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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러시아 문학 기행 ⑰

안나, 도스토옙스키의 도박벽을 고치다

On September 2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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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정 러시아 시절 총사령부 건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정 러시아 시절 총사령부 건물.

도박의 추억

안나는 결혼하기 전부터 도스토옙스키가 도박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스토옙스키가 결혼 전 안나에게 『도박꾼』을 구술하면서 이 소설 속의 도박 이야기는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도박꾼』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 소설의 끝 장면이다.

"난 그때 몽땅 잃고 말았다. 몽땅 다…. 역에서 나와 뒤져보니 내 조끼 주머니 속에는 1굴덴(*옛 네덜란드의 화폐 단위)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러면 결국 이 돈으로는 밥을 먹어야 하겠구먼!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1백 걸음쯤 지나왔을 때 나는 생각을 고쳐먹고 되돌아갔다. 그 1굴덴을 망크(그때는 망크가 잘 나오고 있었다)에 걸었다. 그런데 무언가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홀로 타향에 와서 친척들과 친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오늘은 뭘 좀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잘 모르는 판에 마지막 남은, 정말로 마지막 남은 굴덴을 걸 때 드는 그런 느낌 말이다. 나는 돈을 땄다. 그리고 20분 후에 역에서 나왔다. 내 호주머니에는 170굴덴이 있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만일 그때 내가 낙심한 채로 과감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노름꾼』, 이재필 옮김, 열린책들, 2014)

여기에서 '역에서 나왔다'는 것은 도박장이 역 안에 있었다는 얘기다. 굶기를 각오한 최후의 베팅, 그리고 성공의 추억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도스토옙스키가 도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 쓴 소설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숨을 거둔 상트페테르부르크 아파트의 1929년 사진.

도스토옙스키가 숨을 거둔 상트페테르부르크 아파트의 1929년 사진.

도스토옙스키가 숨을 거둔 상트페테르부르크 아파트의 1929년 사진.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 있는 안나의 책상.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 있는 안나의 책상.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 있는 안나의 책상.

고개 든 도박벽

유럽에 오자 그 도박벽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안나는 그가 도박하는 것을 책망하지 않았다. 게다가 안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침울한 상태에 빠질 때면 운을 시험하러 룰렛 도박장에 다녀오라고 했다. 물론 안나가 처음부터 도스토옙스키에게 도박장에 다녀오라고 한 것은 아니다. 유럽에 온 몇 주 후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만일 드레스덴에 혼자 있다면 지체 없이 룰렛을 하러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편에게 두 번이나 더 그런 이야기를 들은 후 안나는 "며칠이라도 (도박장이 있는) 함부르크에 다녀오라"고 말했다. 신이 난 도스토옙스키는 안나를 드레스덴에 둔 채 함부르크로 달려갔다. 그러나 2~3일 뒤 남편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돈을 다 잃었으니 돈을 조금 부쳐달라는 내용이었다. 안나는 돈을 부쳤다. 그러나 그 돈을 다 잃고 다시 돈을 보내달라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결국 모든 돈을 다 잃고 8일 뒤 드레스덴으로 돌아왔다. 안나는 회고록에서 '내가 그를 책망하거나 잃은 돈을 아까워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실망하지 말라고 위로하자 그는 죽도록 기뻐했다'고 썼다. 안나는 갖고 있는 돈이 없으면 귀걸이 등 패물을 저당 잡혀 돈을 주었다. 가끔 지갑 가득 돈을 따 올 때도 있었지만 곧바로 다시 그 돈을 가지고 나가 몽땅 잃고 돌아왔다. 그녀는 도박은 병이라고 보고 거기서 도망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살아오면서 그토록 다양한 고통(요새 수감, 교수대, 유형, 사랑하는 형과 아내의 죽음)을 견뎌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어떻게 자신을 절제하는 의지력이 그토록 없는지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심지어 그가 그러는 것은 그의 고상한 성격에 걸맞지 않은 일종의 자기 비하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내 사랑하는 남편에게 이런 단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괴롭고도 화가 났다. 하지만 나는 곧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의지박약'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완전히 삼켜버리는 욕망이며 통제 불가능한 어떤 것이어서 아무리 강한 성격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에 맞서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도박은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도박에 빠지는 것은 병으로 보아야 하며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유일한 투쟁 방법은 도망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여기서 도망친다는 것은 도박장이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달아난다는 의미인 것 같다. 안나는 남편의 도박벽은 '일종의 병'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도박과 관련해서는 한 번도 말다툼을 벌이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는 도박장에서 가지고 간 돈을 다 잃고 돌아와서는 비탄에 빠져 울부짖기도 하고, 안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한 것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면서도 도박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안나는 도스토옙스키가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며 괴로워할 때면 그의 기분을 풀어주는 방법으로 "도박장에 가서 운을 시험해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도스토옙스키)는 걸핏 하면 자신의 재능이 '죽은'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면서, 점점 늘어나는 소중한 가족을 어떻게 부양해야 할지 막막하다며 괴로워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이따금 절망에 빠지곤 했다. 그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달래주고 그의 집필을 방해하는 암울한 생각들을 몰아내기 위해, 나는 언제나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시름을 잊게 하는 방법을 썼다. 룰렛 도박에 관한 말을 꺼낸 것이다. 마침 약간의 돈(300탈러 정도)이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운을 시험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돈을 딸 때도 되었다, 이번에는 성공하리라고 왜 기대하지 못하느냐 등등의 말을 했다. 물론 나는 한순간도 돈을 따는 것을 기대한 적은 없다. 희생해야만 할 100탈러가 너무 아까웠지만, 나는 이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새로이 격렬한 감정을 체험하고 도박과 모험을 향한 자기 마음을 충족시키고 나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안정된 마음으로 돌아올 것이고, 돈을 따겠다는 희망이 얼마나 공허한지 확신하면서 새로운 힘으로 창작에 매진하고 2~3주 안에 잃은 돈을 모두 되찾을 것이라는 사실을."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도박장에서 마음이 풀릴 만큼 도박을 하고 돌아와 2~3주 동안 다시 글을 쓰면 도박으로 잃은 만큼의 돈은 다시 벌어들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다. 결혼 후 가정 살림은 안나의 몫이었다. 자연히 경제권도 안나가 갖게 되었다. 과연 바가지 긁는 대신 돈을 주면서 "도박장에 가서 기분 좀 풀고 오라"고 한 안나의 작전(?)은 성공을 거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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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두 번째 부인 안나. 도스토옙스키. 딸 류보피.

(왼쪽부터)두 번째 부인 안나. 도스토옙스키. 딸 류보피.

마침내 도박을 끊다

도박장에 가서 다시 한 번 운을 시험해보고 오라는 안나의 제안을 도스토옙스키는 언제나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도박장에 한번 가보고픈 마음이 있었을 테지만, 돈을 관리하고 있던 젊은 아내 안나에게 "도박장에 갔다 오게 돈 좀 달라"는 말을 하려 하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안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내 제안을 남편은 너무도 마음에 들어하며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120탈러를 들고 돈을 잃는 경우 내가 집에 돌아오는 비용을 보내준다는 단서 하에 비스바덴으로 떠났다. 거기서 그는 일주일간 머물렀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결과는 비참했다. 여행 비용을 포함하여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180탈러를 써버렸다. 그것은 당시의 우리에게는 매우 큰 액수였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나와 아기, 우리 가족에게서 돈을 앗아간 자신을 질책했다. 이 일주일 동안 그가 겪은 극심한 괴로움은 그로 하여금 다시는 룰렛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들었다. 남편이 1871년 4월 28일 내게 보낸 편지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이제 나는 결심했소. 거의 10년 동안(아니, 형이 죽은 후 내가 빚에 짓눌리게 되면서부터라고 하는 게 낫겠군) 나를 괴롭혀온 혐오스러운 환상이 사라졌소. 나는 그동안 돈을 따는 걸 꿈꾸어왔소. 심각하고도 무섭도록 말이오. 그런데 이제 모든 게 끝났소!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었소. 내가 손을 끊었다면 믿겠소, 아냐?(*아냐는 부인 안나의 애칭) 나는 도박에 묶여 있었소. 이제 나는 종종 그랬듯이 도박하는 상상을 하느라 밤을 새우는 일 없이 일을 생각할 것이오."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도스토옙스키는 빚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박장에서 일확천금을 노렸지만, 도박장에서 그런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도박에서 손을 끊겠다'는 남편의 편지를 받고도 안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그런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적은 마침내 일어났다. 도스토옙스키는 이후 도박장에 가지 않았다. 안나가 쓴 회고록만 보면 안나가 언제나 도박에 매우 관대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자료들을 보면 안나 역시 때때로 남편이 도박장에 가지 못하도록 말리기도 했고, 애원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남편과 그 문제를 놓고 정면으로 대립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안나는 언제나 반대하는 것이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해 오히려 이따금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했고 그것이 결국 도스토옙스키로 하여금 도박에서 손을 떼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도박장에 간 것은 1871년 봄 비스바덴에서였다. 그러니까 귀국하기 몇 달 전까지, 유럽 체류 4년 동안 때때로 도박장에 드나들었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해 여름(7월) 귀국 후 몇 차례 유럽에 갔지만 도박장에는 다시 들르지 않았다. 사실 도스토옙스키가 귀국한 다음 해인 1872년, 독일 연방 당국의 칙령에 의해 독일 영토 내의 모든 도박장이 폐쇄되었다. 도박장은 결국 모나코 왕국으로 옮겨갔다. 도스토옙스키가 도박을 할 생각이 있었다면 모나코까지 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비스바덴에서 마지막으로 도박을 하고 돌아온 후 활기차고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그때부터 그는 소설 『악령』의 집필에 더욱 매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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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가 『악령』을 다듬은 스타라야루사에 있는 정교회 성당.

소설 『악령』

소설 『악령』의 모티브가 된 네차예프 사건의 주범, 네차예프.

소설 『악령』의 모티브가 된 네차예프 사건의 주범, 네차예프.

소설 『악령』의 모티브가 된 네차예프 사건의 주범, 네차예프.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 중 하나인 『악령』은 1869년 11월 21일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네차예프 사건'을 계기로 쓴 소설이었다. 네차예프 사건이란 무정부주의자 네차예프가 조직한 비밀 혁명 조직 '인민의 재판'에 소속돼 있던 모스크바 표트르 농업 아카데미 학생 이바노프가 네차예프와 다른 조직원들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다. 밀고할 가능성이 있는 배신자란 이유에서였다. 범인들은 이바노프를 죽인 후 시신에 돌을 매달아 이바노프가 다니던 학교 연못에 던졌다. 그러나 사건은 곧 발각되었고 경찰이 범인들의 검거에 들어갔다. 관련자들은 대부분 체포됐으나 주범 네차예프는 스위스로 도피했다. 그 뒤 1872년 현지 경찰에 체포되어 러시아로 송환되고, 재판에서 20년 형을 받는다. 그는 10년 후 옥사했다.

그런데 네차예프 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안나의 남동생 이반이 도스토옙스키가 살고 있던 드레스덴으로 왔다. 도스토옙스키가 외국 신문에 난 러시아 상황에 관한 기사들을 보고 처남이 다니는 모스크바 표트르 농업 아카데미에 시위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마침 딸집에 와 있던 장모에게 처남을 그곳으로 불러들이도록 했다. 처남이 분위기에 휩쓸려 시위에 가담할까봐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처남으로부터 러시아의 학생운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네차예프 사건이 신문에 보도된 후 처남 이반은 자기가 좋아하고 따랐던 이바노프가 살해된 데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 이반은 이바노프가 매우 똑똑했으며 자기의 소견이 뚜렷한 학생이었다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반의 말에 따라 이바노프가 살해당한 표트르 농업 아카데미의 동굴과 연못 등을 메모했고 이를 그 뒤 『악령』에 사용했다.

사건의 주범 네차예프는 1868~1969년 학생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됐으나 탈옥에 성공해 스위스로 탈출했었다. 그는 그곳에서 무정부주의자 바쿠닌 등과 교류했고, 1869년 러시아로 잠입해 '인민의 재판'이라는 비밀 혁명 결사를 조직했다. 이듬해 2월 19일 농노해방 9주년에 맞춰 대규모 대중 봉기를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이 조직의 강령에는 '혁명의 목적을 위해서는 일신의 이해도, 육친의 정도 버리고 돌보지 않는다'는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이바노프는 이러한 문제 등에 대해 항의를 했다. 그는 네차예프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래서 네차예프 조직에서 이바노프가 밀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를 꾀어내어 살해한 후 시신을 연못에 유기했던 것이다. 살해에는 네차예프를 비롯해 조직원 몇 명이 가담했는데, 이는 관계자 여럿을 공범으로 만들어 밀고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과격한 사회운동권 세력의 조직원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수법이기도 했다.

소설 『악령』에서도 이 부분은 실제 사건과 거의 비슷하게 묘사된다. 소설 속에서 네차예프에 해당되는 '표트르'를 비롯한 5인조는 밀고의 우려가 있던 소설 속의 이바노프인 '샤토프'를 죽여 몸에 돌을 매달아 연못에 던져 넣는다. 사건에 관련된 많은 사람이 거의 죽거나 체포되며 표트르는 해외로 달아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악마적 허무주의자 '스타브로긴'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악령』에 대한 대조적 반응

『악령』은 네차예프 사건이 모티브가 됐지만 전적으로 그 사건을 묘사한 소설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악령』을 사건 두 달 후인 1870년 초 쓰기 시작해 1871년 7월쯤 마무리한다. 유럽 거주 마지막 18개월 동안 도스토옙스키는 대부분의 시간을 『악령』을 집필하는 데 썼다. 그는 이 소설을 몇 번이나 고쳐 썼다. 『악령』은 <러시아 통보>에 1871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해 1872년 12월호에서 완결된다. 『악령』이 나온 후 소설에 나타난 도스토옙스키의 무신론적 과격 사회주의 혁명 세력에 대한 부정적 입장은 일부 세력으로부터 반동적이란 비판을 받았지만 보수 진영은 크게 환영하는 등 대조적인 반응을 보였다. 1872년은 네차예프가 스위스에서 체포되어 러시아로 송환되던 해였기 때문에 연재 중인 『악령』은 더욱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다음 호에 계속)


도스토옙스키, 시베리아에서의 첫사랑의 추억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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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보쿠즈네츠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연구동. 도스토옙스키 흉상이 건물을 바라보고 있다.

노보쿠즈네츠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연구동. 도스토옙스키 흉상이 건물을 바라보고 있다.

박물관의 첫 전시물은 마리야 그림

시베리아 노보쿠즈네츠크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본채는 마리야 가족이 세 들어 살던 단층 통나무집 전체를 개조해 만든 것인데 집 자체가 크지 않다. 집의 내부는 앞서 말했듯이 네 부분으로 나뉜 십(十) 자 구조인데, 이 중 안쪽 구석방에서 마리야 가족 세 식구가 살았다. 남편 이사예프가 죽은 후에는 마리야가 아들 파벨과 둘이 살았다. 이 박물관으로 들어서면 첫 번째 전시실에 처음 보이는 것이 오른쪽 벽에 있는 마리야의 전신 그림이다. 1862년에 찍은 마리야의 전신 옆면 사진을 토대로 바샤리나라는 화가가 1996년에 그린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의 첫사랑이었던 마리야는 금발의 미인이다. 그런데 사진에서 보이는 옆얼굴은 바짝 마른 모습이어서 미인의 인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해설사 카체리나 양에게, “마리야는 미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림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카체리나 양은, “화가가 마리야가 폐병으로 죽기 2년 전에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인데 마리야가 병이 깊이 든 상태여서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벽면에 그림의 원본이 된 마리야의 작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오래된 것이어서 사진 자체가 선명하지 않았다. 그림은 지나치게 병색을 강조한 듯한 아쉬움이 있었다.
 

마리야에 대한 애타는 사랑으로 저술 활동도 멀리해

응접실이었을 첫 번째 전시실에는 초입에 있는 마리야의 전신 그림과 함께 도스토옙스키의 대형 얼굴 그림, 도스토옙스키가 브랑겔 남작에게 쓴 편지의 사본, 도스토옙스키의 고난을 상징하는 사형장에서 입었던 흰색 수의를 다소 추상적으로 나타낸 모형물 등이 있었다. 또 둥근 탁자 앞에 앉아 도스토옙스키의 편지를 읽고 있는 모습의 마리야의 디오라마(박물관의 입체 모형, 마네킹)가 창문 옆에 있다.

두 번째 방은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에서 쓴 작품인 『아저씨의 꿈』에 나오는 여주인공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모스칼료바’의 살롱을 소설에 묘사된 것처럼 소파, 거울, 시계, 사모바르(러시아의 전통적인 끓는 물 주전자) 등으로 꾸며놓았다.

작은 도시 모르다소프 시의 오지랖 넓고 단수 높은 소설 속의 여인 모스칼료바는 아름다운 딸 지나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돈 많은 늙은 공작에게 시집보내 부유한 귀족 미망인을 만들려고 계략을 꾸민다. 이 계략은 결국 실패하고 말지만 여인의 악착같은 근성은 마침내 딸을 어느 도시의 시장 부인으로 만들고야 만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에서 어떤 문학인도 겪지 못한 엄청난 고난을 겪었지만 유형소에서 출소 후 시베리아에서 군인으로 살던 기간의 문학적 축적은 별로 많지 않다. 마리야에 대한 애타는 사랑으로 오랜 기간 저술 활동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에서의 마지막 해인 1859년 『아저씨의 꿈』과 『스체판치코보 마을』 등 겨우 두 편을 발표했을 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저작에 대한 출판 금지가 풀린 것은 1857년이었다. 그해에 세습 귀족의 자격도 돌려받았다. 자신의 유형 생활을 남의 수기 형식으로 쓴 『죽음의 집의 기록』은 시베리아에서 상당 부분을 써놓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서 완성했다. 

마리야 가족이 살던 방. 왼쪽 여인이 나스타시야 오른쪽이 카테리나.

마리야 가족이 살던 방. 왼쪽 여인이 나스타시야 오른쪽이 카테리나.

마리야 가족이 살던 방. 왼쪽 여인이 나스타시야 오른쪽이 카테리나.

『아저씨의 꿈』에 나오는 살롱.

『아저씨의 꿈』에 나오는 살롱.

『아저씨의 꿈』에 나오는 살롱.

『죄와 벌』의 술주정꾼 ‘마르멜라도프’의 부조도

『아저씨의 꿈』을 토대로 미니 살롱으로 꾸민 둘째 방과 마리야 가족이 살던 셋째 방 사이에는 작은 복도가 있다. 그 한쪽 면에는 두 개의 커다란 정교회 성당이 들어 있는 당시 쿠즈네츠크 중심지의 그림이 걸려 있다. 두 성당 중 조금 더 큰 곳이 도스토옙스키가 마리야와 결혼식을 올린 아름다운 오디기트레옙스크 성당이다. 이 오디기트레옙스크 성당은 1764년에 건립되었는데 1919년 러시아 내전 때 한 볼셰비키 무신론자의 방화로 소실된 후 복원되지 못했다. 다른 두 벽면에는 마리야가 쿠즈네츠크에서 살 때 결혼까지 생각했던 도스토옙스키의 경쟁자, 젊은 교사 베르구노프와 『죄와 벌』의 술주정꾼 ‘마르멜라도프’의 부조가 붙어 있었다. 마르멜라도프의 부조가 붙어 있는 이유는 소설에 나오는 그의 부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모델이 이사예바라고 분석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카테리나는 마리야처럼 폐병 환자다. 술주정뱅이 남편 때문에 가난하게 살지만 귀족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자존심이 강한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다. 마리야 식구가 살았던 세 번째 방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는 화장대 양쪽으로 두 여인의 디오라마 인형이 서 있다. 한 사람은 『죄와 벌』의 술주정꾼 마르멜라도프의 아내 카테리나이고 다른 하나는 『백치』의 여주인공 나스타시야라고 했다. 마리야가 두 인물의 모델이라는 의미다. 『백치』의 나스타시야는 대체로 강한 성격을 지닌 도스토옙스키의 젊은 애인 수슬로바가 모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는 마리야가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마르멜라도프가 소설 속에서 설명하는 카테리나의 성격이 마리야의 그것이라면 수슬로바의 성격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하긴, 소설 속 주인공의 성격이 어느 한 사람의 성격만을 표현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네 번째 방은 결혼식을 한 성당의 내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식을 집전한 튜멘체프 사제의 사진도 있었다. 한쪽 벽에는 도스토옙스키가 과거 이곳에 와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1904년 10월에 발행된 <시베리아 생활>지의 기사도 전시되어 있었다. 이 기사 속에는 1858년에 찍은 장교 군복을 입은 도스토옙스키의 사진과 마리야 가족이 살던 집(현재의 노보쿠즈네츠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과 결혼식을 올린 성당의 사진이 들어 있다. 마리야가 살던 집을 개조해 만든 박물관 외에 박물관 연구동이 인근에 있었다. 시베리아 스타일의 2층 목조건물이었는데 규모가 작지 않았다. 이 연구동은 박물관 행정실로 불렸다. 이 연구동 앞마당에는 2001년에 세워진 도스토옙스키의 흉상이 사각의 돌기둥 위에서 연구동 건물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의 흉상은 노보시비르스크 거리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얼굴상과 높이나 규모 등이 비슷했다. 노보쿠즈네츠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는 4명의 연구원을 포함해 모두 21명의 직원이 있다고 한다. 작은 규모의 박물관 치고는 직원 수가 꽤 많았다. 그만큼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때때로 도스토옙스키 학술회의도 열린다고 했다.
 

결혼 후 비로소 남편이 간질 환자라는 것을 알다

<시베리아 생활> 1904년 10월 10일 자 신문 기사.

<시베리아 생활> 1904년 10월 10일 자 신문 기사.

<시베리아 생활> 1904년 10월 10일 자 신문 기사.

전시실로 쓰이는 통나무집 전체 면적은 도스토옙스키가 마리야와 결혼 후에 살았던 세미팔라친스크의 2층 통나무집 한 층만 한 규모였다. 정확한 면적을 비교해 보지는 않았지만 나의 눈에는 양쪽 집의 바닥 면적이 비슷해 보였다. 마리야 입장에서 보면 도스토옙스키와 재혼해 답답한 골방살이에서 탈출한 셈이다. 그런데 결혼 후 신혼집이 마음에 들었는지, 신혼생활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전혀 없다. 어떤 이는 결혼식 후 세미팔라친스크 신혼집으로 돌아가던 중 발생한 간질 발작이 두 사람의 신혼 분위기를 망쳤을 것이고, 그 후의 부부 생활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마리야는 도스토옙스키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도스토옙스키가 간질 환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첫 남편이 죽어 재혼했는데 이번에는 간질 환자라니…. 마리야의 충격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도스토옙스키에게 따졌을 수도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당시 자신이 이따금 겪어온 이상 현상이 간질에서 오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어떤 신경성 질환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결혼 후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의 병이 간질인 줄 알았다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는 간질 환자가 가끔 등장하는데, 『백치』의 주인공 ‘미시킨 공작’,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부친 살해범 ‘스메르쟈코프’가 간질 환자다. 『백치』에서 도스토옙스키는 간질 증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간질병 발작은 순간적으로 온다. 이 순간에는 갑자기 얼굴, 특히 시선이 유난히 일그러진다. 전신과 모든 안면 근육은 경련을 일으킨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상상 불가능한 무서운 비명이, 인간적인 모든 것을 일순간에 토해버리려는 듯 한꺼번에 가슴속에서 터져 나온다. 그래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조차 그것이 바로 이 사람의 비명이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이 사람의 내부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간질병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언가 신비스러운 듯한 지독한 공포감을 일으킨다고 한다.”

마리야가 처음 본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이 이런 것이었다면 마리야가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데 마리야도 환자였다. 폐결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결혼 두 해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간 이후 더 악화되었다. 나중에는 기후가 비교적 온화한 블라디미르로 홀로 요양을 가 있기도 했다. 그녀는 도스토옙스키와 재혼 7년 만인 1864년 4월 15일 모스크바에서 40세로 생을 마감했다.

CREDIT INFO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2018년 10월호
2018년 10월호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