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산한 삶을 살며 러시아 전역과 유럽을 떠돌았던 도스토옙스키. 이 러시아 작가는 좀 불리하다. 일단 도스토옙스키라는 성 자체가 길고 발음하기 어렵고, 그의 소설도 대부분 길다. 어쩌다 접한 사진 속 그의 모습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삼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어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하지만 알고 보면 도스토옙스키만큼 인간적인 휴머니스트가 없다고 석영중 교수는 말한다.
<매핑 도스토옙스키>라는 신간을 발표했는데, 제목부터 이색적입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평생 상당히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았습니다. 러시아 안에서도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나중에는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기도 했고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뒤 유럽 곳곳을 전전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다녔던 지역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의 작품에 반영됐어요. 처음에는 도스토옙스키의 발자취를 지도 위에서 추적한다는 의미로, '지도'라는 뜻의 맵(map)에서 나온 매핑(mapping)이라는 단어를 생각했습니다. '지도 위를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걷는다'는 그런 뜻이었죠.
러시아와 유럽을 잇는 대장정을 어떻게 계획하신 건가요?
2015년 여름방학 때 <죄와 벌>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지명들이 아직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찾아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욕심이 생기더군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해 러시아에 도스토옙스키의 기념관이 여섯 군데 있어 다 가보게 됐고, 카자흐스탄의 기념관도 다녀왔어요. 내친김에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 유럽도 가보자고 마음먹게 된 겁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곳에는 예외 없이 그의 동상과 현판 등이 있는데, 그것을 따라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설렘과 기쁨이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읽기 전부터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어떤 작가인가요?
도스토옙스키를 한두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인간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인간의 모든 선한 점과 악한 점을 다 파헤친 작가'라고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도 인간은 존엄한 존재라고 말하는 작가입니다. 러시아뿐 아니라 유럽 전역을 떠돌아다녔다는 건 그의 삶이 순탄치 않았다는 걸 의미하죠. 도스토옙스키는 신산한 인생을 살면서도 운명을 탓하지 않고 자기 내면을 점검해보면서 삶을 예찬했어요. 힘들어도 살아 있다는 게 좋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줍니다.
이제 여행 이야기를 좀 해볼게요. 여행하다 보면 많은 일이 생기죠?
시베리아 옴스크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에 갔을 때,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기념관에 여권을 두고 온 적이 있어요. 그것도 모르고 하루 종일 여기저기 다니면서 구경한 후 저녁에 호텔로 돌아와 짐 정리를 하다 여권이 사라진 걸 발견했죠. 혹시 모르니 전화라도 해보자 해서 기념관에 전화를 했는데, 직원이 여권을 발견하고는 문도 닫지 않은 채 퇴근을 안 하고 있다는 겁니다. 혹시 밤에라도 찾으러 올까 싶어서요. 타지에서 여권을 잃어버려 막막했는데 정말 감동이었죠. 또 한번은 카자흐스탄의 세메이라는 곳에 있는 기념관으로 갈 때의 일입니다. 세메이는 19세기에는 러시아 영토였지만 지금은 카자흐스탄 영토라 국경을 넘어야 합니다. 군인들이 여권 검사를 하더군요. 무뚝뚝한 젊은 군인이 왜 그곳에 가냐고 물어보는데 저도 모르게 경직돼 쭈뼛쭈뼛하면서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에 간다고 대답했죠. 그 말을 듣자마자 군인이 환하게 웃으며 도스토옙스키 보러 가는 거냐고, 정말 좋은 곳이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그때 깜짝 놀랐어요.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 하나가 사람들의 표정을 환하게 만들고 낯선 이방인과도 금방 친해져 대화가 통하게 만드는 것을 경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여정 중간중간 도스토옙스키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네요.
그래서 도스토옙스키가 더 좋아졌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인상적인 곳이 어디였냐고 물으면 저는 두말없이 옴스크를 흐르는 이르티시강이라고 말합니다. 이 강은 그의 소설 <죄와 벌>과 <죽음의 집의 기록>에도 등장합니다. 시베리아로 끌려간 죄수들이 강가에서 노역을 하다 이르티시강 저편을 보며 자유를 꿈꿨는데, 도스토옙스키 또한 그랬죠. 그 대목이 마음에 와 닿아 여행 전부터 꼭 가고 싶은 장소였어요. 막상 가서 보니 정말 감동이더군요. 30분 넘게 아무 말 없이 강만 바라봤어요. 자유를 상징하는 유유히 흐르는 강과 마침 하늘에 길게 드리워진 먹구름. 말이 필요 없는 장관이었습니다. 제가 원래 사진을 정말 못 찍어 손이 아닌 발로 찍냐는 말을 들을 정도인데, 그 풍광만큼은 남겨놓고 싶어 찍었죠. 놀랍게도 정말 작품 사진이 나왔어요. 이번 책의 편집자도 그 사진을 아주 좋아해 장장 두 페이지에 걸쳐 책에도 실렸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도스토옙스키가 전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인문학의 근본이 바로 보는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물과 현실을 제대로 잘 바라보는 훈련이죠. 한쪽으로 기울거나 삐뚤어지지 않고 올바르게 인생과 사람을 볼 줄 아는 것이 중요한데 바로 도스토옙스키가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던 겁니다. 인간을 제대로 읽으려면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인간을 마음 깊이 사랑하면서 사람을 읽어내다 보면 사회도 읽고, 현실도 읽고,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의 전 작품을 하나로 아우르는 키워드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것도 단순한 사랑이 아닌 실천하는 사랑이죠. 그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이해해야 한다고 했어요. 옆의 사람이 아무리 미워도 다각도에서 그 사람을 계속 알아가려고 하다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뿐 아니라 좋은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요?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향점을 두는 거라고. 사람을 잘 이해하겠다, 더 선하게 살겠다, 더 도덕적으로 살겠다, 사랑을 베풀며 살겠다 하는 지향점을 정하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문학이 사람을 증오하라고 가르칠 수는 없고 나만 잘났다고 가르칠 리가 없죠. 인문학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우리 내면에 그런 선한 욕구가 있다는 겁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물론 책 몇 권 읽는다고 당장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바로 어디에 지향점을 두느냐의 시작인 거죠. 그런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가 2년에 한 번씩 한 학기 내내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는 수업을 합니다. 교양 과목이기 때문에 노어노문학과 학생들만 있는 게 아니라, 정말 학창 시절에 소설책 한 권 읽지 않았다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이 학기가 끝날 때쯤에는 너무 좋았고, 자신의 삶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돼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죠.
처음 도스토옙스키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작품으로 입문하면 좋을까요?
도스토옙스키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도 해맑은 수채화 같은 사랑 이야기를 몇 편 썼습니다. 그중 하나가 <백야>라는 작품입니다. 저도 러시아의 백야를 경험했는데, 해가 지지 않는 밤이 되면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예요. 해가 드문 나라다 보니 해가 지지 않을 때는 다들 잘 수가 없는 거죠. 청춘 남녀가 다 거리로 나와 왁자지껄하고 사랑을 속삭이기도 합니다. 그런 백야를 배경으로 도스토옙스키가 사랑 이야기를 쓴 거죠.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이야기인데 가슴이 짠해집니다. 착한 사랑 이야기예요.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스포일러가 될 거 같네요. 주인공 남자가 연인을 떠나보내면서 "이루어졌으면 좋겠지만, 나는 이런 사랑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참 행복하다"고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정말 눈물 납니다. 이런 작품부터 한 걸음씩 도스토옙스키에게 다가간다면 그가 좀 더 가깝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석영중 교수는…
<매핑 도스토옙스키>의 저자.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슬라브어문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도스토옙스키 문학 강의를 해왔으며, 여러 권의 도스토옙스키 관련 저서와 러시아 문학 작품 역서가 있다.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과 한국슬라브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1999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시킨 메달을, 2000년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번역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