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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心) 스틸러 이정은

깔깔깔. 저 멀리서 화통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주변 사람들도 배꼽을 잡고 웃는다. 대화에 귀를 기울였더니 뱃살을 통통 튀기며 자랑하듯 몸짓을 하고 있다. tvN 드라마 <아는 와이프>와 <미스터 선샤인>로 마음을 훔친 心스틸러 이정은이다.

On November 1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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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사랑해요. 내 몸이 좋고, 내 곡선이 좋아요. 다이어트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웬만하면 안 할 거예요. 맛있는 게 좋고, 삼시 세끼 다 맛있는 걸 먹는 게 좋고, 이왕이면 든든하게 먹는 게 좋은걸요.(웃음)"

이정은은 일단 여유가 있다. 여배우에겐 단점이 될 법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내며 웃을 수 있는 여유. 게다가 넉살도 좋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먼저 악수를 건네고 실없는 농담도 던지면서 분위기를 자기편으로 이끌어낸다. 말하자면 내공이다. 지난 27년간 연극 무대에서, 영화판에서, 그리고 드라마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과 부딪치며 다진 그녀만의 필살기인 셈이다.

이쯤에서 아직도 이정은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짚고 넘어가자. 이정은은 1991년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을 통해 데뷔했다. 이후 <빨래> 무대에 오르면서 업계에 이름을 알렸고,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의 '보살',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의 '금촌댁', <아는 와이프>의 치매에 걸린 '우진 모', <미스터 선샤인>의 '함안댁'까지 독보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배우'가 바로 이정은이다.

"<빨래> 공연 당시 허리에 무리가 와서 디스크가 생겼어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팠고 어쩔 수 없이 공백기가 있었죠. 그때 알았어요. '아 나는 연기를 해야 하는구나.' 좀 더 집중해서 연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영화 단역 제안이 들어왔고, 그걸 계기로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죠. 그렇게 27년을 연기했네요. 인생의 절반 이상을 무대와 촬영 현장에서 보낸 셈이죠."

진득하게 한 우물만 팠더니 성과가 보이기 시작했다. 관계자들 사이에선 '또 작업하고 싶은 배우'로 인정받았고, 대중에겐 눈도장을 찍었다. 주목할 만한 스타(?)로 꼽히더니 몇몇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도 있었다. 작품 활동으로 바쁘기도 했지만 '내 이야기가 뭐 재미있겠어?' 싶은 마음에 줄곧 거절해오다 이제야 기자 앞에 앉았다.

"어안이 벙벙해요. (라)미란이와 친하게 지내는데 그녀를 지켜보면서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는데 제게도 이런 영광이 주어지네요. 인기를 실감하지는 못해요. 그전과 다를 게 없거든요. 아, 바뀐 게 하나 있다면 광고 섭외가 들어왔어요. 그것도 화장품요! 모두 <아는 와이프>와 <미스터 선샤인> 덕분이에요. 작가님, 감독님께 바로 연락을 드렸죠. 모두 자기 일처럼 좋아해주시더군요. 요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 이야기가 재미있나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모습이 귀엽다. 재미있으니 마음 푹 놓고 편하게 이야기하라는 기자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인터넷과 거리를 두고 지낸다더니 진짜인가 보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대세 신 스틸러로 떠올랐다는 것도, '함블리(함안댁+러블리의 합성어로 <미스터 선샤인>속 캐릭터)'라 불리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되도록 인터넷을 안 봐요. 사람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기 위해 선택한 저만의 방법이죠. <오 나의 귀신님>(이하 <오나귀>) 이후 그렇게 됐어요. 그 작품에서 점쟁이 '보살' 역을 맡아서 꽤나 인기 있었거든요. 매일 인터넷을 뒤졌죠. 제 기사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요. 좋았어요. '연극 무대에서 갈고닦은 실력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구나' 하면서 도취해 있었어요. 그런데 딱 3개월이더군요. 사람들에게서 잊히는 건 정말 빠르더라고요. 저는 아직 <오나귀>의 거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대중은 이미 날 잊었다는 게 상처였고 힘들었어요. 그때부터 인터넷을 안 보기로 작정했어요."

이정은은 <오나귀> 출연 당시 인기에 취해 있었다고 고백했다. 솔직했다. 그녀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어깨에 뽕이 장난 아니었다".

"어느 날 후배가 그러더라고요. '이제 그만 <오나귀>에서 빠져나오라'고요. 저도 모르게 말끝마다 '내가 <오나귀>에 출연할 때 말야'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드라마가 끝난 게 언젠데 아직도 거기에 머물러 있느냐는 거였죠. 어쩌면 난생처음 느껴보는 인기에 취해 있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한껏 '업(Up)'돼 있었죠. 이젠 확실하게 알아요. 인기? 3개월이면 끝납니다. 배우는 새로운 작품을 통해 다른 행성으로 여행해야 해요. 다른 작품을 해야 착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요."

그때 그렇게 떠난 다른 행성 중 하나는 영화 <옥자>다. 이정은은 이 작품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돼지 '옥자'의 목소리로. 그녀는 숨겨진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봉준호 감독님은 정말 엉뚱하신 분이에요. 영화 <마더>에서 김혜자 선생님 상대역으로 잠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저를 좋게 보시고는 <옥자>에 캐스팅해주셨어요. 그것도 주인공 역으로요. 대박이죠. 그런데 돼지 역할이래요.(웃음) 6개월 후에 보자고 하시더라고요. 대감독이 주인공 역할을 준다는데 어떻게 해요. 그때부터 농장을 찾아다녔죠. 돼지 옆에서 킁킁거렸어요. '킁킁' '컹컹' '크허억'…. 온갖 돼지 소리는 다 흉내내봤죠. 대망의 녹음하는 날, 감독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이런 걸 원한 게 아니래요. 돼지 목소리에 감정이 있으면 좋겠대요. 예를 들어 귓속말할 때는 '크크크킁', 슬플 때는 '크흐으응' 이런 식으로요. 환장하죠. 나중엔 편의점 휠체어 신에 출연시켜주시더라고요. 아마도 미안하셨나 봐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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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까지 20년 동안 연애에 올인했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했어요. 그런데 연애는 굉장히 감정 소모적인 일이더군요. 그래서 지난 5년은 연기만 했습니다. 지금은 남녀간의 사랑을 넘어 인간과의 교감에 더 관심이 많아요."

이정은의 인생 모토는 '화끈하게 살자'다. 워낙 화끈한 탓에 지난 20년간 뜨거운 열애를 했고, 지금은 연기와 뜨겁게 열애 중이다. 한 번에 두 가지를 하는 멀티플레이가 안 되는 탓에 사랑할 땐 사랑만, 연기할 땐 연기만 한다. 그렇게 연기와 미친 사랑에 빠진 건 5년째다.

"5년 전까지 20년을 연애했어요. 사랑에 올인했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연애에 질린 상태랄까요? 돌이켜보니 연애라는 건 참으로 소비적인 일이더군요. 그때 내가 누굴 사랑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뭔가에 몰입하고 싶어 누군가를 사랑했던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 성격이 그래요. 그렇다면 그 소비적인 열정을 일에 쏟으면 어떨까요? 그래서 지난 5년은 연기만 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이상형에 대해 물었다. 문학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남자란다. 그녀는 연애와 결혼,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이정은이 의외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상형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마음이 잘 맞는 남자면 그만이죠. 하지만 지금은 연애에 흥미가 없어요. 결혼 시기를 많이 놓친 것도 사실이고요. 대신 사람들과의 케미, 공감대, 유대감에 관심이 많죠. 어떻게 보면 이것도 넓은 의미의 연애라고 생각해요. 사랑이라는 감정이 꼭 남녀 관계에 국한된 건 아니니까요.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죠. 누군가와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건 아주 특별한 일이에요. 이를테면 제가 자주 나가는 댄스 동호회에서 우울증에 걸려 춤추러 온 사람들을 만나곤 하는데 저는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왜 그곳에 왔는지 알 수 있죠. 그런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어요. 이것도 일종의 사랑 아닌가요?"

대화가 조금 깊어졌다. 이정은은 자세를 고쳐 앉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약한 사람은 자기가 약하다는 걸 드러내지 않아요. 강한 척하고, 그렇게 포장된 강한 모습이 자기라고 착각하며 살죠. 그런데 어느 한순간 무너질 때가 있어요. 제 이야기를 잠깐 할게요. 오래전 너무 힘든 시기가 있었어요. 집에 가려고 택시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잡히지 않는 거예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한참 후에 아는 언니가 제 어깨를 툭툭 치면서 '너 왜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어?'라고 말을 거는데 왈칵 눈물이 났죠. 그 언니가 그 순간 저의 약한 부분을 툭 건드린 거에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이런 모습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을 어루만져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아는 와이프>의 치매 환자 캐릭터가 더 마음에 들었다. 특히 치매 환자를 밝은 캐릭터로 그려낸 양희승 작가의 의도에 크게 공감했다.

"양희승 작가님과는 <오나귀> <역도요정 김복주> 그리고 <아는 와이프>까지, 세 작품을 같이했어요. 어느 정도 믿음이 있기도 했지만 <아는 와이프>의 역할은 특히 좋았어요. 보통 치매 환자들은 어둡고 우울하다고 생각하는데 작가님은 귀엽게 그리고 싶어 하셨죠.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치매 환자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말이 나온 김에 <아는 와이프>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봤다. 지성과 한지민에 대해 이야기할 땐 눈이 반짝였다. 그도 그럴 것이 촬영 현장에서 주인공들의 이면을 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2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했어도 주인공과 그렇게 오래 붙어 있었던 적은 없어요. 덕분에 주연 배우들의 면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죠. 지성 씨와 한지민 씨는 정말 대단해요. 그들이 왜 주인공이 되는지 알겠더라고요. 주인공이 지쳐 있으면 분위기가 다운되는데 그들은 며칠 밤을 새워도 기운과 열정이 넘쳐요. 팀워크를 위해 바치는 시간과 노력을 보고 많이 배웠어요. 그렇게 많은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주변 스태프까지 챙길 수 있으려면 참을성과 인내심 없이는 안 되거든요. 오랫동안 사랑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됐죠."

이정은의 말에 따르면 지성은 자기 이야기를 꺼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자신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할 정도로 친근한 스타일이다. 한지민은 미다스의 손을 가졌다고 했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이팅 넘치는 기운이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고. 이번엔 <미스터 선샤인>에서 만난 이병헌과 김태리에 대해 물었다.

"병헌 씨는 월드 스타인데도 전혀 그런 느낌이 없어요. 겸손하고 늘 노력하는 배우죠. '와, 되게 멋있는 배우다'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어요. 저와 한 살 차이인데도 병헌 씨는 이상적인 동안이라는게 부러워요. 태리 씨는 영화 경험만 있는 배우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현장에 적응을 잘해줬어요. 어린 나이에도 스케줄을 다 소화할 만큼 단단한 내공이 있는 친구죠. 주관이 뚜렷해서 연기할 땐 오히려 선배 같더라니까요."

<오나귀> <옥자> <아는 와이프> <미스터 선샤인>까지. 그녀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하나같이 깊이가 있었다. 모든 작품을 허투루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녀가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이제는 좀 영리해지기로 했다.

"앞으론 똑똑하게 바쁘려고요. 언제, 어떻게 바쁠 것인지 고민하려고 해요. 내 몸과 마음이 지금 이 작품을 해도 되는 상태인지 확인하는 작업을 거치려고요. 지금까지 경주마처럼 달려왔다면 앞으론 거북이처럼 가고 싶어요. 제가 더 많은 작품을 한다고 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어요. 다만 즐겁게, 신나게 하고 싶어요."

이정은은 현재 부지영 감독의 차기 영화를 촬영 중이다. 왠지 모든 촬영이 끝나면 그 영화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CREDIT INFO
에디터
이예지
사진
김동환
2018년 11월호
2018년 11월호
에디터
이예지
사진
김동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