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다로보예 영지의 추억
도스토옙스키는 세상 떠나기 3년 반 전 그의 나이 56세 때인 1877년 여름, 아버지의 영지가 있던 다로보예에 갔었다. 다로보예는 모스크바에서 동남쪽으로 170km가량 떨어진 곳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어린 시절 매해 여름철을 보냈던 그곳을 늘 그리워했다. 1877년 여름에는 그의 건강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안나도 그에게 다로보예에 한 번 다녀오라고 했다. 영지는 도스토옙스키의 누이동생인 베라에게 넘어가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다로보예에 가서 베라의 집에서 이틀을 묵었다. 그는 추억 속의 숲과 공원 등 많은 곳을 찾아다녔다. 어린 시절 즐겨 찾았던 '체르마쉬냐' 숲에도 다녀왔다. 소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체르마쉬냐 숲은 바로 여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단편 『농부 마레이』는 그가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어느 날 문득 기억해낸, 어린 시절 영지 다로보예에서 농노 마레이로부터 느꼈던 따뜻한 기억의 회상이다. 수용소에서의 그날은 부활절 축제 기간의 두 번째 날이었다. 축제 기간에는 수용소에서도 음주를 눈감아주어 죄수들 상당수가 술에 취해 욕설을 내뱉거나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폴란드인 정치범 M-츠키가 "나는 이 강도들이 싫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도스토옙스키의 옆을 지나갔다. 그 뒤 어떤 이유에서인지 유년기의 사소한 추억 한 토막이 떠올랐다. 그가 9살이었을 때의 어느 여름날의 일이다. 혼자 숲에 들어갔다가 "늑대가 온다"는 환청(물론 처음에는 환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을 들었다. 어린 도스토옙스키는 비명을 지르며 인근에서 밭을 갈고 있던 농부 마레이에게 달려가 그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마레이는 놀란 도스토옙스키를 안심시키며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마레이는 흙이 묻어 손톱이 까매진 두툼한 손가락을 살며시 들어 떨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입술을 만지며 어머니 같은 넉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의 일을 떠올린 후, 죄수가 되어 수용소에 들어와 있는 저주받은 농부들 역시 마레이와 똑같은 사람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에게 가졌던 적의와 분노가 가슴속에서 기적처럼 사라져버렸다. 갑자기 그 불행한 인간들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음을 어느 순간 느꼈던 것이다. 유년기의 귀중한 사랑의 기억이 장년기의 그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이야기하는 단편이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단편이라기보다는 수필에 가깝다.
『농부 마레이』의 마을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다로보예에서 자기를 기억하고 있는 동네 노인들과 동년배들을 만났고 그들의 오두막에 들어가 차도 대접받았다. 의사였던 아버지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귀족이긴 했지만 재산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해 돈을 좀 모았다. 병원 일 외에 개인적으로 바깥 진료도 했다고 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본업 외에 알바도 한 것이다. 그는 도스토옙스키가 10살 때인 1831년 그동안 모은 돈으로 농가가 20여 채 정도밖에 안 되는 다로보예의 작은 영지를 사들였고 이듬해에는 인접한 체르마쉬냐의 땅도 샀다. 주민이 100여 명이었다니 이곳의 규모도 다로보예와 비슷했을 것 같다. 귀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영지였을 것이다.
1877년 방문 때 도스토옙스키는 아버지가 묻혀 있는 다로보예 모노가로보 성당 묘지에도 갔다. 아버지는 1837년 아내가 죽은 뒤 병원을 그만두고 다로보예로 내려와 살면서 술을 과도하게 마셨다. 그러면서 농노들에게는 가혹하게 대했던 모양이다. 그는 1839년 6월 어느 날, 다로보예 인근 체르마쉬냐 숲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타살 흔적은 없었고 의사는 사인이 뇌졸중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도 그가 평소 술을 많이 마셨으므로 그것이 뇌졸중을 일으켰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후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죽은 것이 아니고 그의 혹독한 처사에 원한을 품었던 농노들에 의해 목 졸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주가 농노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은 당시에 드문 일이 아니었다.
가혹했던 러시아의 농노제
제정 러시아의 농노제하에서 농노는 거주 이전의 자유를 박탈당한 땅에 속한 노예였다. 자의로 그 땅을 떠날 수 없었다. 땅이 팔리면 농노도 함께 팔렸다. 지주에게 매를 맞는 것은 예사였다. 지주는 마음에 안 드는 농노는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낼 수도 있었다. 지주 개인의 사유물로서 필요에 따라 매매도 가능했다. 이같이 가혹한 노예 상태에 놓여 있던 러시아의 농노는 당시 2,0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됐다. 농노제는 알렉산드르 2세 때인 1861년에 가서야 폐지되는데 러시아가 이처럼 오랫동안 농노제를 유지한 것은 농노들을 토지에 묶어놓지 않을 경우 광대한 토지를 제대로 경작하며 유지할 수 없다는 지배층의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성직자의 아들이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1812년 나폴레옹전쟁 때는 군의관으로 종군했고 이후 모스크바 마린스키 빈민구제병원 의사로 일했다. 그가 의사로서 열심히 일한 결과 귀족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원래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여간에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는 농노들에게 좋은 주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농노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그와 토지 경계선 문제로 소송 중이던 이웃의 지주인 어느 소령이 유포했다는 설도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다로보예에서 가족과 여름을 지내던 때는 1830년대 대략 10살부터 16살까지 예닐곱 해가량이었을 것이다. 1837년 아내가 죽은 후 아버지는 큰아들 미하일과 둘째 표도르(도스토옙스키)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비학교로 보냈다. 도스토옙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다로보예를 찾아간 1877년은 농노제가 폐지된 지 16년이 지난 뒤이다. 더 이상 매를 맞아도 아무 소리 못 하는 농노는 아니지만, 그들의 생활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농노가 아니라 순수한 농부로 신분이 다소 달라졌다고는 해도 생업이 농사인 이상 토지를 지주로부터 사거나 빌려 농사를 짓는 수밖에 없었다. 지주에 예속되는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 같은 변화 속에서 적지 않은 농노들이 그 후 도시로 나가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다로보예에 다녀온 후 아이들에게도 이곳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생전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안나는 도스토옙스키 사후 3년 되던 해인 1884년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 가서 도스토옙스키가 둘러보았다는 곳들을 찾아보았다. 현재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지냈던 통나무집은 자라이스크 시 역사박물관 산하의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으로 보존돼 있다. 방문객이 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상시로 열려 있는 것은 아니고 방문을 원하는 사람이 역사박물관에 전화로 약속을 잡은 뒤 자기 차로 자라이스크 시 역사박물관으로 가 가이드를 차에 태워 다녀오도록 되어 있다. 차로 20분 정도 걸린다.
서적 판매상을 열기도 했지만…
도스토옙스키는 1880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푸시킨 동상 제막식에서 자신의 대중적 인기를 확인한 후 한껏 들떠 있었다. 쓰고 있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그해 가을에 마무리했다.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초청도 한층 많아졌다. 그해 초 빚도 거의 다 갚아 마음이 한결 홀가분한 상태였다. 생애 최고의 전성기라고 할 만한 해였다.
도스토옙스키는 그해, 1880년 초에 'F. M. 도스토옙스키 서적 판매상'을 열었다. 다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적상이다. 물론 안나가 주도적으로 한 일이다. 소규모여서 가게를 얻지 않고 집에서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빚에 쪼들리지는 않게 되었지만 비축해둔 돈은 없었다. 폐기종의 악화로 도스토옙스키의 건강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어 갑자기 집필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수입이 끊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대비한 준비이기도 했다. 큰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도스토옙스키란 이름 덕에 사업은 순조로웠다.
이 사업은 도스토옙스키가 1년 후 사망하는 바람에 중단되었지만, 그대로 계속되었다면 꽤 성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안나는 후일 그 점을 아쉬워했다. 안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름을 건 이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고 1881년 3월 초 문을 닫았다. 도스토옙스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안나는 그 후 남편의 작품 전집을 출판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도스토옙스키, 중노동 상태에 있다고 호소하다
인기가 치솟자 문제도 많이 생겼다. 갖가지 사람이 주위에 들끓었고 각종 초청과 부탁도 끊이지 않았다. 또 작업할 것이 많아지면서 자연히 과로를 하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1880년 10월 15일 P. Ye, 구세바가 보낸 편지에 대한 늦은 답신에서 자신은 지금 중노동 상태에 있고 지금보다는 시베리아 유형지에서의 삶이 오히려 견딜 만했다며 당시 처해 있던 힘든 상황을 이렇게 호소했다.
"당신께 답을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시나요? 누군가 중노동형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바로 접니다. 저는 시베리아에서 4년간 살았지만(*유형소에서 4년간 지낸 것을 말함, 시베리아에서 산 전체 기간은 약 10년이다) 그곳에서의 일과 삶은 지금에 비하면 오히려 견딜 만했습니다.
6월 15일부터 10월 1일까지 저는 인쇄 전지로 총 스무 장 분량의 소설 원고를 완성하고, 인쇄 전지 세 장 분량의 <작가일기>를 발표했답니다. (…) 그래서 문자 그대로 밤낮없이 앉아 글만 쓰고 있답니다. (…) 제가 책 한 권, 신문 한 장도 읽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시간을 보낸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아이들하고 얘기를 나누는 것조차 불가능하고, 그래서 얘기도 못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은 당신이 상상도 못할 만큼 무척 나쁩니다. 호흡기 감기로 기도 부분이 부어올랐는데,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들이마시는 공기의 양이 적으니 숨이 막힙니다. 제가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몸을 혹사하다 보니 나쁜 건강이 더욱 악화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다른 일들은 다 제쳐두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까지도 아끼면서 글쓰기에 매달려 있습니다.
지금은 아침 6시인데, 밖은 아직도 깜깜합니다. 도시는 잠에서 깨어나고 있지만, 저는 아직 잠자리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의사들은 글 쓰는 일로 몸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밤에는 반드시 잠을 자고 하루에 책상 앞에 10~12시간 동안 앉아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제가 왜 밤에 글을 쓰는지 아세요? 잠깐 눈을 붙이고 오후 1시에 일어나면, 이 사람 저 사람 줄지어 찾아오거든요. 한 사람이 와서 무슨 부탁을 하고 나가면 , 다음 사람이 또 다른 부탁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옵니다. (…)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대학생, 여대생, 고등학생, 그리고 자선단체의 대표들이 찾아와 문학의 밤에서 낭송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 생각을 하고, 언제 일을 하고, 또 언제 독서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삶은 언제 살고요? 이런 얘기를 꺼내서 죄송합니다. 저는 너무 지쳐서 고통스럽고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습니다. 문자 그대로 문학계 전체가 제게 적대적입니다. 저를 사랑해주는 것은 러시아 전역의 독자들뿐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2』, 콘스탄틴 모츨스키, 김현택 옮김, 책세상, 2000)
사실 도스토옙스키의 건강은 이처럼 과로해서는 안 될 상태였다. 이미 바로 전해(1879년) 말에 의사인 안나의 사촌 오빠 미하일 스니트킨이 도스토옙스키의 흉부를 진찰한 후 도스토옙스키에게는 "무난히 겨울을 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안나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폐기종이 더 악화됐으며 지금의 상태로는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혈관들이 너무 가늘고 약해졌기 때문에 어떤 물리적인 압박을 받으면 언제든지 터질 가능성이 있다고, 따라서 과격한 운동을 하거나 무거운 물건을 들고 옮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그는 좋은 일로든 나쁜 일로든 모든 흥분은 금물이라고 도스토옙스키에게 충고한 사실도 안나에게 말해주었다. 앞서 1878년 7월 독일의 온천 휴양지 엠스로 단기간 요양을 갔을 때는 주치의 오르트 씨가 도스토옙스키를 진찰한 후, "폐기종 때문에 폐포가 심하게 늘어나 변성되면서 심장에까지 영향을 미쳐 심장의 위치까지 바뀌었다"고 말했다고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보낸 7월 25일 자 편지에 썼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운명을 걸다
도스토옙스키는 1879년에도 엠스에 갔는데, 8월 13일 자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내 사랑하는 사람, 나는 계속해서 나의 죽음(여기에서는 아주 심하게 생각하게 되오)을 그리고 당신과 아이들에겐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소. 모두들 우리가 돈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소, 지금 나는 카라마조프를 놓고 씨름하고 있소. 보석같이 다듬어서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하는데, 사실 어렵고 모험을 감수하는 일이어서 많은 힘을 소진하고 있소. 하지만 이건 또한 운명을 건 작업이오. 이 소설이 내 이름을 확고히 다져주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희망도 없소. 소설을 탈고하여 내년 말에는 <작가일기>의 구독 신청 공고를 낼 거요. 그래서 구독료로는 영지를 구입하고, 생활비와 <작가일기> 다음 호의 출판비는 책 판매 대금으로 어떻게든 꾸려가볼 생각이오. 강력한 대책을 취해야지. (…) 부동산은 아이들이 자랐을 때 자산이 되어줄 것이라는 것과 땅을 소유한 자는 국가의 정치권력도 나누어 소유한다는 것이 그것이오."
도스토옙스키는 말년에 어떻게 영지를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많이 생각했다. 그러나 안나는 영지를 사서 아이들의 장래를 보장해준다는 생각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 영지를 구입한다고 해도 영지를 관리할 사람이 없어 남에게 맡길 경우 문제만 일으킬 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의 경우를 통해서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1881년 1월 26일 기어코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 금해야 할 일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지만…. (다음 호에 계속)
유형소에서 싹튼 소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당시 노브고로드 신문에 실린 부친 살해 사건
스타라야루사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는 19세기 신문 두 종류가 전시되어 있다. 하나는 노브고로드에서 발행되던 지역 신문 <노브고로드현(縣) 뉴스>고, 다른 하나는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행되던 <신시대>다. 이 신문들이 전시되어 있는 이유는 도스토옙스키가 스타라야루사에 살던 1875년 이 신문들에 부친 살해 사건이 보도되었고 그것이 소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모티브가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물관의 율리야 유흐노비치 관장대행은 내게 그렇게 설명했다. 신문은 부친 살해 사건 기사가 실린 그 날짜의 신문은 아니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핵심 주제는 인간의 가장 패륜적 범죄인 부친 살해다. 따라서 그 사건이 소설의 모티브가 됐다고 주장하더라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속의 부친 살해 사건은 이미 이보다 앞서 1862년에 나온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그 싹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소에서 부친 살해 사건으로 복역 중인 젊은 귀족을 보았다. 그런데 그는 진범이 아니었다. 나중에 진범이 잡혔다. 그는 결국 억울한 유형살이를 했던 것이다.
유형소에서 만난 부친 살해범
그러면 도스토옙스키가 유형소에서 만난 부친 살해범은 어떠한 상황에서 억울한 유형살이를 하게 됐을까?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플롯과 유사한 점이 많이 발견된다. 『죽음의 집의 기록』에 나오는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귀족 출신이었던 그는 품행이 아주 방탕해서 빚더미에 올라앉고 말았다. 아버지가 그를 붙들고 설득했지만 아버지에게는 집도 있고, 농장도 있으며, 돈도 많아 보였기 때문에 아들은 유산이 탐나 아버지를 살해했던 것이다. 이 범행은 한 달 만에 들통이 나버렸다. 자기 아버지가 알리지도 않은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살인자 자신이 경찰에 신고를 했던 것이다. 이 한 달 내내 아들은 몹시 방탕한 생활을 했는데, 그가 집을 비운 틈에 경찰은 마침내 시체를 찾아내고 말았다. 마당에는 더러운 시궁창을 판자로 덮은 하수도가 마당의 길이만큼 길게 지나가고 있었다. 시체는 이 하수도에 버려져 있었다. (…) 그는 자백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귀족의 신분과 관직을 박탈당했고, 20년의 징역이 선고되었다. 나와 함께 사는 동안 줄곧 그는 괜찮은 사람이었고, 쾌활한 영혼을 지니고 있었는데, 절대 바보는 아니라고 해도 극히 무분별하고 경솔하며 판단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결코 한 번도 그에게서 어떤 특별한 잔혹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죽음의 집의 기록』, 이덕형 옮김, 열린책들, 2010)
『죽음의 집의 기록』은 사실상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이야기지만 검열을 의식하여 가공의 인물인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고랸치코프'라는, 아내를 죽인 죄로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한 유형수의 수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부친 살해범의 이야기는 『죽음의 집의 기록』의 앞부분에 처음 나온다. 물론 그 이야기가 이 작품의 주요 줄거리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형소에서의 에피소드 중 하나다. 부친 살해범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의 후반부인 2부 7장 '항의' 편에 다시 등장하며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억울한 유형살이, 진범이 잡히다
"이 장을 시작하면서, 이미 고인이 된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 고랸치꼬프 씨에 대해 『기록』의 발행인은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을 알리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죽음의 집의 기록』의 첫 장에서 귀족 출신의 한 부친 살해범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이 이야기는 때때로 죄수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어떤 감정도 없이 이야기하곤 하는 그런 예로 들 수 있다. 살해범은 법정에서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사건의 상세한 부분까지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판단해보면, 범죄는 믿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는 것도 이야기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기록』의 작가에게 말하기를, 범인이 완전히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빚에 쪼들리고 있었고, 그래서 부친 사후의 유산을 탐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고 말했다. 또한 이 부친 살해범이 이전에 근무했던 도시 전체가 이 사건에 대해 한결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 마지막 사실에 관해서 『기록』의 발행인도 충분히 믿을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결국 『기록』에서 이야기된 것은, 감옥에서 살인자가 항상 가장 즐거운 심적 상태에 있었으며, 결코 바보는 아니지만, 매우 무분별하고 경박하고 사리 분별없는 자일 뿐, 『기록』의 작가는 그에게서 어떤 특별한 잔인성 같은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런 말도 덧붙여 있다. '물론 나는 이 범죄를 믿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죽음의 집의 기록』의 발행인은 시베리아로부터 범인이 정말로 무죄였으며, 헛되이 10년 동안을 징역 속에서 고통 받았다는 것과 그의 무죄가 재판을 통해 공식적으로 밝혀졌다는 소식을 입수하였다. 또한 진범이 검거되어 자백하였다는 것과 이 불운한 사람은 이미 감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발행인은 이 소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결코 아무런 의심도 할 수 없다…. 더 이상 덧붙일 필요는 없다. 이 사실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에 대해서, 그런 끔찍한 죄명하에서 아직 젊은 나이에 파괴되어버린 인생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확대시킬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고, 그 자체로도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다.(『죽음의 집의 기록』)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이 『죽음의 집의 기록』의 나(알렉산드르 고랸치코프)도, 작가도, 발행인도 모두 도스토옙스키 자신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가공의 인물 고랸치코프는 유형을 마치고 이주민이 되어 K시에서 홀로 살다가 쓸쓸하게 죽었다. 책 속에 언급된 가상의 도시 K시는 1857년 도스토옙스키가 마리야 이사예바와 결혼한 시베리아의 쿠즈네츠크로 알려져 있다.
부친 살해 사건의 범인으로 옴스크 감옥에서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억울한 유형살이를 한 사람은 토볼스크 출신의 육군 소위 일린스키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유형소에 있을 때부터 이 사건을 소설화하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여기에 스타라야루사에 살 때 발생한 노브고로드 신문 등에 실린 부친 살해 사건도 당연히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스타라야루사는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무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는 맏아들 드미트리가 부친 살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시베리아 유형길에 오르게 된다. 억울하지만 부친 살해 당일의 행적이 살해범으로 오인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부인하기에는 앞뒤가 너무 딱딱 들어맞는다. 소설은 드미트리가 유형지로 가는 도중 탈주해 애인 그루센카와 함께 미국으로 달아나는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소설에서 실제 부친 살해범은 부친 집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사생아 스메르쟈코프다. 그는 사건 후 자살한다. 그러나 그의 자살이 판결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가 죽기 석 달 전에 완성되었다. 완성된 부분은 도스토옙스키가 구상한 전체 소설의 절반이며, 그는 셋째 아들 알료샤를 본격적인 주인공으로 한 2부를 계획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미완에 그치게 된 것이다. 만약에 2부로 이어졌다면 드미트리가 계획대로 탈주에 성공할지, 아니면 그대로 유형소에 끌려갔다가 후에 무죄의 증거가 발견되어 중도에 출옥하게 될지, 그런 이야기들도 흥미로웠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사후 한 달 뒤쯤인 그해 3월 1일 발생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사건도 반드시 소설에 등장했을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을 시베리아에서 풀어준 알렉산드르 2세를 은인으로 생각했으므로 생전에 암살 사건을 접했다면 매우 애통해했을 것이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무대가 된 소도시는 바로 스타라야루사다. 소설에는 이 작은 도시의 풍경이 자주 등장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스타라야루사를 오가며 이 소설을 썼다. 스타라야루사가 도스토옙스키 사후 100년이 되는 1981년 그가 살던 별장을 정식 박물관으로 개관한 데 이어 2018년 7월, 인근에 2층 규모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소설 박물관'을 새로 연 것은 이곳이 도스토옙스키의 명작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무대이며 그가 이곳에 살면서 그 소설을 썼다는 것이 스타라야루사로서는 크나큰 자랑거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