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좋아하는 걸 늦게 만날까요?” 이시영은 여배우로서 다소 늦은 나이인 스물여덟 살에 데뷔했고, 서른 살이 넘어 복싱 선수가 됐다. 늘 다른 이들보다 늦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그래서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
“마음이 조급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시작해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악착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요. 복싱도 마찬가지예요. 살면서 운동을 한 적이 없었는데 복서 역할을 맡아 배우다 보니 재미있더군요. 정말 설레더라고요. 서른 살을 앞두고 꿈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고요. 그게 제 인생의 전환점이에요. 그때 마흔 살이든, 쉰 살이든 언제든지 꿈이 생길 수 있고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여전히 조급해질 때가 있지만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이 생겼어요.”
2010년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대회 우승 후 그녀에게 액션을 동반하는 역할 제의가 들어왔다. KBS <포세이돈>(2011)을 시작으로 <골든크로스>(2014), OCN <아름다운 나의 신부>(2015), MBC <파수꾼>(2017)과 <사생결단 로맨스>(2018)에서 액션 연기를 보여줬고, MBC <진짜 사나이>, KBS <우리 동네 예체능> 등의 예능에서도 활약했다. 그렇게 액션이 가능한 여배우로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던 중 영화 <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특공 무술까지 가능한 실력 좋은 경호원이었으나 임무 수행 중 과잉 경호 논란에 휘말리며 교도소에 수감된 ‘인애(이시영 분)’가 출소 후 동생 ‘은혜(박세완 분)’와 평범한 일상을 꿈꿨지만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이 사라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극에서 인애는 동생의 학교, 경찰,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자 동생을 직접 찾아나섰고 그 과정에서 동생의 비밀을 알고 분노가 폭발한다.
“빨간 치마와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차에서 내려 ‘오함마’를 들고 걷는 첫 장면이 마음에 강렬하게 남았어요. 원피스와 하이힐은 여자는 예쁘고 얌전하고 약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이잖아요. 여자들의 틀에 박힌 이미지를 깨고 나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감독님의 생각에 공감했어요. 제작 당시 가제가 ‘오뉴월’이었는데 의도가 확 느껴지지 않나요? 인애가 가해자들을 모두 응징하는 게 통쾌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저 혼자 액션을 한다는 점도 매력적이었고요.”
액션에 대한 호기심과 정의감으로 영화를 시작한 이시영은 이번 영화에서 대역, CG, 와이어의 도움 없이 맨몸으로 액션을 보여준다. 게다가 끊어 촬영하지 않고 ‘원 신 원 테이크’로 촬영하거나 촬영 커트를 나누지 않고 롱테이크로 촬영해 액션의 리얼함을 살렸다. 그야말로 이시영의 액션으로 시작해 액션으로 끝난다.
“감독님께서 화려한 기법과 기술이 들어간 액션보다는 리얼한 액션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열심히 했지만 배우의 입장에선 아쉬운 마음도 커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액션 전문 배우보다는 어설프니까요. ‘나의 액션이 대중에게 만족을 줄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었지만 결국 선택했어요. 배우 이시영의 필모그래피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액션을 하는 것은 다시 경험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거든요.”
운동하는 여자
영화를 보고 나면 이시영의 액션이 오랫동안 기억된다. 자신보다 덩치가 크거나 칼이나 총 같은 무기를 든 남성을 기술로 거침없이 제압하기 때문. 이시영은 이 액션을 위해 3개월 동안 주짓수를 배웠다.
“인애가 다수의 남자를 상대해 이긴다는 설정에 설득력이 생기려면 액션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애가 다른 액션 영화처럼 살인 병기로 나오거나 무기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맨몸으로 싸우기 때문에 고민이 컸죠. 그러던 중 감독님께서 주짓수를 배우라고 제안하셨어요. 주짓수는 여자가 남자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무술이라고 하더군요. 어설프지 않게 보이고 싶어서 어느 때보다 열심히 배웠어요. 예전엔 스케줄이 바쁘면 액션스쿨을 건너뛰기도 했는데, 3개월 동안 성실하게 참여했어요.”
이시영은 액션 연기를 위해 체중도 증량했다. 빨간 원피스가 주는 제약 때문이었다. 의상 때문에 모든 동작이 정확하지 않을 것이고 맨팔이나 맨다리가 드러나면 동작이 어설퍼 보일 것을 우려했기 때문. 무술 감독 역시 극이 진행되는 내내 동일한 복장을 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었다고. 그러나 이시영과 제작진은 초심을 잃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시영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체격을 키우기로 했다. 복싱 선수로서 체중을 조절했던 경험이 도움이 됐다.
“왜소해 보이는 걸 막으려고 체격을 키웠어요. 복싱 실업팀에서 배웠던 증량 방법을 활용했죠. 일단 살을 막 찌운 다음에 근육을 남겨두고 지방만 빼는 거예요. 만약 52kg에서 56kg까지 증량해야 하면 일단 58~60kg까지 살을 찌우는 거예요. 그리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서 지방을 빼면 돼요. 촬영 시작 전에 52kg이었는데 두 달 동안 4kg을 늘렸어요. 더 늘리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더군요.”
주짓수뿐만 아니다. 이시영은 극에서 ‘정사장(김원해 분)’의 몸을 타고 올라 다리로 목을 감아 암바를 거는 등 고난도 액션을 보여준다. 대역을 쓰고 싶었지만 근성으로 결국 스스로 해냈다.
“김원해 선배과 합을 맞춘 장면은 아쉬움이 커요. 액션 한 시퀀스가 더 있었는데 촬영하지 못했거든요. 원 신 원 테이크를 고수하며 28시간 정도 촬영하고 나니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어요. 저와 선배님이 처음으로 감독님께 대역 배우를 쓰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결국 촬영하지 않는 걸로 정리됐어요. 전문가에 비하면 뛰어나진 않지만 몸짓 하나하나에 동생을 구하기 위한 절박함이나 분노가 묻어나길 바라며 최선을 다했어요.”
이시영이 극에서 ‘하상만’ 역의 배우 이형철과 대결하는 장면은 명장면 중의 명장면. 드리프트부터 시작해 카체이싱을 하고, 비좁은 차 안에서 일대일 액션을 펼치며 박진감을 선사한다. 이시영 역시 이 장면이 가장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보통 촬영분 중 일부는 편집되곤 하는데 형철 선배님과 맞춘 합은 모두 영화에 담겼어요. 일반 배우끼리 액션을 하면 다칠 확률이 높고, 촬영 가능한 차가 한 대뿐이라서 연습을 많이 했거든요. 저도 개인적으로 준비를 많이 했어요. 운전과 관련된 거의 모든 면허를 취득했고요. 카체이싱도 배웠는데 하면 할수록 욕심이 생기더군요. 실제로 차를 부딪치며 달릴 일이 없는데 해보니까 희열이 느껴졌어요. 언젠가 카체이싱 위주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요.”
이시영에게 최근 액션 배우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마동석과 함께 액션 연기를 하면 재미있겠다며 콤비 혹은 대결 구도 중 어떤 호흡에 도전해보고 싶냐고 묻자 곧바로 “콤비”라고 답변했다.
“대립하면 안 될 것 같아요.(웃음) 선배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이 좋을 것 같아요. 반대의 경우라면 <킹스맨>처럼 서로 필살기를 가진 채로 대립한다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처절하게 깨지는 악역으로 액션을 해보고 싶거든요. 기회가 되면 얼마나 처절하게 깨지는지 보여드리고 싶어요. 때로는 주인공보다 연민이 생기는 매력적인 악역도 있으니까요.”
이시영은 <언니>를 촬영하며 주연 배우로서 부담을 느꼈고 외로웠지만, 영화를 마치고 나니 오랫동안 액션 영화의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았다. <헤이와이어>(2011)와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2013)에 출연한 격투기 선수이자 배우인 지나 카라노나 <아토믹 블론드>(2017)의 샤를리즈 테론처럼 멋있는 액션을 찍어보고 싶은 욕망이 커졌다. 액션 배우로서 최고라는 수식어를 듣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녀의 바람은 멀지 않은 미래에 이뤄질 것 같다. 영화 속 이시영의 액션을 두고 ‘이시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액션’이라는 평가가 줄을 잇는 상황이고, 일각에서는 국내에서 여자 액션 배우 중 최고라고 평가받는 하지원의 뒤를 잇는 배우가 탄생했다고 이야기한다. 액션 하는 여배우라고 하면 이시영이 떠오른다는 의미다.
“배우로선 ‘좀 더 강하고 멋있게 동작을 했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영화를 계기로 또 다른 스타일의 액션에 도전하고 싶어졌어요. 예전엔 복싱 때문에 액션 쪽으로만 관심을 받는 것이 아쉬웠는데 이젠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한 우물을 파면서 진화하고 또 다른 것에 도전하게 되는 것 같아서요. 이렇게 찾아주실 때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하다 보면 다른 기회도 생기지 않을까요? 그때 잘하면 되죠. 가끔씩 새로운 멜로나 코믹극의 캐릭터를 만나면 마치 보너스 같다고 생각해요.”
이시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캐릭터로 대중을 찾는다. <애정의 조건> <장밋빛 인생> <소문난 칠공주> <수상한 삼형제> <왕가네 식구들> 등 40%를 웃도는 대박 드라마이면서 동시에 막장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을 집필한 문영남 작가의 신작 KBS2 <왜그래 풍상씨>에 출연하는 것.
“문영남 작가님의 작품이 막장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고 애환이 담겨 있으니까요. 작가님의 드라마엔 특색이 있어요. 이유 없이 사람이 죽거나 살인을 하는 일은 없어요. 시청률을 위한 자극적인 소재가 아니라 캐릭터의 아픔을 꺼내려는 것 같아요. 드라마 속 오남매도 아픈 과거가 있어요.”
결혼과 출산, 육아를 경험하면서 제게도 변화가 생겼어요.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죠.
시간이 흐를수록 이시영이란 존재로 안정되고 있어요.
결혼과 출산으로 얻은 안정감
이시영은 극에서 ‘이풍상(유준상 분)’의 동생이자 쌍둥이 ‘이화상’ 역을 맡았다. 이화상은 노는 것을 좋아하며 버는 족족 사치하는 데 써버리고, 동생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느라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못해 의사가 된 쌍둥이 자매 ‘이정상(전혜빈 분)’에게 열등의식을 갖고 있다.
“이름처럼 화상 같은 캐릭터예요. 이화상은 상대적 박탈감을 갖고 있는데, 연기를 할수록 불쌍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지금껏 선하고 정의로운 역할을 자주 맡아서 화상이란 캐릭터가 신선하게 느껴져요. 보통 우리는 살면서 많이 참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눈물을 참거나 화를 참는 경우가 늘어나죠. 그런데 화상은 모든 감정을 쏟아내는 캐릭터라 은근히 스트레스가 풀리더군요. 평소엔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 하냐고요? 운동을 하니까 자연스럽게 풀려요. 주로 한강변을 뛰는데 자연스럽게 생각과 감정이 정리돼요.”
대화는 연기 이야기로 흘렀지만 결국 다시 운동으로 돌아왔다. 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살았을지 모르겠다는 그녀는 출산 50일 만에 운동을 시작해 100일 만에 하프 마라톤에 출전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여자는 출산 후에 몸이 바뀐다고 하잖아요. 저는 출산 후 회복하기까지 일주일 정도 걸렸고 오히려 몸이 좋아진 편이에요. 컨디션이 좋아서 특별히 산후 조리도 하지 않았고요. 몸이 가볍다는 느낌이 들어서 50일 만에 운동을 시작했어요. 천천히 걷다가 러닝을 하고 하프 마라톤까지 나가게 됐죠. 운동을 하면서 기록을 측정하는데 출산 전보다 좋아졌어요.”
이시영은 결혼하고 출산을 하면서 심리적으로 좀 더 성숙해진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연기를 할 때도 편안해졌단다.
“원래 얌전하기보단 활발한 편으로 천방지축 같은 면이 있었어요. 그런데 결혼과 출산, 육아를 경험하면서 주변과 타협하거나 수용하는 경우가 늘어났죠. 남편에게 의지하고 아이를 보면서 행복을 느껴요. 동시에 이시영이란 존재로 안정되고 있어요.”
원톱 주연이, 리얼한 액션이 부담이었고 때로는 좌절도 했지만 이시영은 결국 해냈다. 남들보다 조금 느리더라도 그녀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내고 있다. 흔들리고 휘청거릴지라도 생각한 방향으로 걷는 것이 이시영이 지닌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