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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러시아 문학 기행 22

도스토옙스키, 갑자기 죽음의 사자(使者)를 맞다

On February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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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이 들어서 있는 쿠즈네치느이 거리의 건물. 도스토옙스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아파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이 들어서 있는 쿠즈네치느이 거리의 건물. 도스토옙스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아파트다.

 

힘쓰는 일은 안 된다고 했는데…

도스토옙스키가 1880년 가을 마무리한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1부를 끝낸 것이다. 1부만으로도 방대한 작품이다. 이제 셋째 아들 알료샤를 본격적인 주인공으로 하는 2부를 쓸 차례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앞으로 20년간 쓸 작품에 대해서도 메모를 해두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생애에서 가장 좋은 해였다고 할 수 있는 1880년이 지나고 1881년, 새해를 맞았다. 도스토옙스키의 인기는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시샘이라도 하듯 갑자기 죽음의 사자가 찾아왔다.

1881년 1월 25일 밤 상트페테르부르크 쿠즈네치느이 거리 5번지 아파트의 서재. 그날도 도스토옙스키는 평소처럼 온 가족이 잠든 밤중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일을 했다. 26일에도 다른 날처럼 오후 1시쯤 일어났다. 안나가 서재에 들어갔을 때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간밤에 작은 사고가 있었다면서, 펜대가 책상에서 굴러떨어져 책장 밑으로 들어갔는데, 펜대를 찾기 위해 책장을 옮기느라고 힘을 썼더니 갑자기 폐동맥이 터졌는지, 입에 피가 고였었다고 말했다. 그 펜대는 도스토옙스키가 담배를 말 때 자주 사용하는 것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간질과 치질 외에 폐기종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힘을 주는 일은 해선 안 된다고 의사도 경고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입안에 피가 고이는 일은 폐가 좋지 않은 도스토옙스키에게 종종 있어온 일이었으므로 그는 간밤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날 오후 도스토옙스키를 흥분시킨 두 가지 일이 연달아 발생했다. 하나는 며칠 후 있을 낭독회 프로그램과 관련한 행사 관계자와의 논쟁이었고(*안나의 회고록에는 <작가일기>에 실을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인물과의 논쟁이었다고 적혀 있다), 또 하나는 모스크바에서 온 누이동생 베라와 유산 문제로 다툰 일이다. 그러나 안나는 가족 문제였기 때문인지 회고록에 누이동생 베라와 남편이 다툰 이야기를 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 직전까지의 일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토한 피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밤중에 내가 걱정할까 봐 나를 깨우지도 않았다. 그 얘기를 듣고 너무나 걱정이 된 나는, 남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환인 뾰뜨르를 남편의 주치의 폰 브레뜨에게 보내어 즉시 와달라고 부탁했다. 불행하게도 그는 이미 환자를 왕진하러 간 상태였고, 5시 이후에야 올 수가 있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도스토옙스키)는 아주 침착했다. 그는 아이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장난도 쳤으며 <신시대>를 읽기 시작했다. 3시쯤 손님이 한 사람 집에 찾아왔다. 그는 남편에게 호의적인 무척 선량한 사람인데, 언제나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작가일기> 다음 호에 실릴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손님이 뭔가를 증명하기 시작하자 간밤의 출혈로 인해 약간 불안한 상태였던 남편이 그의 말에 반대했고, 그들 간의 뜨거운 논쟁이 가열되고 있었다. 내가 손님에게 두 번씩이나 남편의 건강 상태가 온전치 않으므로 큰소리로 말하거나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해롭다고 말을 했건만, 두 사람을 달래 보려던 나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마침내 5시가 되어 손님은 떠나고 우리는 식사를 하기 위해 모였다. 그런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갑자기 자기 소파에 앉더니, 3분 정도 아무 말이 없었다. 순간 그의 턱이 피로 물들면서 피가 구레나룻을 따라 가늘게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폐출혈 후 방문객들 만나 상태 악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운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운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운하.

그런데 E. H. 카의 『도스토옙스키 평전』 등을 보면 안나가 위에서 언급한 손님은 오레스트 밀러라는 사람이며 그는 이날 1월 29일로 예정되어 있는 한 낭독회의 프로그램을 상의하기 위해 도스토옙스키를 찾아왔다. 그 자리에는 마이코프와 스트라호프도 함께 있었다. 밀러는 도스토옙스키가 낭독회 때 읽어야 할 푸시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뽑아낸 대목들을 제시하면서 이것은 도스토옙스키가 약속한 것으로서 이미 광고도 나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읽겠으며 그 밖의 것은 읽지 않겠다고 노기를 띠며 선언했다. 이 언쟁은 밀러가 프로그램을 바꾸기로 함으로써 끝났다고 한다.

그리고 밀러 일행이 간 뒤에 누이동생 베라가 찾아와 이모부 쿠마닌의 해묵은 유산 문제를 두고 다투는 일이 발생해 또 그를 흥분시켰다. 도스토옙스키는 갑자기 흥분을 잘하는 성격이기도 했는데, 이날 폐출혈 후 이같이 잇달아 벌어진 일들로 상태가 급격히 심각해진 것이다. 이때쯤 주치의 야코프 폰 브레트셀이 왔다. 의사가 흉부를 손으로 누르며 진찰하는 동안 출혈이 다시 시작됐고 도스토옙스키는 의식을 잃었다. 다음 날인 27일에도 출혈은 간헐적으로 계속됐다.

그 와중에도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나머지 원고료를 달라는 부탁 편지를 <러시아 통보>의 카트코프에게 썼다. 그리고 안나에게 사제를 불러달라고 했다. 집 근처에 도스토옙스키가 다니던 블라지미르 성당의 사제가 와 고해를 하고 종부성사를 받았다. 출혈 3일째인 28일 아침, 그는 안나에게 31년 전 혹한 속에서 시베리아의 옴스크 유형소로 가던 도중 토볼스크에서 만난 폰비지나(1803~1869)와 안넨코바(1800~1876) 등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이 그에게 주었던 성경책을 달라고 했다. 표지에 10루블이 감춰져 있던 오래된 그 성경책이다. 유형수들은 돈을 지닐 수 없었기 때문에 감춰 건넨 것이다. 당시 시베리아에서 10루블은 큰돈이었다. 앞에서 얘기했지만, 당시 10루블은 시베리아에서 소 3마리를 사고도 남는 돈이었다. 성경책은 유형수들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책이었다.

최후의 날, 시베리아에서 받은 성경책을 펼치다

도스토옙스키가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을 만난 때는 1850년 1월로, 데카브리스트들에게 사면령이 내려지기 6년 전이다. 데카브리스트와 그 가족들은 여전히 시베리아에서 유배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으나 처음 강제노동형을 살 때와는 달리 시베리아의 일정 지역 안에서 다소의 독립적인 경제생활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수용소에 있을 때 토볼스크에서 받은 그 성경을 베개 밑에 늘 소중하게 보관했다. 그 성경을 가지고 문맹의 젊은 죄수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생애에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 성경을 아무 데나 펼쳐서 읽곤 했다. 이날 도스토옙스키는 안나가 가져온 성경책을 펴고 한 군데를 가리켰다. '마태(마태오)복음' 3장 14~15절이었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가 그 구절을 큰 소리로 그에게 읽어주었다. 예수가 요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장면이다. 이해를 위해 13절부터 16절까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3. 그즈음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오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15. 예수께서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라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은 예수께서 하자는 대로 하였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것이 보였다.
(대한성서공회 발행, 『공동번역 성서-가톨릭용』, 1977)

안나가 14~15절을 읽자,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당신도 들었지, 막지 말라. 그러니까 내가 죽는단 뜻이지." 이렇게 말하며 도스토옙스키는 성경을 덮었다. 안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함께 살았던 행복한 생활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안나에게 아이들을 부탁하면서 언제나 아이들을 사랑하고 지켜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기억해줘, 아냐(안나의 애칭). 내가 당신을 언제나 뜨겁게 사랑했다는 걸. 그리고 꿈에서라도 당신을 배반한 일이 없다는 걸 말이오." 도스토옙스키는 이날 오후 안나의 손을 쥐고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엾은 소중한 사람, 내가 당신에게 남겨주는 게 없구려. 가엾은 당신, 얼마나 살기가 어려울까!" 도스토옙스키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가족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당시 <러시아 통보> 편집부에 보관돼 있던 4,000~5,000루블이 남겨진 유일한 자산이었다고 안나는 회고록에 기록했다. 사망하기 몇 시간 전 도스토옙스키는 류보피와 페쨔를 불렀다. 아들 페쨔에게 성경을 주라고 안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누가(루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귀향(누가복음 15장 11~24절)'을 읽어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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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물관 입구. 2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을 감상하는 관람객들. 3 박물관 서재의 시계가 도스토옙스키가 숨을 거둔 8시 38분을 가리키고 있다.

탕자의 귀향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해보리라.'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아이들이 '탕자의 귀향'을 다 읽자 도스토옙스키는 류보피와 페쨔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지금 방금 들은 얘기를 절대로 잊지 말거라. 주님에 대한 끝없는 믿음을 간직하고, 1그분의 용서를 단념하지 마라. 나는 너희들을 정말 사랑한다. 하지만 내 사랑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인간들을 향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살다가 혹 죄를 짓는다고 해도 주님에 대한 희망을 결코 버려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그분의 자녀들이다. 마치 너희들 아버지를 대하듯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라. 그분께 용서를 구하면 그분은 돌아온 탕자를 보고 기뻐한 것처럼 너희들의 회개를 기뻐하실 것이다."

넵스키 수도원에 잠들다

넵스키 수도원 묘지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흉상.

넵스키 수도원 묘지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흉상.

넵스키 수도원 묘지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흉상.

도스토옙스키가 위독하다는 소문을 듣고 아파트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문제아였던 의붓아들 파벨도 왔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최후의 순간에 그를 보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날(1월 28일) 밤 8시 38분에 숨을 거뒀다. 안나는 남편과의 영원한 이별의 순간을 이렇게 회고록에 기록했다.

"최후의 순간이 오자 나와 아이들은 절망에 목 놓아 울었다. 아직 채 식지 않은, 우리가 사랑했던 망인의 얼굴과 손에 입을 맞추며 무슨 말인가 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내가 분명하게 의식한 것이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은 끝없는 행복으로 가득했던 나 자신의 삶이 그가 죽는 순간 끝났다는 것, 내 마음은 영원한 고아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렇게 뜨겁게, 모든 것을 초월하여 내 남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를 사랑했다. 나는 드물디드문 이 고귀한 도덕적 품성의 소유자가 우정으로 나를 대하고, 나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사실에 크나큰 자긍심을 가졌다. 그를 잃은 것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 받을 수 없었다. 진정 끔찍했던 이별의 그 순간, 나는 남편의 죽음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바로 심장이 터지거나(그만큼 내 가슴은 심하게 뛰고 있었다)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생전에 도스토옙스키는 죽은 후 모스크바의 노보제비치 수도원에 묻히길 원했다. 그러나 그곳의 자리를 알아보는 중에 예술인들이 많이 묻혀 있는 넵스키 수도원에서 묘지를 제공하겠다는 제의가 와 넵스키 수도원의 예술인 묘지로 전격 결정되었다. 평소 그가 좋아하던 시인 주콥스키 무덤 옆의 빈자리를 내주었다. 후에 차이콥스키도 이곳에 묻혔다. 장례식은 성대했다. 수만 명의 인파가 넵스키 수도원으로 가는 장례 행렬을 따랐다. 장례 예배는 두 명의 주교가 집전했다. 만약 그의 죽음이 한 달만 늦어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사건(3월 1일) 이후였다면 그토록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남녀 구분 없는 러시아의 야간 침대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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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브고로드 역에 도착한 야간 침대 열차.

노브고로드 역에 도착한 야간 침대 열차.

 

열차에서 연분이 생기기도

침대 열차 내부.

침대 열차 내부.

침대 열차 내부.

러시아에서의 여행이 언제나 그렇지만 도스토옙스키 별장 박물관이 있는 스타라야루사에 가는 길도 수월치 않았다. 모스크바에서 스타라야루사까지 곧장 가는 기차를 타면 한결 편했겠지만 기차가 자주 없었고 그나마 우리의 일정과 맞지 않았다. 우리란 나와 전(前) 고리키문학대학 박정곤 교수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모스크바에서 월요일 밤에 노브고로드(벨리키 노브고로드)행 야간열차를 탄 후 그곳에서 택시를 대절해 스타라야루사까지 가기로 했다. 열차는 모스크바에서 2018년 8월 27일 밤 10시 6분에 출발했다. 야간 침대 열차다. 한잠 자고 아침 6시 25분에 노브고로드에 도착했다. 8시간 20분쯤 걸렸다. 노브고로드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중간에 있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더 가깝다. 이 열차는 노브고로드가 종착역이었다. 열차는 도중에 몇 군데 역에서 섰다. 모스크바에서 노브고로드까지의 거리는 약 560km이며 노브고로드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는 약 210km다. 우리가 탔던 열차는 보통 속도의 구식 열차였지만, 고속 열차는 700km가 넘는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를 4시간 안에 주파한다. 이 경우 거의 시속 200km로 달리는 셈이다. 속도는 이처럼 열차에 따라 크게 다르다.

예약한 열차의 침대칸은 이층 구조로 된 쿠페(4인 1실)다. 우리는 1층 표를 샀다. 2층 표는 조금 싸다고 한다. 우리는 남아 있는 두 개의 2층 침대에 아무도 안 들어와 두 사람만의 편한 잠자리가 되길 바랐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출발 직전에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객차까지 올라온 한 젊은 남성의 배웅을 받으며 들어왔다. 그녀는 우리에게 러시아 말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는 바로 2층 침대로 올라갔다. 여자는 2층에 잠자리를 펴면서 박 교수와 몇 마디를 나누었다. 러시아의 열차는 침대칸이라도 남녀 구분이 없다. 그래서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 간에 연분이 생기기도 한다. 운이 나빠 술주정뱅이라도 만나면 골치 아프다고 한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우리는 이내 잠이 들었다. 잠결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새벽 3시쯤 2층에서 살며시 내려와 방문을 열고 나갔다.

택시 기사와의 흥정

노브고로드 역에는 아침 햇살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애당초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역 앞에는 차를 마실 곳도, 음식을 파는 곳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자칫하면 쫄쫄 굶을 판이었다(사실 기차에서 내리기 한 시간 전쯤 혹시나 해서 가지고 갔던 컵라면을 박 교수와 하나씩 먹어두긴 했다). 식당과 카페가 즐비한 우리나라 기차역 앞을 상상하면 낭패다. 이 같은 러시아의 사정을 잘 아는 박정곤 교수가 미리 스타라야루사에 잠시 쉴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해놓았다. 짐도 맡기고 밥도 해결하기 위해서다.

일단은 스타라야루사로 출발하기로 했다. 노브고로드에서 스타라야루사까지는 97km. 약 100km로 기억하면 편하다. 실제 지도상의 직선거리는 절반 정도지만 커다란 일멘 호수를 우회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엔 노브고로드에서 스타라야루사까지 대개 선박으로 오갔다고 한다. 박정곤 교수가 역 앞의 택시 기사와 흥정을 했다. 스타라야루사까지 1,500루블(약 3만원)에 가기로 했다. 1시간 20분쯤 걸린다고 했다. 이곳 택시 기사의 흥정 방식을 이날 처음 알게 되었는데, 1km당 20루블로 계산한단다. 스타라야루사는 약 100km이므로 이 계산법에 따르면 2,000루블이다. 우리 돈 4만원이다. 그것을 흥정하여 깎은 것이다. 환율이 높았던 3~4년 전이라면 7만~8만원 거리다. 속도계를 보니 보통 시속 약 100km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역에서 아침 7시 10분에 출발했는데 스타라야루사에 도착하니 오전 8시 30분이다. 1시간 20분 걸렸다.

우리는 일단 게스트하우스로 들어갔다. 허름한 목조 이층집이다. 방에 가방과 배낭을 내려놓고 작은 주방에 차려놓은 아침을 먹었다. 수프와 흑빵과 흰 빵, 치즈와 햄 몇 조각에 차가 전부였지만 아침으로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도스토옙스키가 50대에 줄곧 살았던 별장 박물관을 찾아갔다.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그의 동상도 보고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다니던 정교회 성당도 봤으며 드디어 당도한 페레리치차강 강변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마침내 사진을 통해 눈에 익은 녹색의 박물관 건물이 나타났다. 여기서 1시간 반 정도 유흐노비치 관장대행의 안내로 설명을 들었다.

수프와 빵뿐인 식사도 감사할 일

도스토옙스키 별장 박물관을 나와 인근에 새로 생긴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소설 박물관'의 외관을 카메라에 담고 나니 오후 1시 가까이 되었다. 박물관이 대개 월요일에 휴관을 하기 때문에 화요일에 간 것인데 소설 박물관은 마지막 화요일도 휴관이라니… 우째 그런 일이!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또 점심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중에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박 교수가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를 해서 점심을 부탁했다. 전화를 끊고서 하는 말이 "수프와 빵밖에 없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게스트하우스도 기본적으로는 투숙객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체제가 아닌 것 같았다. 부탁하면 간단하게 차려주긴 하지만. 도착해 점심상을 보니 과연 간단했다. 흑빵과 흰 빵 몇 조각과 야채수프가 전부였다. 아침에는 치즈와 햄도 몇 조각 있었는데 그것마저 없었다. 완전 다이어트식이다. 이날은 아침과 점심을 그렇게 때웠다. 방값과 두 번에 걸친 식사비를 합친 요금은 노브고로드에서 스타라야루사까지 올 때의 택시비와 같았다. 우리는 두 번이나 식사를 해결하게 해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팁을 더 얹어 주었다. 러시아에서는 팁이 없는 것이 상례지만 그렇다고 더 주는 돈을 마다하는 사람은 없다.

노브고로드로 타고 갈 택시는 전화로 쉽게 연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길에서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는 것이 대세이지만, 땅이 큰 러시아에서는 그런 식으로 택시를 잡기는 어렵다. 그래서 일반 승용차도 택시 연결망, 즉 차량 공유 시스템에 가입할 경우 택시 영업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영업용 택시에 타격을 줄까 봐 아직까지 도입하지 못하고 있는 이른바 카풀 제도다. 스타라야루사에서 노브고로드로 돌아갈 때는 택시비를 올 때보다 조금 더 지불했다. 조금 달리다 보니 도로 오른쪽 숲 사이로 일멘 호수가 보였다. 잠시 차를 세우게 하고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호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꽤 넓은 호수다. 도스토옙스키 부인 안나의 회고록에 노브고로드에서 스타라야루사까지 호수를 빙 돌아 육로로 가면 80베르스타, 뱃길로는 40베르스타라고 적혀 있다. 1베르스타가 1.0668km이므로 호수 폭이 최소 40km 이상 된다는 이야기다.

상트페테르부르크행 열차 내부. 가운데 서 있는 이가 박정곤 교수다.

상트페테르부르크행 열차 내부. 가운데 서 있는 이가 박정곤 교수다.

상트페테르부르크행 열차 내부. 가운데 서 있는 이가 박정곤 교수다.

벨리키 노브고로드의 이정표. 모스크바까지 562Km,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214km라고 적혀 있다.

벨리키 노브고로드의 이정표. 모스크바까지 562Km,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214km라고 적혀 있다.

벨리키 노브고로드의 이정표. 모스크바까지 562Km,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214km라고 적혀 있다.

입석도 가능한 상트페테르부르크행 열차

노브고로드에 도착하니 오후 4시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 상트페테르부르크행 저녁 열차는 두 시간 후인 6시 6분에 출발이다. 이 열차는 당초부터 사전 예약은 안 되고 1시간 전에 와서 표를 끊어야 한다고 해서 스타라야루사에서 서둘러 온 것인데 나중에 보니 지정된 좌석이 없고 입석도 가능한 열차였다. 맥도날드가 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여기서 햄버거를 저녁 삼아 먹으며 티켓 창구가 문을 여는 5시까지 기다렸다. 시간이 되어 박 교수가 창구에 갔는데 한참 만에 돌아왔다. 가보니 벌써 줄이 길에 늘어서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시간이 걸린 것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는 약 200km. 열차의 외관은 날씬한 고속철 타입이다. 내부는 우리나라 KTX 일반석처럼 생겼다. 중간에 어느 역에서 노인이 승차했는데 자리가 없어서 입구 쪽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박정곤 교수가 자리를 양보했다. 자리를 내준 잘생긴 중년의 남성이 한국 사람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여러 역에서 정차하는 바람에 가다 서다를 반복해 약 3시간 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도착역의 이름은 모스크바 역이었다(*러시아의 역 이름은 대개 가는 쪽 방향의 도시 이름을 다는 경우가 많다. 모스크바 역이면 모스크바 쪽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하는 역이라는 뜻. 모스크바에서 북쪽인 노브고로드나 상트페테르부르크 쪽으로 갈 때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옛 이름인 레닌그라드 역에서 열차를 탄다). 역 주변의 화려한 야경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CREDIT INFO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2019년 03월호
2019년 03월호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