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누리느냐의 문제일 뿐 인기를 누리는 것도 배우의 몫이다. 2년 전, 그러니까 드라마 <역적> 종영 직후 만났던 김지석은 드라마 <또 오해영>부터 <역적>, 예능 프로그램 <문제적 남자>의 연이은 성공으로 얻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10여 년 전 시트콤 <논스톱> 이후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며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그였다. 그로부터 2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그는 드라마 <20세기 소년소녀>와 예능 프로그램 <고민 말고 GO>에 출연했고, 최근엔 <톱스타 유백이>에서 안하무인 톱스타 ‘유백’ 역으로 시청자와 만났다. 해보지 못한 캐릭터에 도전했고, 다양한 연기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기대만큼 좋지 않았다. 전작들을 통해 높은 시청률이 주는 에너지와 원동력을 겪어본 김지석에겐 어쩌면 실망스러운 성적표였을 것이다.
“슬럼프요? 에이, 시청률보다 값진 걸 얻었는걸요. 2년 전의 저는 시청률에 민감했고, 그게 전부인 줄 알았고, 또 그것만 좇았어요. 물론 그때의 저도 접니다. 그걸 부인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난 2년 동안 드라마 두 편과 예능 프로그램을 하면서 많은 걸 깨달았어요. ‘시청률이 전부는 아니구나’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구나’라는 깨달음이죠. 그런 의미에서 <톱스타 유백이>는 제게 선물 같은 작품입니다. 많은 걸 깨닫게 해주었으니까요.”
tvN <톱스타 유백이>는 대형 사고를 쳐 외딴섬에 유배 간 톱스타 ‘유백’이 슬로 라이프의 섬 여즉도 처녀 ‘깡순(전소민 분)’을 만나 벌어지는 로맨스를 그린 작품. 김지석은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톱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는 연기, 노래, 외모 등 모든 것이 완벽한 자타 공인 톱스타 중의 톱스타 ‘유백’을 연기했다. 시상식 날 상의를 탈의한 채 등장하는가 하면 “기쁜 척하는 것도 힘들다”는 역대급 수상 소감을 남기는 안하무인 톱스타를 맛깔나게 연기했다.
“유백이는 안하무인의 결정체예요. 나르시시즘에 젖어 자기애가 강하죠. 직업적 특성상 사랑을 받고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조금은 피곤한 삶을 살아요. 야들야들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 뾰족하게 날을 세우는 성게와 같은 그를 연기하면서 저도 모르게 대리 만족을 느꼈어요. 어쩔 땐 유백이처럼 살고 싶은 욕구를 잠시나마 채워준 셈이죠.”
스타란 그런 것이다. 화려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들은 알지 못하는 자기만의 고충이 있다. 말도 행동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의식하고 싶지 않아도 사람들의 눈이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 데뷔 16년 차인 김지석은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유백이가 부럽기도 했다.
“저도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인지라 진짜 내가 아닌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어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외로운 감정이 드는 것, 누군가에게 내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없는 것들이 유백이와 비슷하죠. 연예인은 기본적으로 모든 면에서 조심해야 하는 직업이라 불편한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 유백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캐릭터예요. 그렇게 자기밖에 모른 채 안하무인으로 살던 유백이가 섬으로 유배를 가고, 섬 사람들과 깡순에게 치유받아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도 함께 성장한 것 같아요. 음… 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정화’된 것 같아요.”
배우에게 드라마는 자식과 같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괜스레 마음이 가는 손가락이 있는 것처럼, 유난히 마음이 쓰이는 작품이 있다는 말이다. <톱스타 유백이>는 김지석에게 그런 작품이다.
“저는 작품과 캐릭터에 영향을 많이 받는 배우라서 한 작품이 끝나면 그 작품이 인생작이 되곤 해요. 그런데 이번 작품은 좀 특별해요. 제가 놓치고 있던 행복,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감사하게 생각하게 된 건 처음이니까요. 이를테면 드라마 <추노>와 영화 <국가대표>의 성공을 당연하게 여겼거든요. 어려서 그랬는지 행운이 빨리 찾아왔다는 걸 몰랐었죠. 이번 작품의 시청률이 경쟁작에 비해 낮았음에도 그걸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자부심을 느껴요. 아쉬운 게 하나도 없어요.”
‘길을 잃고 방황하던 어느 날 인생의 쉼표 같은 섬이 하나 생겼습니다. 다시 차가운 어둠 속에서 길을 잃더라도 방황하지 않도록 저에게 꺼지지 않는 따뜻한 등불 하나를 내어준 그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톱스타 유백이> 마지막 회 ‘유백’의 대사다. 김지석은 이 대사를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다.
“‘모두 다에게 좋은 사람일 순 없어요’라는 대사도 심금을 울렸어요. 평소에 제가 듣고 싶었던 말, 잊고 있었던 걸 일깨워주는 대사와 장면이 많았죠. 캐릭터가 저와 비슷해 그랬는지, 같은 직업의 캐릭터라 그랬는지 저도 모르게 감정 이입이 많이 됐어요. 유백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지켜봤으니 실제 제 삶에도 적용해볼 생각이에요.”
장황하게 말했지만 결론은 하나다. 자기밖에 모른 채 앞만 보고 달려오던 ‘유백’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됐고 이제야 비로소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알게 됐다는 것. 김지석이 잠시 말을 멈췄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예전엔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어요.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같았죠. 그땐 시청률이 제 기분을 좌우했다면, 지금은 아니에요. 이 드라마를 하면서 시청률이 낮아도 기분 좋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유백’을 한번 보세요. 자기를 위하는 주변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섬 생활을 통해 비소로 알게 되잖아요. 저도 그래요. 지금은 직진하면서도 좌우를 살펴보기도 하고, 후방 카메라로 뒤를 돌아보기도 하죠.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을 지키는 게 우선인 것 같아요.”
가장 먼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장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데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날 그는 자신의 SNS에 아버지와 술 한잔 기울이는 사진을 올렸다.
“지금의 이런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삶에 적용해보자고 생각했죠.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아버지와는 오랜만에 외식을 했고, 어머니는 해외여행을 보내드렸어요. 두 살 터울의 형과는 달리 동생은 열 살이나 차이가 나 잘 챙기지 못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동생과 대화를 많이 했어요. 저한테 서운한 게 있더라고요. 이젠 좀 헤아려주려고요. 오랜 시간 저를 사랑해주시는 팬들에게도 감사해요. 저를 이렇게 변하게 해준 <톱스타 유백이>는 ‘바쁜 일상 속에 잊고 있던 행복이 우리 가까이에 있었음을 일깨워준 네 잎 클로버 같은 고마운 드라마’예요. 주변 사람들에게 ‘지금의 이 마음이 오래가길 바란다’고 말했더니 ‘종종 섬에 들어가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아무래도 삶에 찌들 때마다 섬 생활을 해야 하려나 봐요.”
김지석은 평소 팬들과 허물없이 지내기로 유명하다. 실제 팬들과 함께 술자리에 동석하기도, 함께 봉사활동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김지석의 팬카페에 들르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보석상자(팬클럽)’ 팬들과는 오래전부터 가족처럼 지내요. 생일 파티도 열고 회식도 하죠. 서로 경조사도 챙기고요. 이젠 팬클럽이라는 느낌보다 하나의 커뮤니티 같아요. 최근에 제 사진이나 글을 많이 보여드리기 위해 등업 제도도 없앴어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소통하는 가족 같은 분위기의 우리 팬들을 사랑해요.”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 진짜 내가 아닌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어요.
그래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외로운 감정이 들고,
누군가에게 내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없는 것들이 유백이와 비슷하죠.
김지석 하면 <문제적 남자>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첫 방송부터 함께하기도 했지만 그가 종종 <문제적 남자>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왔기 때문이다. 방송에선 껄렁거리며 대충대충 하긴 해도 속으론 엄청나게 애정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드라마를 찍으면서 물리적 여건 때문에 잠시 하차했어요. 섬에 한 번 들어가면 2주 동안 못 나오는데 제 스케줄을 고집하면서 다른 출연자들에게 피해를 줄 순 없잖아요. 다행히 제작진과 출연진이 이해해주고 기다려주었죠. (전)현무 형은 전화도 몇 번 해주셨어요.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 불안해하지 말고 드라마에 집중하라’고 말해 어찌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겉으론 잘 안 챙겨주는데 뒤에서 챙겨주는 ‘츤데레’ 스타일이죠. 그래서 현무 형이 하는 프로그램이 시너지를 발휘하는 것 같아요. 지금은 녹화 일정을 조율 중이고 곧 촬영할 것 같아요.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에요.”
아마도 우리는 문제에 집중하는, 조금은 생소한 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떠났다가 돌아가서 그런 건지, <톱스타 유백이>를 해서 그런 건지…. <문제적 남자>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 것 같아요. 전엔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풀지 않고 빈둥거렸는데 이제는 어려운 문제도 열심히 풀 거예요. 문제 하나하나가 다 소중해요.(웃음)”
김지석은 ‘소중하다’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표정과 말투도 전과 달리 차분했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였는데 아무튼 변한 건 확실하다.
“하다못해 매일 만나는 매니저조차 이런 저를 당황스러워하죠.(웃음) 연기에 대한 어떤 큰 꿈이 있었다기보다 공부 잘하는 형을 따라잡기 위해, 부모님에게 뭔가 보여주기 위해 열등감에서 연기를 시작해 그런지 막연하게 톱스타가 되길 바랐어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정말 감사하고 소중한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연예인’이기 이전에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고 해요.”
김지석에게 “철이 좀 든 것 같다”고 말했다. 서른아홉, 내년이면 마흔이 되는데 나이가 주는 여유와 내공은 아닐까?
“전 나이에 대한 압박이 전혀 없어요. 오히려 빨리 마흔 살이 되고 싶죠. 사람들이 ‘저 올해 마흔이에요’라고 말하면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더라고요. 선배 배우들이 말하길 배우는 마흔 살부터래요.(웃음) 내년엔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더 진지해지지 않을까요? 나이야말로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지만 한 가지 욕심은 있어요. 마흔 살이어도 서른여덟 살처럼 보이고 싶은 욕심? 동안을 유지하고 싶달까요.(웃음)”
나이에 초연하다지만 결혼에 대해선 결코 여유롭지 않을 것이다. 로맨스가 삶의 1순위라고 말했던 그가 아닌가.
“사랑, 로맨스는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삶이 결국 사랑을 위한 것 아니겠어요? 우리도 누군가의 사랑으로 태어난 사람이고요. 연애는 늘 하고 싶고, 기회만 되면 해요. 그런데 결혼은 다릅니다. 아직까지 결혼 계획은 없어요. 20대 중반에는 결혼할 줄 알았는데 어느새 나이를 이렇게나 많이 먹었네요. 사람들이 마흔 살 전에는 해야 한다던데, 대체 그 기준은 누가 만든 건가요? 나이에 쫓겨 결혼하고 싶지는 않아요.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결혼이 인생의 목표는 아닙니다. 언제 결혼하느냐보다 누구와 하느냐가 더 중요해요. 이제는 사람 만나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결혼 상대를 만나는 건 더 어렵겠죠.”
나이 먹을수록, 그러니까 사람들과 부딪힌 횟수가 많아질수록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는 게 조심스러워진다. 더 이상 깊어지지 않고 언저리에서 머무는 관계가 많아진다. 자신을 꽁꽁 싸매는 보호 본능 지수가 높아질수록 ‘내 사람’은 줄어든다.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 하는 치열한 연예계에선 더 그렇다.
“주변 인물이 바뀌는 걸 꺼리는 편이라 익숙한 사람이 좋아요. 한곳에 오래 머물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편이에요. 그래서 인간관계가 좁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알아가는 스타일인데 알아가는 과정에서 아니다 싶으면 그 정도의 관계만 유지해요. 그게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는 저만의 노하우죠.”
김지석은 당분간 ‘빈둥거리는 일상’을 만끽하며 휴식기를 보낼 예정이다. 데뷔 후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못했던 것들부터 차근차근 해보려고 한다.
“드라마를 하면서 살이 많이 빠졌어요. 그래서 마음껏 먹어도 되죠.(웃음) 자기 전 라면 먹기, 침대에 누워 과자 먹기, 양념치킨 먹기 등 절대 하면 안 되는 것들부터 할 겁니다. 본능에 충실해보려고요.(웃음) 아마 <문제적 남자>에서 살찐 김지석을 보게 되실 수도 있어요.”
쫓기듯 살아오던 김지석에게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아마도 그의 연기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