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카카오 스토리 인스타그램 네이버 포스트 네이버 밴드 유튜브 페이스북

통합 검색

인기검색어

HOME > LIFESTYLE

LIFESTYLE

이정식의 러시아 문학 기행 ⑲

도스토옙스키, ‘왕국을 다스릴 능력의 소유자’라고 안나를 칭찬하다

On November 27, 2018

3 / 10
/upload/woman/article/201811/thumb/40627-344716-sample.jpg

노브고로드 역과 넵스키 대공 흉상.

노브고로드 역과 넵스키 대공 흉상.

도스토옙스키의 질투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약간의 의처증 증세가 있었다. 아내가 스물다섯 살이나 어리니 그랬는지 모르지만 때론 매우 심했다.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누가 안나에게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도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드러내놓고 화를 냈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무대에서 낭독이나 강연을 할 때 안나가 지정석에 꼼짝 안 하고 앉아 있는지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을 했다. 안나는 그러는 도스토옙스키가 창피하고 화가 났지만 그래도 그를 이해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흥분이 가라앉으면 안나에게 자신의 행위를 사과하고 다시는 질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렇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언제나 안나의 모든 능력을 높이 인정하고 고마워했다. 도스토옙스키는 1870년대 후반, 요양 치료를 위해 독일 엠스에 갔을 때 안나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의 사랑하는 이여, 무엇 때문에 당신은 '범인(凡人)'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소? 당신은 회유의 여인이며 더욱이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당신은 당신의 능력을 믿지 않는구려. 당신은 우리 집안 전부와 내 사업을 꾸려 나갈 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나로부터 알료샤에 이르기까지 변덕스럽고 지쳐빠진 우리를 당신 등에 져 나르고 있고. (이 편지는 막내가 살아 있던 짧은 기간 중에 쓰인 것이다) … 당신이 여왕으로 태어나 왕국 하나를 전부 떠맡는다 해도 당신은 어느 누구보다 더 잘 다스릴 것이오. … 당신은 그처럼 풍부한 재주와 양식과 선의와 운영 능력을 소유하고 있소. (『도스토옙스키 평전』)

스타라야루사에 평생 처음 마련한 자기 집

도스토옙스키는 자기 집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1877년 스타라야루사의 별장을 처남 이름으로 사들여 가족들과 함께 살았는데, 그것이 사실상 생애 처음 마련한 자기 집이라고 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4년간의 유럽 방랑에서 돌아온 다음 해인 1872년부터 매해 봄부터 가을까지 휴양지인 소도시 스타라야루사에서 보냈다. 그는 이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스타라야루사를 오가며 살았다. 스타라야루사는 도스토옙스키가 살 때는 1만 명 정도 규모였다. 지금도 인구가 3만 명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 한적한 곳이다. 이 조그만 도시를 소개한 것은 조카사위 블라지슬라블레프 교수였다. 조카사위는 스타라야루사에 온천이 있어 건강에 좋다며 이곳 루체프 사제의 별장을 소개해주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곳에 온 것은 단지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빚쟁이들과 지인, 친척들의 잦은 방문 때문에 집필에 집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처음 스타라야루사에 간 것은 1872년 5월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호프강까지 이동해 배를 타고 노브고로드까지 간 후 노브고로드에서 다른 배로 일멘 호수를 건너 스타라야루사까지 갔다. 일멘 호수는 스타라야루사 바로 위쪽에 위치한 큰 호수다. 강과 호수에서 배를 이용하는 것이 당시에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다.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스타라야루사 선착장에서 마차를 타고 루체프 사제의 별장을 찾아갔을 때 사제 가족이 마중 나와 있었다. 도스토옙스키 가족은 그때부터 루체프 사제의 가족과 가깝게 지냈다. 첫해는 루체프 사제의 별장을 이용했으나, 이듬해인 1973년에는 다른 사람이 그 별장을 먼저 빌렸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다른 집을 알아보았다. 그것이 현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이 되어 있는 육군 대령 출신의 알렉산드르 그리베 씨의 별장이다. 1층에는 그리베 씨 가족이 살고 2층에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살았다. 가족들은 그리베 씨 집을 좋아했다. 도스토옙스키 가족은 1874년에서 1875년으로 이어지는 겨울에는 여러 사정으로 그리베 씨 집 대신 레온치예프 장군의 별장에서 지내기도 했지만, 봄이 되자 다시 그리베 씨 집으로 이사했다.

그러던 중 1877년 초에 그리베 씨가 세상을 떠난 후 유족이 별장을 내놓자 도스토옙스키는 이 집을 1,150루블에 처남의 이름으로 사들였다. 도스토옙스키 사후에는 안나의 이름으로 바꿨다. 처음에 처남 이름으로 산 것은 당시 그만한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아직 빚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리베 씨의 별장은 넓은 테니스 코트와 텃밭이 있었고, 정원에는 반야(러시아식 사우나)가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반야를 좋아했다. 그리고 집 바로 옆으로는 페레리치차강이 흐르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서재에서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면 오래된 나무 사이로 페레리치차강이 바로 눈앞으로 흐르는 풍경이 아름답다. 도스토옙스키는 스타라야루사에 온 첫해인 1872년 오랫동안 다듬어오던 『악령』을 마무리했다. 『미성년』도 이곳에서 썼고, 최후의 대작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도 많은 부분을 스타라야루사에서 썼다. 도스토옙스키는 『미성년』을 쓰면서부터 인쇄 전지 한 장당 250루블을 받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최고로 받았을 때가 장당 150루블이었다. 당시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 같은 작가는 장당 500루블을 받고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같은 원고료의 차이에 대해 1874년 12월 안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너무나 저평가 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한 일도 있다. 1880년 6월 모스크바에서 행한 푸시킨 동상 제막식 연설문도 스타라야루사에서 완성했다. 푸시킨 동상 제막식 연설은 도스토옙스키가 문학계에서 높아진 자신의 위상을 재삼 확인한 기회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귀국 후 안나가 출판업을 시작해 가계를 돕기 시작하면서 가정의 경제 형편도 조금씩 풀려갔고 스타라야루사에 별장을 얻으면서 도스토옙스키는 전에 없이 안정된 상황에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가족들은 스타라야루사의 생활에 만족했으며 안나가 1875년 이곳에서 둘째 아들 알료샤를 낳으면서 더 애착을 갖게 되었다.

3 / 10
/upload/woman/article/201811/thumb/40627-344717-sample.jpg

별장 옆을 지나는 페레리치차강.

별장 옆을 지나는 페레리치차강.

막내아들 알료샤의 사망

그러나 그러한 행복은 마냥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스럽던 알료샤가 3년 만에 갑자기 죽은 것이다. 알료샤는 세 살이었다. 54세 늘그막에 얻은 막내 아이였기 때문인지 도스토옙스키는 알료샤에 대해 유난히 더 애정을 쏟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었다. 그것도 도스토옙스키의 지병이기도 한 간질로 인한 사망이었다. 부부의 슬픔은 너무도 컸다. 알료샤를 잃고 도스토옙스키 부부가 얼마나 애통해했는지, 도스토옙스키는 그 심정을 소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속에 그대로 적어놓았다. 세 살짜리 아들을 잃은 어느 아낙네가 조시마 장로를 찾아가 슬픔을 호소하는 이야기다.

조시마 장로가 자신을 찾아온 아낙네에게 묻는다.
"그런데 어째서 울고 있는 거요?"
"아들놈이 불쌍해요. 신부님. 겨우 세 살배기였어요, 세 달만 더 있으면 만 세 살이 되는 아이였어요. 아들놈 때문에, 신부님, 아들놈 때문에 괴롭습니다. (…) 그 애는 세상을 뜬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앞에 살아 있는 것만 같아요. 제 영혼은 고갈되어버렸어요. 그 애의 조그만 속옷이나, 저고리 혹은 장화만 보아도 울음이 터져 나오지요. 그 애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하나하나 늘어놓고 쳐다보면 눈물이 쏟아지는 겁니다. (…) 저는 단 한 번만이라도 그 애를 보고 싶어요. 단 한 번만이라도. 그 애한테 가까이 다가가거나 말을 걸지 않아도 좋아요. 마당에서 놀다가 방에 들어와서는 귀여운 목소리로 "엄마, 어디 있어?" 하고 부르곤 하던 그 음성을 구석에 숨어서 잠시라도 바라보며 듣고 싶어요. 조그만 발로 방 안을 콩콩거리며 뛰어다니던 소리를 한 번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듣고 싶어요. 그래요, 그 애가 종종 나를 부르며 달려와서는 웃곤 하던 모습이 생생해요. 그 애의 발자국 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요. 그 소리만 들어도 그 애인지 아니지 알 수 있으련만! 그런데 그 애는 이젠 없어요, 신부님, 죽고 없는 거예요, 그리고 다시는 그 애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어요! 여기 그 애의 조그만 허리띠가 있지만, 그 애는 죽고 없어요. 이제 저는 결코 그 애를 볼 수도, 그 애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어요!"
그녀는 품속에서 자기 아들의 장식 달린 조그만 허리띠를 꺼냈으며, 그것을 보자마자 흐느낌으로 몸을 떨었다. 얼굴을 가렸던 손가락 사이로 갑자기 강물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그것은." 장로가 입을 열었다. "먼 옛날에 '라헬이 자식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으되 위안을 얻지 못했으니, 그 자식들이 죽고 없었기 때문'이라 했으니, 아기 어머니, 당신도 지상에서 그 같은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 그러니 위안을 얻으려 하지 말고 우시오. 단지 울 때마다 당신의 아들이 하늘나라의 천사가 되어 내려다보다가 당신의 눈물을 보고 기뻐하며 그것을 하느님께 알려드린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당신은 어머니의 위대한 슬픔을 겪게 되겠지만 결국 그것은 고요한 기쁨으로 변하여 그 쓰라린 눈물도 죄악으로부터 구원해주는 고요한 위안과 진정한 정화의 눈물이 될 겁니다. 그러면 저세상으로 떠난 당신의 어린 아들을 위해 기도해드리겠습니다. 이름이 뭐지요?"
"알렉세이입니다, 신부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이대우 옮김, 열린책들, 2008)

그렇다. 알렉세이는 바로 알료샤다, 알렉세이의 애칭이 알료샤다. 세 살배기 아들을 잃은 어미는 바로 안나였다. 알료샤는 스타라야루사에서 태어났으나 가족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 있을 때 죽었다. 알료샤가 죽고 나서 안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지냈다. 그 모습을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재연해놓은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사실상의 주인공이며 쓰지 못한 이 소설 2부에서 본격적인 활약을 펼칠 주인공인 셋째 아들의 이름을 알료샤라고 한 것은 죽은 아들을 소설 속에서나마 부활시키려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알료샤가 죽은 뒤 도스토옙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주지를 쿠즈네츠느이 5번지로 옮겼다. 현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이 되어 있는, 도스토옙스키가 마지막으로 살던 아파트다. 그는 20대 중반이었던 1846년에도 이 아파트에 살았던 적이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아파트에서 2년 반 후 사망한다.

/upload/woman/article/201811/thumb/40627-344726-sample.jpg

스타라야루사의 도스토옙스키 동상.

스타라야루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을 찾아서

내가 스타라야루사를 찾아간 것은 2018년 8월 하순이었다. 러시아에서의 여행이 늘 그렇지만, 이동 시간은 언제나 불편한 시간대에 걸린다. 이번에도 밤 10시경 모스크바에서 벨리키 노브고로드로 가는 기차를 타게 되었다. 노브고로드에 아침 6시 반경 도착하는 야간 열차였다. 박정곤 전 고리키문학대학 교수가 동행했다. 노브고로드 역에 도착하니 아침 햇살이 플랫폼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현재의 도시 이름은 벨리키 노브고로드인데, 흰 역사의 벽면에는 그냥 노브고로드라고 쓰여 있었다.

노브고로드는 키예프와 함께 러시아 역사와 문화의 출발점이 되는 도시다. 도시 이름을 벨리키 노브고로드로 바꾼 것은 모스크바 동남쪽의 니즈니 노브고로드와 구별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역 앞에는 옛 기사 투구를 쓴 화강암 흉상이 하나 서 있었다. 다가가 보니 넵스키 대공의 흉상이다. 넵스키라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 도로가 넵스키 대로여서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그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가 묻혀 있는 묘지도 넵스키 수도원 아닌가.

노브고로드는 일멘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볼호프강을 중심으로 세워진 상업 도시로서 10세기부터 15세기까지 자치 공국으로 존속되었다. 이곳 노브고로드 출신의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 넵스키 대공이 이끄는 군대는 1240년과 1242년 각각 스웨덴과 독일의 침공을 막아내 러시아의 영토를 지켜냈다. 이후 넵스키 대공은 러시아의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도 올라 있다.

13세기 몽골의 침입 때도 남쪽의 키예프는 초토화됐으나 노브고로드는 북쪽에 위치해 다행히 화를 면했다. 그러나 그 뒤 이반 3세 때 크게 파괴되면서 러시아의 중심적 위치를 모스크바에 내주었다. 넵스키란 '네바강의 알렉산드르'란 의미의 별명이라고 한다. 별명이 성(姓)처럼 굳어져버렸다. 비슷한 예가 많다. 한 예로, 20세기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의 '레닌'은 원래 레나강에서 따온 그의 필명이었다. 그의 본래 성은 '율리야노프'다. 그러나 모두가 그를 블라디미르 레닌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넵스키 대공은 9세기 중엽 노브고로드에 공국을 세운 류리크 왕가 태생이다.

도스토옙스키 부부와 자녀들 사진.

도스토옙스키 부부와 자녀들 사진.

도스토옙스키 부부와 자녀들 사진.

스타라야루사의 도스토옙스키 별장 박물관.

스타라야루사의 도스토옙스키 별장 박물관.

스타라야루사의 도스토옙스키 별장 박물관.

적막한 소도시 스타라야루사

박물관에 대해 설명하는 율리야 유흐노비치 관장 대행.

박물관에 대해 설명하는 율리야 유흐노비치 관장 대행.

박물관에 대해 설명하는 율리야 유흐노비치 관장 대행.

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100km가량 떨어진 스타라야루사까지 갔다. 스타라야루사란 '오래된 러시아'란 뜻이다. 도착하니 오전 8시 반이다. 아주 적막한 소도시의 풍경이었다. 박물관은 10시에 문을 연다. 차라도 한잔하며 시간을 보낼 만한 우리나라의 커피숍 같은 곳은 이곳에 없는 듯했다. 러시아의 물정을 잘 아는 박정곤 교수가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둔 게 다행이었다. 그곳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했다. 그리고 잠시 숨을 돌린 후 그리 멀지 않은 박물관을 향해 도보로 출발했다.

박물관으로 가는 도중 조그만 공원 한가운데 동상이 하나 눈에 띄었다. 한눈에 그것이 도스토옙스키 동상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그런 동상이 있는 줄은 사전에 알지 못했다. 동상은 도스토옙스키가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둥그런 통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아 무언가 생각하는 형상이었다. 2001년에 세웠다고 적혀 있다. 내가 그간 보아온 도스토옙스키 동상 중에 가장 잘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상 주변엔 푸른 잔디가 잘 정돈돼 있었고 길 건너엔 오래된 아름다운 정교회 성당의 첨탑들이 보였다.

동상을 사진에 담고 조금 걸어가니 성당이 또 하나 있다. 그곳이 도스토옙스키가 다니던 성 게오르기 성당이었다. 루체프 사제가 시무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죽은 아들 알료샤가 유아세례를 받았다. 성당 앞에는 걸인 몇 사람이 깡통을 들고 동냥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하다는 뜻이다.

이 성당을 지나 골목길을 한 블록 더 가니 오른쪽으로 강폭이 좁은 누런 황토빛의 페레리치차강이 나타났다. 그리고 강둑길 저쪽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사진에서 많이 본 진녹색 2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찾아가고 있는 스타라야루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이다.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살았던 스타라야루사 별장인 것이다. 강물이 황토빛인 것은 그곳의 토질 때문이라고 한다. 강둑에는 아름드리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다. 느릅나무라고 했다. 마당으로 들어가는 강 쪽의 작은 쪽문은 열려 있었다. 문 옆에는 '도스토옙스키 집 박물관'이라는 작은 간판이 붙어 있다. 박물관은 마당에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이 박물관 선임학예사이며 관장 대행인 율리야 유흐노비치 씨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다음 호에 계속)


Q & A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겨울 바이칼 호수

<우먼센스>가 후원하고 바이칼BK투어(주)가 주관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가는 겨울 바이칼 호수' 여행이 2019년 2월 8일부터 15일까지 7박 8일간 실시된다. 이 여행과 관련해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문제들을 문답 형식으로 풀어본다. [편집부]

3 / 10
/upload/woman/article/201811/thumb/40627-344722-sample.jpg

시베리아 횡단열차.

시베리아 횡단열차.

침대칸 내부.

침대칸 내부.

침대칸 내부.

Q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어디에서 타나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동쪽 끝은 블라디보스토크, 서쪽 끝은 모스크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행기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탑승합니다.

Q 기차 탈 때 여권 검사를 한다던데요? 러시아에서는 기차 탑승 시 여권을 검사합니다. 도중에 잠시 내렸다 탈 때는 검사하지 않지만, 여권은 늘 몸에 지니는 것이 좋습니다.

Q 바이칼 호수가 있는 이르쿠츠크까지는 기차로 얼마나 걸리나요? 거리는요? 열차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만 3일 또는 조금 더 걸린다고 보면 됩니다. 지난해 <우먼센스> 여행팀이 갈 때는 76시간 걸렸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의 거리는 4,106km로 횡단철도 전체 길이 9,288km의 44%에 해당됩니다.

Q 시간대는 어떻게 되나요? 블라디보스토크는 서울보다 1시간 빠르고, 이르쿠츠크는 1시간 늦습니다. 이르쿠츠크의 낮 12시는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오후 1시입니다.

Q 기차 안의 객실은 어떻게 생겼나요? 객실은 2인 1실인 룩스, 4인 1실인 쿠페, 그리고 3등급 개방형 침대차인 플라츠카르트 등 3종류입니다. <우먼센스> 여행에서는 4인 1실 쿠페를 2인 1실로 사용합니다. 특실인 룩스와 다름없습니다.

Q 객실에서 음주나 흡연이 되나요? 객실에서의 음주와 흡연은 금지돼 있습니다. 승강장에서의 흡연도 원칙적으로는 안 됩니다.

Q 식사나 세면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식사는 승객들이 준비해 타는 것이 보통입니다. <우먼센스> 여행의 경우 주관 여행사에서 준비하는데, 큰 도시에서는 고려인이 만든 한식 도시락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식당칸에서 식사를 할 때도 있습니다. 식당칸에서 식사를 한 후에는 '인문 강좌' 시간도 갖게 됩니다. 세면은 화장실을 이용하면 되는데 비행기 화장실보다 약간 큰 정도입니다.

Q 열차의 화장실이 정거장에 서기 전후 20~30분간 폐쇄된다던데요? 그렇습니다.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면 철로로 바로 떨어지게 되어 있어서 정거장 전후에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Q 기차 안에 마실 물이 있나요? 식수는 제공하지 않지만, 객실 복도 끝에 놓여 있는 사모바르(끓는 물을 제공하는 러시아식 큰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이용하면 좋습니다.

Q 객실은 춥지 않나요? 객실 온도는 영상 22~26℃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반팔 옷이 필요할 정도입니다. 밤에는 객실 온도도 조금 내려갑니다.

Q 바깥 기온은 어떤가요? 곳에 따라 다르지만, 2월에는 대체로 영하 10℃에서 영하 25℃ 사이입니다. 예를 들어 바이칼 호수 인근 이르쿠츠크의 2월 평균 최저/최고 기온은 영하 22℃/영하 10℃입니다.

Q 바람이 많이 불지 않나요? 옷은 어떻게 준비해야 좋은가요? 시베리아에서는 기온이 영하 20~30℃ 이하로 떨어지면 바람이 거의 불지 않습니다. 옷은 우리나라 혹한 때 입는 옷이면 되고, 신발은 방한화가 아니더라도 두꺼운 양말을 신을 수 있는 넉넉한 것이 좋습니다.

바이칼호에서 빙상 투어 중인 관광객과 사륜구동차 우아직.

바이칼호에서 빙상 투어 중인 관광객과 사륜구동차 우아직.

바이칼호에서 빙상 투어 중인 관광객과 사륜구동차 우아직.

얼어붙은 바이칼호 위를 달리는 차량들.

얼어붙은 바이칼호 위를 달리는 차량들.

얼어붙은 바이칼호 위를 달리는 차량들.

Q 계속 열차 안에만 있으면 지루할 것 같은데? 열차는 큰 역에서 20~30분씩 서기 때문에 가끔 열차 밖으로 나가 가볍게 산책을 할 수 있습니다. 차 안에서 어떻게 지낼지는 각자 선택하기 나름입니다.

Q 정거장 주변의 노점상이 파는 음식은 괜찮은가요? 음식을 경험 삼아 조금 사 먹어보는 것도 여행의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Q 이르쿠츠크는 왜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나요? 이르쿠츠크 시 옆에는 안가라강이 흐르고 도심에는 아름다운 서구식 건축물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불립니다.

Q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 호수는 가까운가요? 가까운 호반 도시 리스트비얀카까지는 1시간이면 되고, 호수 안의 큰 섬인 알혼섬에 가기 위해서는 4~5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야 합니다.

Q 바이칼 호수는 언제 어나요? 바이칼 호수는 11월부터 얼기 시작해 12월이면 거의 다 얼지만, 가장 두껍게 어는 때는 2월입니다. 얼음은 5월이 되어야 다 녹습니다.

Q 얼음 위의 차량 운행이 위험하지 않은가요? 차량이 통행하는 얼음 위에는 안전을 위해 교통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10톤 이상은 운행할 수 없고 속도도 제한됩니다. 차량은 안전한 곳으로만 다니도록 되어 있습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직후에는 바이칼호 얼음 위에 철로를 깔고 열차를 운행한 적도 있습니다.

Q 알혼섬의 숙소인 통나무집은 따뜻한가요? 통나무집은 옛날처럼 페치카를 쓰지는 않지만, 전기 난방으로 아주 따뜻합니다.

Q 빙상 투어에선 무엇을 하나요? 사륜구동차를 타고 호수 안의 가장 큰 섬인 알혼섬 주위의 얼음 위를 다니면서 호수 위의 작은 섬들과 얼음 동굴 등을 감상하며, 얼음 위에서 식사도 하고 차도 끓여 마십니다.

Q 이르쿠츠크에서는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이 유명하던데, 무슨 박물관인가요? '데카브리스트'란 '12월에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1825년 12월에 일단의 귀족과 장교들이 차르체제 전복과 농노제도 철폐를 내걸고 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해 시베리아에서 30년간 유형과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또 11명의 부인이 시베리아로 남편을 찾아와 생사고락을 같이했습니다. 이들의 혁명 정신과 부인들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데카브리스트 발콘스키 공작과 트루베츠코이 공작 등 두 사람이 살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Q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데카브리스트들과 관계가 있다던데요? 데카브리스트들의 지도자 발콘스키 공작과 트루베츠코이 공작은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외가 쪽 친척이기도 합니다. 톨스토이의 명작 『전쟁과 평화』는 데카브리스트들의 이야기를 1·2·3부로 쓰려는 계획 아래 쓰여진, 1부에 해당되는 작품입니다. 정작 데카브리스트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은 미완에 그쳤습니다.

Q 식당 등에 들어갈 때는 외투 등을 보관소에 맡겨야 한다던데요? 러시아에서는 휴대품 보관소가 있는 식당, 극장 등에서는 외투와 짐 등을 맡겨야 합니다.

Q 카카오톡은 잘 되나요? 카카오톡은 큰 도시 근처에서는 잘 되지만 안 되는 지역이 아직 많습니다.

Q 추우면 카메라 배터리가 금방 방전되나요? 날이 차면 카메라 배터리가 빨리 방전될 수 있습니다. 요즘은 배터리 성능을 개선해 과거처럼 금방 방전되지는 않지만, 되도록 카메라를 추위에 오래 노출시키지 않는 게 좋습니다.

Q 이광수의 소설 『유정』이 바이칼 호수가 등장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가요? 그렇습니다. 이광수는 22살 때인 1914년에 바이칼 호수 인근 치타에서 6개월간 머물렀습니다. 그 뒤 1933년 <조선일보>에 바이칼 호수를 무대로 한 소설 『유정』을 발표했습니다.

여행 문의 및 신청
바이칼BK투어(주) 02-1661-3585, www.bktour.kr
여행 일정 등 자세한 내용은 <우먼센스> 2018.12, 312쪽 참조.

CREDIT INFO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2018년 12월호
2018년 12월호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