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이 된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아파트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을 떠난(1881년 1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쿠즈네치느이 길 5번지 아파트의 살림집은 지금 박물관이 되어 방문객을 맞고 있다. 아파트 박물관으로 가는 길 입구에는 금빛 돔이 눈에 띄는 러시아 정교회의 블라디미르 성당이 있다.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다니던 성당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숨을 거두기 전에 받은 종부성사도 이 성당의 사제가 와서 했다.
성당 가까운 곳에는 아담한 도스토옙스키 동상이 있는데 모스크바 레닌국립박물관 앞이나 스타라야루사의 동상처럼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앉아 있는 자세다. 도스토옙스키 동상의 모양은 어디나 대개 비슷하다. 허리 펴고 서 있는 자세의 동상은 유형 생활을 한 시베리아 옴스크의 것이 유일하지 않은가 한다. 옴스크의 동상은 걷는 모습이다.
박물관으로 연결되는 길은 폭이 넓지는 않지만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식 개념의 골목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박물관으로 가는 인도 위에는 과일과 야채 등을 파는 노점상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나는 여름과 가을에 이곳에 갔으므로 두 계절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겨울과 봄에도 비슷할 것 같다.
박물관이 들어 있는 베이지색의 석조 아파트 건물은 200년이나 된 것임에도 그렇게 오래된 건물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건물은 삼거리 모퉁이에 있다. 얼핏 보면 4층으로 보이는데 반지하를 한 층으로 보면 5층짜리 건물이다. 도스토옙스키 가족은 이 아파트 2층에서 살았다. 건물 2층의 창문과 창문 사이 벽에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가 이곳에서 1846년에, 또 1878년부터 임종일인 1881년 2월 9일까지 살았다. 여기에서 소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집필했다'라고 새겨진 아담한 대리석 석판이 붙어 있다('2월 9일'은 현재 쓰는 그레고리력의 날짜이며 제정 러시아의 구력인 율리우스력으로 사망일은 1월 28일이다).
박물관 입구는 건물 귀퉁이에 있는데, 아래로 연결된 계단으로 반 층쯤 내려가야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티켓 카운터와 외투 등을 보관하는 곳이 나온다. 아파트 박물관은 그곳에서 실내의 좁은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는데 계단과 계단 중간에 기념엽서와 서적 등을 파는 간이 판매대가 있다.
박물관은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살던 2층의 살림집과 그의 사후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들인 추가 전시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추가 전시 공간에는 주로 사진과 그림 자료 등이 전시돼 있다.
"동영상 촬영은 안 돼요"
추가 전시 공간에 들어갔을 때 내가 스마트폰을 꺼내 동영상을 찍으려 하니 일행을 안내하던 러시아인 해설사가 안 된다고 저지한다. 스틸 사진은 가능하지만 동영상은 안 된다는 것이다. 스틸 사진이고 동영상이고 실내 사진을 일절 못 찍게 하는 야스나야 폴랴나의 톨스토이 저택 박물관에 비하면 그래도 조금 나은 편이다. 톨스토이 저택 박물관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톨스토이와 가족들의 초상화, 그림, 서적, 침대, 소파, 책상 등 전시물이 거의 당시의 진품이기 때문이어서 그렇다는데, 얼른 이해되지는 않았다. 관람객들이 사진 찍느라고 부산을 떨다가 전시물이 손상될까봐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톨스토이 집 박물관인 모스크바의 하모브니키 저택에서는 내부 촬영이 가능했었다. 그러나 사진 촬영에 따른 요금을 별도로 냈다. 러시아의 박물관 가운데는 내부 촬영을 허용하더라도 사진 촬영에 따른 요금을 추가로 받는 곳이 많다.
살림집 공간으로 들어가면 도스토옙스키가 쓰던 모자와 우산 등이 전시된 입구와 장난감 말 등이 전시된 아이들 방, 살림 메모와 주판, 속기 노트 등이 전시된 안나의 방과 식당이 차례로 나온다. 그리고 식당과 서재 사이에 있는 거실로 가면 조명이 비치는 테이블 위에 타원형의 노란색 담배 박스가 놓여 있다.
여기에 딸 류보피가 도스토옙스키 사망 직후에 쓴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아빠가 죽었다. 1881년 밤 8시 45분."
실제 공식적으로 사망 시각은 8시 38분으로 되어 있다. 서재 안의 시계도 8시 38분에 맞춰져 있다. 서재는 맨 안쪽에 소파가 있고 그 앞에 책상이 창문을 마주하고 놓여 있다. 소파는 도스토옙스키의 침대이기도 했다. 푸시킨처럼 도스토옙스키도 소파에서 숨을 거뒀다. 당시 사람들은 소파를 침대 겸용으로 많이 사용했다. 소파 위의 벽에는 도스토옙스키가 좋아했던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성모' 중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부분만을 흑백으로 그린 복제품이 걸려 있다.
미망인 안나, 톨스토이 부인 소피야에게 출판업의 '비밀'을 알려주다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을 떠난 후 안나는 한 해 전에 시작한 '도스토옙스키 서적 판매상'을 접었다. 그러나 남편의 전집을 출판하는 일은 꾸준히 계속했다.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성공적으로 출판해나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안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톨스토이 부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톨스타야(1844~1919) 백작 부인이다.
1885년의 일이다. 소피야는 안나에게, 자기도 남편의 책을 직접 출판하고 싶어 조언을 듣고자 왔다고 했다. 그때까지 출판을 서적 판매상에 맡겨왔는데 인세가 적었다고 했다. 안나는 처음 만난 사이지만 소피야에게 출판과 관련한 많은 '비밀'을 솔직히 말해주었다. 자신이 실패했던 사례들도 말해주고 자신이 낸 책의 광고 샘플들도 주었다. 첫 만남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만남이 이어졌다.
안나는 회고록에서 '정말 기쁘게도 출판인으로서의 내 조언이 유용해 그녀(소피야)의 출판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많은 이익을 남겼다. 그때부터 20여 년 동안 백작 부인은 자신이 직접 백작의 저작들을 출판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적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다. 소피야와 안나(1846~1918)는 나이 차이도 두 살밖에 안 났다. 안나는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백작 부인은 천재적인 자기 남편(톨스토이)의 수호천사였다'고 회고록에 썼다.
안나는 어느 겨울날 모스크바의 톨스토이 저택으로 소피야를 보러 갔다가 톨스토이를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톨스토이가 모스크바에 올 때 머무는 하모브니키 저택이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저택도 지금 톨스토이 박물관의 하나로 개방돼 있다. 이날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의 미망인 안나가 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소피야에게 안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안나는 소피야의 안내로 톨스토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백작은 푸른색 상의를 입고 소파에 앉아 있다가 안나를 반갑게 맞았다. 톨스토이는 안나에게 "이렇게 놀라울 수가 있소. 우리나라 작가들의 아내는 어쩜 이렇게 남편들을 닮았단 말이오!" 하며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안나는 톨스토이의 이 말이 생뚱맞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를 매우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톨스토이는 베개 같은 것으로 가슴을 감싸고 있었다. 당시 톨스토이는 간 질환으로 기력이 쇠한 상태였다. 톨스토이는 생전에 도스토옙스키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안나에게 남편이 어떤 사람으로 마음과 기억 속에 남아 있는지 말해달라고 감동적인 어조로 부탁했다. 안나는 감격에 겨워 이렇게 말했다.
"제 소중한 남편은, 이상적인 인간 그 자체였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지고의 도덕과 종교적인 품성에서 그이는 가장 높은 경지에 달한 사람입니다. 그이는 선량하고 마음이 넓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었죠. 정의롭고 사심이 없으면서도 섬세하고 자비로운 사람이었어요. 세상 누구도 그이 같은 사람은 없답니다! 그 사람의 강직하고도 고결한 심성 때문에 그토록 많은 적이 생겼죠! 남편을 떠난 사람 중에 이러저러한 형태로 남편의 조언과 위로,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나요? 물론 그가 발작을 일으킨 후 몸이 안 좋은 상태거나, 아니면 고통스러운 작업을 하고 있을 때 그를 만나게 되면 그는 엄격한 모습이었겠죠. 하지만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런 엄격함은 순식간에 선량함으로 바뀌곤 했답니다…."
(『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한 나날들』)
톨스토이는 이러한 안나의 말을 듣고 "도스토옙스키는 언제나 내게 진정한 그리스도의 감정으로 충만한 사람으로 생각되었다"고 말했다. 안나는 '이 사람(톨스토이)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로구나' 하고 느꼈다. 안나가 톨스토이를 만난 것은 그 한 번뿐이었다. 그 후 소피야가 야스나야 폴랴나의 영지로 그녀를 여러 번 초대했지만 안나는 '톨스토이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황홀함이 사라지게 될까봐 두려워 가지 않았다'고 회고록에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