년생으로 올해 38세가 된 주지훈은 정우성과 이정재, 하정우를 보면서 다가올 40대를 준비하고 있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단다.
“형들마다 다르지만 공통의 키워드는 인간미예요. 똑같은 사물을 봐도 인간적이고 습관도 인간적이에요. 예전에 저는 피해를 입으면 상대를 미워했는데, 형들은 ‘사람이 어떻게 완벽하겠냐. 보듬어줘라’라고 말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바뀌었어요.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간다고 여기면서 배우고 있어요.”
주지훈은 어떤 것을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다만 해외 미술관에서 본 작품 중에 발길을 잡아끄는 작품을 검색해보면 여지없이 명작이고, 카페에서 나오는 음악이 좋아 검색하면 스테디셀러란다. 그래서 좋다고 느껴지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주지훈 역시 그런 배우다. 그저 끌려서, 좋아서 보게 되는 좋은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