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걱정을 안고 4년 만의 귀국
도스토옙스키와 안나는 결혼 후 두 달 만에 빚쟁이와 친척들을 피해 무작정 러시아를 떠나 4년간 유럽을 떠돌며 지냈다. 세월이 두 해, 세 해 지나가자 두 사람은 방랑을 그만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동안 『백치』 『영원한 남편』 『악령』 등의 작품을 써 러시아 내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작가로서의 명성은 꾸준히 높아졌지만, 막상 러시아로 돌아가려니 친척들 문제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빚쟁이들의 빚 독촉이 더 두려웠다. 빚쟁이들은 도스토옙스키를 보자마자 채무자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것이 뻔했다.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가 귀국에 따른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딸 류보피를 낳은 다음 해인 1870년 가을, 안나가 다시 임신을 했다. 안나는 어떻게 해서든 페테르부르크로 들어가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 다시 유럽에서 아이를 낳으면 귀국은 마냥 늦어질 것 같았다. 마침 <러시아 통보>의 편집장 카트코프가 돈을 부쳐줬다. 1871년 7월 5일 도스토옙스키는 만삭의 안나와 류보피를 데리고 드레스덴을 떠나 3일 만인 7월 8일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돌아와 보니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 이어 유럽 체재 중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로 인해 문학계의 거물급 인사가 되어 있었다.
또한 주변의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형의 미망인 에밀리야 페도로브나와 가족은 두 아들과 딸이 돈을 곧잘 벌어 꽤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형수도 이제는 시동생에게 가족이 있으므로 특별한 경우에만 자신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의붓아들 파벨만은 여전했다. 그는 석 달 전인 그해 4월에 결혼했는데, 아직도 도스토옙스키가 자기를 부양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나는 소박하고 영리해 보이는 예쁜 그의 아내는 마음에 들었다. 안나는 "그녀가 어째서 파벨 같은 구제 불능의 인간에게 시집을 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녀의 인생이 얼마나 힘들지, 정말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훗날 회고록에 썼다. 여기저기 맡기고 간 물건들은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책들은 파벨이 책을 보며 교양을 쌓고 싶다고 해서 맡겼는데 그가 모두 고서적상에게 팔아넘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나가 힐책하자 파벨은 폭언을 하며 제때에 자기에게 돈을 보내주지 않은 도스토옙스키의 책임이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다행인 것은 한 친척집에 보관해두었던 서류 바구니가 온전하게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죄와 벌』 등의 창작 노트와 형 미하일이 잡지 발행과 관련해 남긴 몇 권의 다이어리, 그리고 많은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 안나는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지 8일 만인 7월 16일, 첫아들을 낳았다. 남편의 이름 그대로 표도르란 이름을 붙였다.
빚쟁이와의 담판, "채무자 감옥에 갔다 오라고 하겠다"
도스토옙스키가 귀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상한 대로 빚쟁이들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럽으로 떠나기 전 2만 루블 정도였던 빚은 이자가 붙어 2만 5천 루블가량으로 늘어 있었다. 모두 형 미하일이 남긴 빚이었다. 미하일이 죽었을 때 어떤 사람은 미하일에게 차용증 없이 빌려준 것이라며 돈을 요구하기도 해 도스토옙스키가 그 말을 사실로 믿고 어음을 내준 일도 있었다.
돌아와 보니 그런 어음에도 똑같이 이자가 붙어 있었다. 형 미하일과 거래했던 독일인 힌터슈타인이란 채무자는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며 도스토옙스키를 채무자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협박했다. 그에게 갚아야 할 빚은 1,200루블이었다. 이 빚도 그의 부인이 형 미하일에게 차용증 없이 2,000루블을 빌려줬다며, 남편 모르게 빌려준 것이어서 남편이 알면 자기를 죽일 것이라며 어음이라도 끊어 달라고 무릎 꿇고 애원하는 바람에 마음 약한 도스토옙스키가 1,000루블짜리 어음 두 장을 내준 것이었다. 그중 1,000루블은 1867년까지 다 갚았지만, 나머지 1,000루블에 이자가 붙어 1,200루블로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힌터슈타인에게 먼저 100루블을 주고 나머지는 한 달에 50루블씩 갚으면 안 되겠냐고 했다. 그러나 힌터슈타인은 자신이 유명 문인을 채무자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기세등등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안나는 도스토옙스키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남편 모르게 채무자를 찾아갔다. 안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거만하게 나를 맞이하며 말했다.
"돈을 내놓으시지, 아니면 일주일 뒤에 재산은 압류되어 공매로 팔리고 당신 남편은 따라소프 건물(*채무자 감옥)에 갇힐 테니까."
"우리 집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도스토옙스키)의 명의가 아니라 내 명의로 빌렸어요." 내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가구도 외상으로 할부해서 산 거예요. 지불이 끝날 때까지는 가구상 소유죠. 그러니까 그걸 차압하는 건 불가능해요." 나는 그에게 증거로 등기부등본과 가구업자와의 계약서 사본을 보여주었다.
"채무자 감옥에 넣겠다고 협박하셨죠?" 나는 말을 계속했다. "경고하겠는데, 만일 그렇게 되면 당신 빚의 만기일까지 그곳에 있으라고 내가 남편을 설득할 거예요. 내가 가까이 살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그를 면회하고 일하게 도와주면 되니까요. 그러면 당신은 땡전 한 푼 못 받게 되죠. 그뿐이 아니죠. 당신은 '사식비'도 지불해야 해요. 장담하건대 당신은 고집을 부린 대가로 벌을 받을 거예요!"
그러자 힌터슈타인은 자기가 그렇게 오래 기다려줬건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빚을 갚을 생각도 안 하고 감사할 줄도 모른다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아니, 당신이 그에게 감사해야죠." 내가 격분해서 말했다. "그가 당신 아내에게 빚 대금으로 어음을 준 것에 대해서 말이죠. 아마도 이미 다 갚은 빚이었을 텐데 말이에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그렇게 한 건 그가 마음이 넓고 동정심이 많아서예요. 당신 아내가 당신이 자기를 죽일 것라고 말했으니까요. 이래도 당신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를 계속 협박한다면 나는 이 모든 사연을 글로 써서 <조국의 아들>지에 실을 거예요." (…) 나의 다혈질이 이번에는 통했다. 이 독일인은 겁을 먹고 도대체 뭘 원하느냐고 물었다.
"어제 내 남편이 부탁한 대로 해요."
"좋소, 좋아. 돈을 줘요!"
나는 우리의 계약에 관한 상세한 영수증을 요구했다. 힌터슈타인이 뒤에 마음이 바뀌어 또다시 남편을 괴롭힐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승리를 쟁취하여 집에 돌아왔다. 당분간은 내 사랑하는 남편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최호정 옮김, 그린비, 2003)
안나는 그 뒤 다른 빚쟁이들과도 필요한 경우 힌터슈타인에게 썼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유럽에서 돌아온 다음 해인 1872년부터 페테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300km가량 떨어진 조용한 휴양 도시 스타라야루사에서 매년 여름을 지내곤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인 1877년 처남 이름으로 사들인 스타라야루사의 별장은 지금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이 되어 있다.
출판업을 시작한 안나의 결단
유럽에서 귀국 후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책을 직접 출판하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젊어서부터 자기 작품을 직접 출판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안나도 유럽에서 살 때 종종 그런 이야기를 들은 바 있어 두 사람은 가장 최근에 마무리한 『악령』부터 직접 출판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안나는 인쇄소 주인과 서적 판매상 등을 만나 출판에 드는 인쇄비 등 제반 비용과 유통과 판매에 따른 수수료 등을 다각도로 알아보았다. 종합적으로 분석해본 결과 책을 직접 출판하더라도 서적 판매상에 위탁할 경우 보관, 유통, 판매를 이유로 대개 책값의 50%밖에 받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돈도 책이 판매된 한참 후에나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출판 원가를 빼고 나면 이익을 남기기 어려운 구조였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유통 마진이 너무 커서 생산자는 이익은커녕 자칫 손해 보기 쉬운 상황이었다. 안나는 친지들에게도 소설을 직접 출판하는 문제에 관해 의견을 구했다. 친지들은 경험 없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한다면서 모르는 사업은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빚만 더 늘어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이전에도 몇몇 저자가 직접 책을 출판했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악령』의 출판을 강행하기로 했다. 물론 안나의 결단이 작용했다. 1873년 1월 20일. 인쇄 주문한 『악령』 3,000권 중 500권이 먼저 제본되어 집으로 왔다. 안나는 <목소리>지에 『악령』의 광고를 의뢰했고, 광고는 1월 22일 자에 실렸다. 광고가 실리자 이날 오전부터 서점과 서적 판매상에서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안나는 이들과 일대일로 흥정을 했다. 10권은 20% 할인, 20권은 25% 할인 50권은 30% 할인, 이런 식으로 책을 직접 팔았다. 현금으로만 판다는 원칙을 정해놓고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당시 악령의 권당 가격은 3.5루블이었다. 이를 위탁 판매할 경우 50%인 1.75루블밖에 받을 수 없지만, 20% 할인 가격으로 팔면 2.8루블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모두 원칙대로 현금으로 받았다. 한 권당 1루블 이상의 이익이 더 생기는 것이다.
서적 판매는 첫날부터 성공적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밤새 일을 하고 정오 무렵 잠을 깨는 습관이었는데, 이날은 오후 2시쯤 일어났다. 이때는 이미 150권을 판 상태였다. 잠에서 깨어난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장사는 잘 되어가오? 한 권은 팔았겠지?" 하고 농담처럼 물었다. 안나가, "한 권이 아니라 150권을 팔았어요" 하자 처음엔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가 호주머니에서 지폐 다발을 꺼내 보여주자 그제야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 매우 흡족해했다. 안나는 무엇보다 자신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 기뻤다. 귀국 후 안나는 돈벌이를 하기 위해 이전에 하던 속기 일을 다시 하려고 몇 차례 시도했지만, 일거리가 페테르부르크가 아닌 다른 도시들에 있어서 번번이 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본격적으로 전력투구할 수 있는 자신의 일이 생긴 것이다.
처음으로 생활 형편이 풀리다
안나는 그해 『악령』을 팔아 4,000루블가량을 벌어들였다. 물론 협잡꾼들에게 다소 손해를 본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귀국 2년 후인 1873년은 도스토옙스키 부부에게 여러모로 경제적 형편이 풀린 해였다. 그해 도스토옙스키가 보수 잡지 <시민>의 편집장을 맡게 되어 연봉으로 3,000루블을 받았다(*<시민> 편집장으로 일한 기간은 1873년 봄부터 이듬해 봄까지 약 1년간이었다). 그해 이런저런 원고료로 도스토옙스키가 추가로 벌어들인 돈이 2,000루블 정도 되었다. 여기에다 『악령』의 이익금이 4,000루블가량 되었으니 어림잡아 연수입이 9,000루블이다.
안나의 기록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 가족의 당시 1년 생활비는 3,000루블 정도였다(*안나는 회고록에서 3,000루블 이상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집세 700~800루블과 장작값 등 집에 들어가는 돈이 1,000루블가량 포함되어 있다). 출판업을 시작해 빚을 어느 정도 갚을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 사업을 계기로 안나의 지혜와 능력을 높이 사게 된 도스토옙스키는 그 후 자신이 쓴 소설을 어느 잡지에 실으면 좋을까 등의 문제도 안나와 상의했다.
출판업을 시작한 1873년은 도스토옙스키 부부가 처음으로 생계비 걱정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빚도 다소 갚을 수 있었던 해였다. 이렇게 경제적 사정이 차츰 호전돼 도스토옙스키는 비로소 안정된 상황 속에서 작품을 쓸 수 있었으며 죽기 전해인 1880년까지 대부분의 빚을 다 갚게 되었다. 야무진 안나의 공이 아닐 수 없다(*안나의 회고록에는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을 떠나기 조금 전인 1881년 1월 초에 모든 빚을 다 갚았다고 쓰여 있다).
결혼 전 속기사로서 도스토옙스키와 인연을 맺은 안나는 결혼 후에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받아쓰는 작업을 즐겁게 계속했다. 보통 새벽에 잠자리에 드는 도스토옙스키는 낮에 일어난 후 오후에 안나를 서재로 불러 밤새 써놓은 것을 구술했다. 안나는 속기 작업으로 남편을 지속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쁘게 생각했다. 안나와 결혼 후 잇단 장편 대작들이 가능했던 것은 이러한 내조 덕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우먼센스>가 후원하고 바이칼BK투어(주)가 주관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가는 겨울 바이칼 여행'이 2019년 2월 8일부터 15일까지 7박8일의 일정으로 실시된다. 자세한 내용은 <우먼센스> 2018. 11월호 300쪽 참조.
도스토옙스키, 시베리아에서의 첫사랑의 추억 ③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 모델이 된 첫사랑의 여인
앞에서 시베리아 노보쿠즈네츠크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에 도스토옙스키의 첫사랑이자 첫 부인이었던 마리야를 모델로 한 소설 속 여인 두 명의 마네킹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 사람은 『죄와 벌』의 술주정꾼 마르멜라도프의 아내 카테리나고 다른 한 사람은 『백치』의 여주인공 나스타시야다. 『죄와 벌』 속에서 마르멜라도프는 술집에서 만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기의 아내 카테리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짐승 같은 놈이지만, 내 아내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영관(領官)의 딸로 태어난 교양 있는 여자입니다. 나는 하찮은 쓰레기라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집사람은 숭고한 정신과 고상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교육받은 여자입니다. (…) 그 여잔 어려서부터 깨끗하게 자랐기 때문에 밤낮 빨래를 하거나 걸레질을 하거나 애들 뒤치다꺼리를 해주거든요. 그대로 버려두는 성미가 아닌걸요! 게다가 가슴을 앓고 있어 가끔 피를 토하곤 합니다. (…) 우리 집사람은 유서 깊은 귀족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졸업식 때는 현 지사와 내빈들 앞에서 무용으로 금메달과 상장까지 받았답니다. (…) 그렇지만 여편네는 성미가 급하고 오만하여 남에게 굽히기 싫어하는 여자입니다. 비록 자기가 직접 마루를 닦고 검은 빵을 씹을지라도 남이 업신여기는 건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죄와 벌』, 채수동 옮김, 동서문화사, 2015)
남편은 알코올중독자이고 본인은 폐결핵이라니, 영락없이 마리야다. 여기에서 남편 마르멜라도프는 카테리나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여자인지를 강조하고 있다. 『백치』의 나스타시야는 더 복잡하고 강한 성격이다.
『죄와 벌』의 카테리나와 『백치』의 나스타시야
『백치』에서는 지주 토츠키가 이웃 조그만 영지에서 불이 나 부모가 다 죽고 고아가 된 여자아이(나스타시야)를 측은한 마음에 자기의 영지 관리인 집에서 키우도록 하는데, 아이가 몇 년 후 빼어난 미인으로 성장한 것을 발견하고는 측은지심이 흑심으로 바뀌어 그녀를 자기의 정부(情婦)로 만든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에 살며 아무것도 모르려니 했던 나스타시야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올라와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던 토츠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그의 혼사를 훼방 놓겠다며 협박하는데 말솜씨나 아는 것이 범상치 않았다. 토츠키는 나스타시야가 보통 여자가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체면 불구, 꼬리를 내린다. 소설에서 토츠키는 나스타시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여자는 엄포를 놓으면 그걸 직접 실행에 옮기는 여장부였으며, 특히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 무엇도 존중하지 않는 성미였기 때문에, 그녀를 금전으로 회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가 이렇게 된 이면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숨어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마음속에 응어리진 울화 같은 것으로,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누군가에 대해 느끼는 연애 소설 같은 분노와 완전히 상궤를 벗어난 지독한 경멸감과 같은 것이었다. (…) 그는 그녀를 4년 동안이나 보아왔으나 그녀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내면적으로 갑작스레 대변혁이 일어났다는 사실도 많은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도 과거 어느 한순간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따금 이상한 생각이 떠오르곤 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그 눈 속에 깊고 신비로운 암흑이 예견되었던 듯싶었다. 그녀의 눈빛은 수수께끼를 던져주는 것 같았다. 또쯔끼는 지난 2년 동안 나스따시야의 얼굴빛이 변할 때마다 놀라곤 했던 일이 자주 있었다. 나스따시야의 얼굴이 지독하게 창백해질 때마다 그녀는 이상스럽게도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한창 잘나갈 때 바람을 피워 보았던 신사라면 누구나 다 그러하듯이, 또쯔끼도 맨 처음에는 값싸게 그의 수중으로 들어온 생명 없는 이 영혼을 경멸적으로 바라보았으나 최근 들어서는 그러한 자신의 생각에 약간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 그녀에게는 심장 대신 돌멩이가 들어앉아 있고, 감정이란 감정은 죄다 말라비틀어져 버린 듯했다. 그녀는 집 안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길 즐겼다. 책을 읽고 공부도 했으며 음악 듣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과의 교제도 뜸한 편이었다.
(『백치』, 김근식 옮김, 열린책들, 2016)
『백치』에서 나스타시야는 자기를 짝사랑하는 젊은 상인 로고진이 가지고 온 돈다발을 페치카의 장작불 속으로 던지는 등 기상천외한 짓을 하다가 결국 로고진에게 살해되고 만다. 나스타시야의 모델이 도스토옙스키의 당돌한 젊은 애인 수슬로바인 줄만 알고 있었던 내게 마리야가 그 모델이라는 노보쿠즈네츠크 박물관의 설명은 의외였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의 캐릭터야 작가가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여러 모델을 섞어놓은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소설 『영원한 남편』에 남긴 첫사랑의 흔적
소설이 전적으로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혼 전 마리야와 불륜이라고 할 수 있는 연인 관계에서 있었을 법한 일들은 그 후 그의 작품 『영원한 남편』에 엇비슷하게 등장한다. 『영원한 남편』은 도스토옙스키가 두 번째 결혼 후 유럽에 머물 때인 1869년에 쓴 중편소설이다. 『영원한 남편』의 주인공 벨차니노프는 상류사회 출신으로 좋은 체격과 멋진 외모를 지녔다. 그는 나이 30세 무렵에 T시에서 1년간 지낸 일이 있는데, 그때 이 고장 사람 트루소스키의 아내 나탈리야 바실리예브나와 내연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녀는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외간 남자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소설은 그녀의 성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둘 더하기 둘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도 가진 적이 없었다. 무슨 일에나 자신이 옳지 않았다든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한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지속적으로, 그리고 셀 수도 없이 남편을 배신했으면서도 전연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 그녀는 애인 괴롭히기를 좋아했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보충해주는 것도 좋아했다. 그녀는 정열적이고 잔인하며 또한 관능적인 타입의 여인이었다." (『영원한 남편』, 정명자 옮김, 열린책들, 2014)
이 소설 속 여인의 성격을 마리야의 그것이라고 말할 수 는 없다. 하지만 『영원한 남편』 속의 다음과 같은 대목은 도스토옙스키가 세미팔라친스크 시절 마리야와 밀회하며 나누었을 듯한 내용이다.
"T시에 살고 있는 동안 벨차니노프는 몇 번인가 스스로에게 질문해본 적이 있었다. 도대체 이 남편이라는 자는 자기 아내와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있을까 하고 몇 차례인가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나탈리야 바실리예브나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았는데 그때마다 언제나 그녀는, 남편은 아무것도 모르며 결코 아무것도 눈치 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전혀 그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약간 짜증 섞인 한결같은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영원한 남편』)
소설에서 다시 당시의 현실로 돌아온다. 마리야의 첫 남편 이사예프는 아내와 도스토옙스키의 관계를 까맣게 모른 채 고통 속에서도 아내와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죽었다. 『영원한 남편』 속의 나탈리야는 소설의 주인공인 정부 벨차니노프의 딸을 낳았지만 남편 트루소스키의 딸인 것처럼 속여 키우며 살다가 9년 후에 죽는다. 그녀는 벨차니노프에게 그의 딸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지만, 편지는 그에게 도달하지 않았고 벨차니노프는 그 사실을 나탈리야 사후에 알게 된다.
아내가 죽은 후 남편 트루소스키는 아내의 유품 속에서 숨겨놓았던 편지를 보고 딸의 진짜 아버지가 벨차니노프라는 것을 알게 되며 벨차니노프에게 복수심을 품지만 복수를 실행하지는 않는다. 모친 사망 이후 어린 딸 리자는 친아버지로 알고 있던 트루소스키의 학대 속에 병들어 죽게 된다. 트루소스키는 돈푼깨나 있어 보이지만 시골티 나는 여자와 재혼하는데, 주인공 벨차니노프가 우연히도 열차 안에서 재혼한 트루소스키 부부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그 여자 앞에서 친구인 체한 후 헤어진다는 것이 대체적인 줄거리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벨차니노프는 나탈리야의 남편 트루소스키를 '영원한 남편'이라고 부르는데, '영원한 남편'이란 아내의 부정을 알지 못한 채 오로지 남편으로서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일종의 조롱이다.
도스토옙스키를 대문호로 키운 운명의 대지, 시베리아
도스토옙스키의 여자관계는 유형 생활을 마친 30대 중반, 시베리아에서 마리야를 만나면서부터 심각하고 치열하게 시작되었다. 마리야의 사망을 전후해 몇 명의 여자를 만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헤어지고 만다. 그는 첫사랑 마리야와 결혼해 안정된 결혼 생활을 꿈꿨다. 하지만 마리야는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면서 둘 사이에 자식도 낳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재혼하여 진정한 가정의 행복을 찾고 싶었다. 그의 그러한 바람은 40대 중반, 두 번째 부인이 된 25세 연하의 속기사 안나 드미트리예브나를 만나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시베리아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무한한 고통을 안겨준 곳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많은 무형의 선물도 주었다. 수용소에서의 쓰라린 경험뿐만 아니라 수용소를 나온 후 첫 결혼에 이르기까지 겪은 지독한 사랑의 경험도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이후 소설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과연 시베리아는 도스토옙스키를 대문호로 키운 운명의 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