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의 용광로라 불리는 미국 뉴욕에서 사업가로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고 한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브랜드가 론칭했다가 사라지는 까닭에 '뉴욕은 전쟁터'라는 말도 나왔다. 혹자는 애증의 도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코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도시가 바로 뉴욕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살벌한 뉴욕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한국 패션 디자이너가 있다. 10여 년 전 밀라노 어학연수 당시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를 따라 명품 브랜드 발렌티노 생산 공장에 놀러 갔다가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는 유나양이 그 주인공이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불러주던 애칭 '유나양'이라는 이름을 걸고 브랜드를 론칭한 그녀는 2010년 F/W 뉴욕 패션 위크를 통해 데뷔한 후 지금까지 10년 동안 할리우드 스타가 사랑하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MTV 어워즈에서 '유나양'의 드레스를 입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의 주연배우 대샤 플란코가 그해 <피플>지에서 패셔니스타로 선정되기도 했다. 화려한 커리어만큼이나 화려한 패턴을 즐겨 사용하는 유나양에게 뉴욕에서 한국 패션 디자이너로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럽파 뉴욕 패션 디자이너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패션 디자이너가 됐어요. 커리어가 특이해요.
대학 졸업 후 밀라노로 어학연수를 갔어요. 부모님은 "한국에서 취업이나 하지 웬 밀라노 어학연수냐"며 반대하셨죠. 적당히 공부하다 1년 후에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를 따라 발렌티노 생산 공장에 갔던 게 제 인생을 바꿔놨어요. 패션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밀라노에서 가장 유명한 패션 학교에 등록했고, 1년 후 선생님의 취업 권유로 눌러앉게 된 거예요. 이탈리아에서 유명하다는 브랜드에 매일 새벽마다 이력서를 보냈어요. 아마 300~400통은 될 거예요. 그중 유일하게 프리마클라쎄에서 연락이 왔어요. 이력서와 함께 보낸 스케치 한 장이 알비에로 마르티니의 마음을 움직였대요. 마르티니가 그해 새 시즌에서 쓰려고 주문해놓았던 원단이 제 스케치 속 원단과 똑같았던 거예요. 운명이라 생각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패션 디자인 일을 시작하게 됐고,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유럽 디자이너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아요. 그것도 '전쟁터'인 뉴욕으로 말이죠.
"왜 뉴욕인가"라는 질문은 끊임없이 받아요. 처음엔 단순했어요. 야망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용광로 같은 뉴욕에서 일해보고 싶어서 건너갔죠. 뉴욕에 가보니 이유가 더 분명해졌어요. 뉴욕 맨해튼에 있는 패션 디스트릭트는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옷이 이곳에서 탄생되죠. 원단 공장부터 제조업까지 모든 시스템이 이곳에 집결돼 있어요. 유럽적인 감각과 뉴욕 장인들의 손길이 만나면 제가 지향하는 '하이엔드' 브랜드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중 뉴욕 패션 디스트릭트가 제격이라고 판단했죠. 저는 그곳에서 제조와 생산이 모두 이뤄지는 '메이드 인 뉴욕'을 고집해요.
'메이드 인 뉴욕'을 고집하는 건 유나양이 궁극적으로 만들고 싶은 옷에 대한 신념의 결과가 아닐까요?
다음 세대가 물려 입는 옷을 만들고 싶어요. 엄마가 딸에게, 그 딸이 또 딸에게 물려주는 명품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옷을 만들고 싶어요. 때로는 한 사람을 위해 옷을 만들기도 해요. 대량생산을 하기보다 한 벌의 옷을 만들더라도 품질에 신경 씁니다. 그래서 뉴욕의 장인들과 협업하죠. 바느질 한 땀 한 땀에 장인들의 정성과 노력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유나양'은 비싸요. 원가가 높기 때문이죠. 패션 디자이너는 옷을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가진 작은 재능으로 제조업자부터 세일즈맨, 바이어까지 약 22명의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해요. 의미 있는 직업이죠. 저는 뉴욕 제조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그들과 함께 가족처럼 성장하는 디자이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세일즈맨과 바이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요. 그들이야말로 고객과 가장 가까이에서 소통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뉴욕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과 가장 힘들었던 장면을 꼽아본다면?
아직도 짜릿한 기억은 데뷔 쇼였던 2010 F/W 뉴욕 패션 위크예요. 그날은 뉴욕 역사상 눈이 가장 많이 내린 날이었어요. 거의 제 엉덩이까지 왔으니까요. 쇼를 못 할 줄 알았죠. 힘들게 쇼를 마쳤는데 다음 날 뉴욕 패션지 <우먼스데일리>에 커버스토리로 실린 거예요. '확실한 승리자'라고 표현됐죠. 눈물 날 정도로 기뻤어요. 시작이 좋았던 덕분에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데뷔 쇼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어요. 2년 후에 슬럼프가 왔죠. 세 번째 시즌에 대한 반응이 안 좋았어요. '뉴욕에 오면 누구나 성공하나 보다' 하고 자만했던 제게 아주 쓰라린 가르침이 됐죠. 무관심이 무서운 거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겸손해야 한다는 걸 배웠고, 잘 될 때일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어요.
그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했나요?
사실 그때 다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어요. '나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싶었죠. 좌절하고 있던 그때 21세기 폭스 영화사에서 만든 리즈 위더스푼과 로버트 패틴슨이 출연한 영화 <워터 포 엘리펀트>의 극 중 의상을 재해석해 레드카펫 행사를 하게 됐어요. 반응이 좋았고, 그 후엔 와인드업레코드 소속 록밴드 그룹과 컬래버레이션을 했죠. 멤버들은 제가 만든 옷을 입고 타임스스퀘어 나스닥 건물에 마련된 무대에 올랐어요. 가수 머라이어 캐리의 남편 닉 캐논과의 컬래버레이션 작업도 슬럼프를 이겨내는 계기가 됐어요.
패션 디자이너로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을 것 같아요.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누구인가요?
2018년 일본 오사카 한큐백화점에서 열린 쇼에서 만난 일본 소녀가 기억에 남아요. 오사카 근처의 나라라는 도시에서 저를 보겠다고 온 여학생이 직접 쓴 손편지를 주고 갔죠. 제가 자기의 롤모델이래요. '10년 동안 내가 허투루 산 게 아니구나' 싶은 마음에 울컥했어요. 유명 셀러브리티도 많아요. 그중엔 2016년 메트 갈라쇼 무대에 섰던 메이 머스크가 가장 인상 깊어요. 메트 갈라쇼는 쟁쟁한 명품 브랜드가 게스트에게 자기 브랜드의 옷을 입히고 싶어 하는 패션계의 슈퍼볼과 같은데, 저는 모델보단 일론 머스크의 엄마로 더 알려진 메이 머스크에게 이브닝드레스가 아닌 점프슈트를 입혔어요. 35년 동안 모델로 활동하면서 세 자녀를 키워낸 싱글맘으로서의 강인한 모습을 강조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대박이 났어요. 제게도, 메이 머스크에게도 제2의 전성기를 맞게 해주었죠.
주 고객이 미국 상류층이라고 들었어요. 그들이 '유나양'을 좋아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실크 같은 부드러운 소재를 물 흐르듯이 뽑는 걸 잘해요. 그래서 백인 상류층 출신 디자이너가 만든 것 같다고들 하죠. 그리고 '메이드 인 뉴욕'에 대한 제 고집이 먹히는 것 같아요. 20대부터 70대까지 주로 강하고 소신 있는 여성들이 제 옷을 입죠. '남들이 모르는 걸 나는 안다'는 식의 자부심으로 '유나양'을 입는 것 같아요.
일이 주는 즐거움과 고통 중에 어떤 게 더 스스로를 자극하나요?
즐거움과 고통은 항상 함께 오는 것 같아요. 1년에 두 번 뉴욕 패션 위크에 참여하는데, 지난번보다 나은 컬렉션을 선보여야 한다는 부담감과 압박감이 있죠. 물론 그런 고통을 이겨내고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의 보람도 큽니다. 성취감과 고통 사이에서 저를 버티게 하는 것, 저를 자극하는 것은 '사람'이에요. 저를 믿어준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이 직업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직업이기 때문에 저를 성공하게 하는 것도, 실패하게 하는 것도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미국 뉴욕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산다는 건, 용광로에 몸을 던지는 것과 같죠.
그녀가 한국에 온 이유
오랜만에 서울을 찾았다고 들었어요.
성수동 구두 장인이 값싼 공임으로 고생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한 켤레를 팔면 6,500원 정도를 번대요. 이렇게 열악한 환경은 분명히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방증입니다. 저는, 디자이너는 빛나는 직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빛내주는 직업이라고 배웠어요. 장인, 제조업자를 동등하게 대우하고, 그들과 함께 성장하는 직업이라고 배웠는데, 제가 배운 선진국 시스템으로 그분들을 돕고 싶다고 생각하던 그때 '코트라(KOTRA, 코트라는 '성수동 장인 돕기 프로젝트'를 발족하고 유나양과 함께 현장 방문과 멘토링을 시작했다)'에서 연락이 와서 흔쾌히 하겠다고 했어요. 오자마자 문재인 대통령 구두를 만들어 화제가 된 장애인 구두 회사 '아지오', 청년과 어르신의 노동력을 잇는 '서울 가죽 소년단' 등을 차례로 방문해 멘토링을 해주었어요. 시스템도 바로잡아주고요. 롯데백화점 등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기로 했는데 판매 수익도 좋았으면 좋겠어요.
멘토링 정도로는 낙후된 시스템을 고칠 수 없을 텐데요.
저는 그동안 뉴욕과 도쿄를 오가며 일했고, 미국 팍스 영화사 등 대형 회사와 협업하면서 디자인은 물론 시장 판매까지 총괄한 경험이 있어요. 상품 준비부터 가격, 전시, 유통까지 다 할 수 있죠. 자신 있다기보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도전했다는 뜻이에요. 첫 번째는 제가 투입돼 제품의 퀄리티를 높이는 게 목적입니다. 예를 들면 '아지오'는 장애인들이 만들어 유명해졌는데, 이제는 '장애인이 만든 구두'가 아니라 '장인의 구두'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품의 매력으로 홀로 설 수 있어야죠. 디자인보다는 방수 가죽 등 좋은 소재를 써서 백화점 팝업 스토어에 내놓고, 아웃소싱과 해외 유통망을 뚫는 방법 등을 찾고 있어요.
이렇게 발 벗고 나선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을 것 같아요.
패션업계는 한국을 흔히 제조업 정도를 하는 국가로 생각해요. 저는 이번 성수동 장인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이 고품격 패션을 만드는 나라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평소에도 환경문제나 젠더 이슈는 항상 관심을 두고 있었어요. 시인이나 작가라면 그런 동시대 이슈를 글로 풀어내겠죠. 전 디자이너이니까 데뷔 때부터 컬렉션에서 옷으로 표현한 거죠. 최근엔 '성차별'을 주제로 한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어요.
말이 나온 김에 '여자로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뉴욕에서 여자로 사는 건 어떤가요?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 뉴욕은 이민자의 도시예요.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어요. 동양 여성은 조용하고 곰살맞을 거라는 선입견이 있죠. 어떻게 보면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거죠. 그걸 깨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아요. 지금은 저를 '동양에서 온 디자이너'로 대우하지 않아요. 그냥 '패션 디자이너'로 불리죠.
뉴욕을 선망하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뉴욕에서 성공하는 걸 보통 '별을 쏜다'라고 표현해요. 뉴욕에서 성공한 사람은 세계 어디를 가도 성공한다고 말하죠. 어렵고 힘들지만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뉴욕이에요. 꼭 패션 분야가 아니라도 말예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면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해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스스로 생각할 때 가장 자랑스러운 건 뭔가요?
2010년부터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쇼를 한 건 정말 자랑스러워요. 당연히 만족스럽지 않을 때도 있었고, 예산이 부족해 원하는 모델을 못 쓸 때도 있었고, 보여주기 싫은 옷도 있었죠. 그런데도 조금씩이라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그게 쌓여서 신용이 되고 브랜드가 되고 로열티가 생긴 것 같아요. 뉴욕 사람들은 저보고 독하다고 말해요. 그래도 전 이런 제 마인드가 좋고, 고집이 좋아요. 그게 저고, '유나양'인걸요.
패션 디자이너 유나양은…
뉴욕에 기반을 둔 유나양 컬렉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패션 디자이너.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한 후 밀라노로 건너가 마랑고니 패션스쿨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밀라노의 프리마클라쎄, 클레멘트 리베이로, 앤소피백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미국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 초빙교수로 활동한 바 있으며, 지금까지 총 18회에 걸쳐 뉴욕 패션 위크 공식 스케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