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카카오 스토리 인스타그램 네이버 포스트 네이버 밴드 유튜브 페이스북

통합 검색

인기검색어

HOME > STYLE

STYLE

진짜보다 가짜!

럭셔리한 패션의 상징이었던 모피는 이제 입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할 수밖에 없는 애증의 옷이 되어버렸다. 대신 그 자리를 온갖 질감과 컬러, 프린트를 자유자재로 넣을 수 있는 페이크 소재가 차지하고 있다.

On January 18, 2019

3 / 10
/upload/woman/article/201901/thumb/41078-351809-sample.jpg

 

2001년에 브랜드를 론칭한 디자이너 스텔라 맥카트니는 모피는 물론 가죽까지, 동물성 소재는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는 채식주의자이자 동물 보호가로서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외롭고도 긴 싸움을 해왔다. 털처럼 뽀송한 질감의 겨울 재킷을 만들기 위해 라마류 동물의 털을 하나하나 주워서 재킷에 붙였다는 보도 자료를 보았을 땐 솔직히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은 생각도 했음을 고백한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이 이야기의 결론은? 그녀는 옳았고, 비웃는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은 틀렸다! 지금 패션계에서 동물을 고통스럽게 사육하고 심지어 (일부에서는) 산 채로 털을 벗기는 잔인한 방식으로 획득한 모피를 만드는 것, 입는 것은 모두 명백히 ‘언’패셔너블한 것이 되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동물보호협회 회원들은 파리, 뉴욕, 밀라노 등 전 세계 주요 패션쇼가 열리는 도시를 찾아 모피 반대 시위를 벌여왔다. 2002년에 빅토리아 시크릿 런웨이 위에 동물보호협회 회원이 모피 반대 피켓을 들고 난입한 사건은 패션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것이었다. 모피, 아니 엄밀히 말해 엄청난 규모의 산업으로서 모피를 공개적으로 옹호해온 미국판 <보그>의 안나 윈투어 편집장은 동물보호협회 회원들의 집요한 공격을 당했다. 이 패션계의 우아한 대모는 파리에서 클로에 컬렉션에 가는 길에 난데없이 두부파이 세례를 받는 수모를 당했고, 맨해튼 포시즌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도중에 죽은 쥐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공격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동물보호협회 회원들은 초창기에는 그저 사나운 훼방꾼에 불과해 보였지만, 점점 대중적인 공감대를 얻어내더니 이제는 가시적인 성과로 열매를 맺고 있다.

자라, H&M으로 대표되는 패스트 패션 업계는 동물보호협회인 페타(PETA)가 2013년 중국 앙고라 토끼 농장의 비인도적 생산 과정을 폭로한 직후 관련 제품의 판매를 중단했다. 2016년에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캘빈클라인, 휴고보스, 라코스테, 비비안 웨스트우드, 랄프 로렌, 타미힐피거가 모피를 사용한 제품의 판매를 중단하는 ‘퍼 프리(Fur Free)’를 선언했다. 그리고 2017년 10월, 구찌마저 ‘퍼 프리’를 선언, 동물보호 활동을 펼치는 40여 개 단체가 소속된 모피반대연합에 합류하고 2018년 S/S 컬렉션부터 밍크, 여우, 토끼, 라쿤 등 진짜 모피 제품을 판매하지 않았다(양, 염소, 알파카 모피는 제외). 사실 구찌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많은 모피 베스트셀러를 보유하고 있고, 심지어 바로 직전에 열린 2018 S/S 시즌의 컬렉션에서 리얼 모피 코트를 버젓이 선보였던 터라 퍼 프리 선언을 한 것이 다른 브랜드보다 훨씬 전격적으로 느껴졌다. 이후 정리(?)는 신속하게 이루어져 구찌의 창고에 쌓여 있던 모든 모피 제품은 경매로 처분했고, 수익금은 동물보호 관련 단체인 휴메인 소사이어티 인터내셔널(HSI), 이탈리아 동물보호 단체인 LAV 등에 기부했다. 구찌의 CEO 마르코 비차리는 “모피를 쓰는 건 현대적이지 않다. 시대에 뒤떨어진 방법이다”라고 소신을 밝혔다.

2018년에도 메종 마르지엘라, 버버리, 코치, DVF, 마이클 코어스, 베르사체, 그리고 샤넬까지 퍼 프리 선언이 이어졌다. 베르사체의 디자이너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한 영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패션을 위해 동물을 죽이고 싶지 않고, 옳지 않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페타는 홈페이지에 “도나텔라는 자신이 사랑하는 반려견 오드리와 다를 바 없는 동물들이 몽둥이로 맞고, 전기 도살당하는 일들이 비양심적이란 걸 깨달았다”며 고마움의 표시로 여우 모양을 한 비건 초콜릿을 선물했다고 자랑스럽게 알렸다. 샤넬은 일단 악어, 도마뱀, 뱀 등 희귀 동물의 가죽을 사용하지 않고 향후 모피 사용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샤넬의 패션 부문 사장인 브루노 파블로프스키는 “가죽 제품에 대한 주문이 쇄도하지만 우리의 윤리 기준에 부합하는 동물 가죽의 수급이 점점 어려워져 앞으로 쓰지 않기로 했다”고 밝히며 당장 홈페이지에서 비단뱀 가죽으로 만든 가방의 목록부터 삭제했다. 브랜드의 행보에 발맞춰 런던 셀프리지 백화점과 온라인 쇼핑몰 육스, 네타포르테 등 유통업체도 모피반대연합의 ‘퍼 리테일 프로그램’에 합류해 밍크, 코요테, 흑담비, 여우, 사향쥐, 토끼, 너구리 등 모피 제품 판매 중단을 선언했다. 런던 패션 위크는 2019년 S/S 컬렉션부터 런웨이 무대에 모피 제품을 올리지 않고 있으며, 영국, 북아일랜드,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등 유럽의 많은 나라가 국가적으로 모피 생산을 금지했다(세계 2위 모피 생산국이었던 노르웨이마저 포함!). 지난 2018년 3월 2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모피 판매를 금지하는 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돼 2019년 1월 1일부터는 샌프란시스코 내에서 모피 제품을 구매할 수도, 반입할 수도 없다. 이 정도면 퍼로부터 탈출하는 패션계의 행렬은 가히 엑소더스급 아닌가?
 

3 / 10
/upload/woman/article/201901/thumb/41078-351808-sample.jpg

 

브랜드, 디자이너들이 이익을 포기하고 자신 있게 퍼 프리 선언을 할 수 있는 배경은 뭘까?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기술의 발전으로 모피를 대신할 만한 다양한 대체재를 확보하게 됐다. 모피를 얻기 위해 동물에게 잔혹한 방법을 쓰는 것이 불필요해졌다는 뜻이다”라고 명쾌하게 밝혔다. 신소재의 등장으로 굳이 어떤 생명에 위해를 가하면서 모피를 얻어야 할 필요성이 현저하게 낮아졌다는 뜻이다. 과거 인조 모피는 폴리에스테르 등의 화학섬유로 진짜를 모방한 ‘싸구려’로 폄하되었으나 현재의 인조 모피는 하이패션 브랜드의 런웨이나 심지어 오트 쿠튀르의 런웨이에 올라도 부끄럽지 않은 비주얼을 갖게 된 것이다. 스텔라 맥카트니는 2015년 F/W 컬렉션에서 처음으로 인조 모피 컬렉션을 선보이며 ‘요즘의 페이크 퍼는 진짜와 다를 바가 없다. 나도 진짜와 페이크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라고 했다. 한편, 인조 모피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이 있었던 1990년대 초부터 인조 모피를 실험적으로 사용해온 디자이너 드리스 반 노튼은 “어떤 의미에서 리얼보다 페이크가 더 패셔너블하다”면서 2017년 F/W 런웨이에는 모두 페이크 퍼만을 올렸다.

누군가에게 페이크 퍼는 새로운 트렌드, 산업으로서 새로운 기회가 됐다. 페이크 퍼 브랜드를 대표하는 영국의 슈림프스는 2013년에 론칭해 벌써 5주년을 맞았다. 대학에서 텍스타일을 전공한 디자이너 한나 웨일랜드는 동물보호의 거창한 구호보다는 그저 페이크 퍼 자체의 느낌이 좋아서 브랜드를 론칭했다. “페이크 퍼는 특별한 소재다. 원하는 컬러와 텍스처를 구현할 수 있고 프린트를 더하거나 완전히 새롭게 연출할 수 있다. 구불거리는 형태와 직선 모양도 만들 수 있고, 요즘 사용하는 모다크릴릭 혼방 플러시 소재의 촉감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슈림프스를 필두로 샬롯 시몬, 자케 등 페이크 퍼를 트렌디하게 재해석해 선보이는 신생 브랜드는 해외 셀렙이 사랑하는 브랜드로 이름을 얻고 있고, 한국에도 래비티, 랭앤루 등 컬러풀한 페이크 퍼로 급성장한 브랜드가 등장했다. “가짜는 시크하지 않다. 하지만 페이크 퍼로 당신은 시크해질 수 있다.” 샤넬과 펜디의 수석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가 남긴 어록이다.

하지만 완벽한 페이크 퍼의 승리로 마무리될 것처럼 보였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동물의 생명권 존중이라는 가치에는 백번 동의하지만, 페이크 퍼는 ‘환경오염’이라는 태생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음을 간과하지는 말자. 동물보호론자들이 환희에 찬 ‘승리’를 외칠 때, 반대쪽에서 환경보호론자들은 지구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페이크 퍼의 주재료인 폴리에스테르가 뿜어내는 엄청난 미세 플라스틱 쓰레기와 심각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페이크 퍼의 승리가 결국 소비자들의 인식 변화에서 시작된 것임을 생각하면, 페이크 퍼를 소비하는 우리의 자세 또한 그리 호락호락해서는 안 된다.

CREDIT INFO
에디터
정소나
명수진(패션 칼럼니스트, <최고의 명품, 최고의 디자이너> 저자)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쇼비트
2019년 01월호
2019년 01월호
에디터
정소나
명수진(패션 칼럼니스트, <최고의 명품, 최고의 디자이너> 저자)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쇼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