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안 출판업자의 간계
출판업자 스첼로프스키는 당시 문인들과 음악가들이 곤경에 처할 때를 기다렸다가 이들의 작품을 후려쳐 헐값에 사들이는 방법으로 이득을 취해온 악랄한 자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1865년 저작권료로 받은 3,000루블도 대부분 스첼로프스키의 수중으로 되돌아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수법은 이러했다. 스첼로프스키는 당시 도스토옙스키의 채권자들로부터 그의 어음을 헐값에 매입한 후 앞잡이를 두 사람 내세워 도스토옙스키에게 "채무자 감옥으로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빚 독촉을 하도록 했다. 그러고는 궁지에 몰린 도스토옙스키에게 접근해 3,000 루블의 저작출판권 계약을 체결하고 돈을 공증인에게 맡겼다. 공증인은 받은 돈을 다음 날 도스토옙스키 채권자들에게 대부분 지불했는데, 그 채권자들이란 다름 아닌 스첼로프스키가 매수한 유령 채권자였던 것이다. 결국 돈은 다시 스첼로프스키에게 회수된 셈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도박꾼』의 구술을 다 마친 다음 날인 1866년 10월 30일, 안나에게 약속한 50루블을 주면서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도와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이날은 도스토옙스키의 생일이었다(*제정 러시아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의 날짜, 현재의 그레고리력으로는 11월 11일). 11월 1일 『도박꾼』의 원고를 무사히 넘긴 후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러시아 통보>에 연재하고 있던 『죄와 벌』 마지막 부분의 집필을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당신과 작업하는 게 너무 수월했소. 앞으로도 일을 속기로 하고 싶은데, 내 동료가 되는 걸 거부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안나는 기꺼이 돕겠다고 답했다. 『죄와 벌』 속기 작업의 계약을 하러 간 11월 8일, 도스토옙스키는 왠지 들떠 있었다. 그는 안나를 보자 거의 감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나에게 청혼하다
이날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새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젊은 여성의 심리를 알아야 결말을 맺을 수 있는데, 모스크바에 있을 때라면 조카딸 소냐에게 물어보겠지만, 지금은 안나에게 도움을 구해야겠다고 했다. 새 소설의 주인공은 나이가 도스토옙스키와 비슷한(45세쯤 되는) 화가다. 이 화가는 어린 시절, 사랑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그 후 중병이 들어 10년 동안이나 사랑하는 예술에서 떠나 있어야 했다. 병들어 있는 동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다행히도 10년 만에 병을 고치고 다시 사회로 나왔다. 사회에 나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으나 그녀가 죽어 화가는 홀아비가 되었다. 또 자신과 가까운 사랑하는 누이들도 세상을 떴으며, 경제적으로는 가난과 빚에 짓눌리는 상태가 되었다(안나가 듣다 보니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화가는 어느 날 화가 모임에서 아냐(안나의 애칭)라는 젊은 여성을 만났는데, 볼수록 점점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여자 주인공 아냐가 안나보다 두 살쯤 많은 나이 즉, 22살쯤 된다고 했다(이 아냐라는 여자에 대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자신이 안나라는 생각을 까맣게 잊고 그 여주인공의 모델이 도스토옙스키가 언젠가 결혼할 생각을 했었다고 이야기한 젊은 작가 지망생 안나 바실리예브나 코르빈-크루코프스카야 라고 추측했다). 화가는 그녀와 함께라면 행복을 꿈꿀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녀에게 청혼하고 싶었지만 그런 꿈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젊은 아냐가 그처럼 나이 많고, 병들고, 빚에 시달리고 있는 화가를 사랑할 수 있을지, 그런 지독한 희생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등이 도스토옙스키가 안나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작가로서 젊은 여성의 심리를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안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왜 불가능하죠?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정말 당신의 아냐가 머리는 텅 비고 치장만 요란한 여자가 아니라 인정이 있고 착한 마음을 지녔다면, 당신의 화가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가 병들고 가난하니까? 외적인 것, 뭐 부귀라든가 하는 것만으로 사랑할 수가 있는 건가요? 그리고 그녀의 입장에서 무엇이 희생이라는 거죠?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면 스스로도 행복할 것이고 결코 후회할 리가 없을 거예요!"
안나는 열변을 토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흥분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녀가 그를 평생토록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진짜 믿는단 말이오?"
"그 화가가 나라고 상상해보오.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내 아내가 되어달라고 부탁한다고 상상해보오. 당신은 내게 뭐라고 답하겠소?"
안나는 그제야 이것이 단순히 작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면 당신에게, 당신을 사랑하고 일생을 다해 사랑할 거라고 답할 거예요!"
위의 이야기는 앞에서도 인용했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회고록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에 나오는 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청혼과 안나의 수락은 이렇게 소설처럼 이뤄졌다. 안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청혼을 받고 "어마어마한 행복에 감격하여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전날 밤 꿈속에서 나무 서류 상자 속에서 밝게 빛나는 작은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이야기도 이날 안나에게 했다. 그 나무 상자는 카자흐 학자 초간 발리하노프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발리하노프는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유형 생활을 마친 직후 알게 된 카자흐 유력 가문의 젊은 학자로 시베리아 세미팔라친스크(현재는 카자흐스탄 세메이)에서 군 복무 시절 가깝게 교류하던 인물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청혼한 후 "그 다이아몬드가 바로 안나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나는 마침내 그 다이아몬드를 찾았고, 평생토록 간직할 것이오." 안나는 웃으며, "당신이 찾은 건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그냥 돌멩이라고요"라고 답했다.
안나는 이날 도스토옙스키가 자기에게 청혼을 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딸의 남편이 될 사람의 나이와 간질이라는 무서운 질병, 앞으로 딸에게 닥칠 생활고 등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결혼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당시는 안나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반년 조금 더 지난 때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병으로 그해, 1866년 4월에 사망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열렬한 독자였던 안나
안나의 아버지는 독서광이었다. 안나는 아버지 덕에 도스토옙스키를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안나는 회고록에서 아버지는 문학 이야기가 나오면 "오늘날 작가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 시대엔 푸시킨과 고골, 주콥스키가 있었지 않은가! 젊은 작가 중에선 장편 소설가 도스토옙스키가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의 저자 말이야. 이 사람은 진짜 천재야. 불행하게도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시베리아로 끌려가서 소식이 묘연해졌지만 말이야!"라고 말했다. 안나는 아버지가 도스토옙스키 형제가 새 잡지 <시대>를 발간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매우 기뻐했었다고 적었다. 안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열렬한 독자였다. 그녀는 1862년에 나온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으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시베리아 강제 노역의 끔찍한 생활을 견뎌낸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깊은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어느 날 그녀에게 도스토옙스키를 위해 속기사로서 일할 기회가 닥쳐왔던 것이다. 그녀는 "내가 크나큰 감동을 받은 작품을 써낸 사람의 삶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후일 말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안나가 도스토옙스키의 청혼을 그처럼 쉽게 받아들인 데 대한 설명이 될 만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평소 존경하거나 숭배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자기보다 25살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을 배우자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와 작업을 하면서 이 똑똑한 여성이야말로 위기에 빠진 자신에게 신이 보내준 수호천사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청혼한 다음 날인 11월 9일 안나의 집으로 찾아가 안나의 모친에게 정식으로 안나와의 혼인 의사를 밝혔다. 안나의 모친은 푸근한 미소로 늙은 사위를 받아들였다.
도스토옙스키 친척들의 결혼 반대
안나의 집에서도 물론 식구들이 모두 찬성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반대 기류가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오히려 도스토옙스키 집안 쪽이었다. 미망인이 된 형수 에밀리야 페도로브나와 의붓아들 파벨 알렉산드로비치가 내놓고 재혼을 반대했다. 두 사람은 안나에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에밀리야는 도스토옙스키가 형수인 그녀와 그녀 가족의 생계를 떠맡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늙은 시동생이 다시 결혼을 한다고 하니까 재정적인 지원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고 깜짝 놀라 재혼에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벨이 반대한 이유도 비슷했을 것이다. 평생 형을 의지하고 형의 도움을 받았던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형의 미망인과 조카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죽은 형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첫 부인 마리야가 남겨놓은 의붓아들 파벨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었다. 언제나 골칫덩어리였던 파벨은 도스토옙스키의 재혼 소식을 듣고는, 나이로 보나 기력으로 보나 재혼은 정신 나간 짓이라고 도스토옙스키에게 훈계하듯 말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파벨의 이 말에 분개하여 고함을 쳐 그를 서재에서 쫓아냈다. 파벨은 1846년생으로 안나와 같은 나이였다(안나가 넉 달 빠르다). 안나는 그녀의 회고록 속에서 파벨을 막돼먹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을 떠나고 수십 년 후에 나온 회고록임에도 안나에게 파벨은 끝끝내 불쾌한 존재로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결혼 직후 심각했던 간질 발작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와 2월 15일 이즈마일로프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후 두 사람은 친척과 친지들의 집으로 결혼 인사를 다녔다. 그 당시는 친척과 친지들이 결혼한 새 부부를 점심이나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데 결혼 초기 어느 날 두 사람이 친척집에서 점심을 먹고 마리야의 언니 집으로 갔을 때였다. 도스토옙스키가 마리야의 언니와 즐겁게 이야기하던 도중 갑자기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당시 이야기를 안나는 그녀의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도스토옙스키)는 극도로 생기가 넘쳐서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언니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더듬거리며 말을 멈추더니 창백해진 얼굴로 소파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놀라 그의 변해버린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사람의 소리라 할 수 없는 끔찍한 비명이, 아니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고, 표도르 미하일로비치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와 동시에, 남편 옆에 앉아 있던 언니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니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흐느끼며 방을 뛰쳐나갔고, 형부가 그 뒤를 쫓아갔다.
후에 나는 간질 환자들이 일반적으로 발작이 시작되면 내지르는 이 '사람의 소리라 할 수 없는' 울부짖음을 수십 번이나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소리만 들으면 언제나 몸서리치도록 무서웠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로 그때, 그 순간에는 난생처음으로 간질 발작을 보았음에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나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힘을 다해 그를 소파에 앉혔다. 감각을 잃은 남편의 몸이 소파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보았을 때 얼마나 끔찍했던지. 그러나 내게는 그를 받쳐줄 힘이 없었다. 나는 불이 켜진 램프가 놓인 작은 탁자를 치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마루로 내려오게끔 했다. 그리고 나 또한 내려 앉아 경련이 계속되는 동안 그의 머리를 내 무릎에 받치고 있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경련은 차츰차츰 잦아들었고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처음에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고,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내내 무언가 말하고 싶어 했지만, 말이 아닌 소리를 낼 뿐이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30분쯤 지난 다음에야 우리는 미하일로비치를 일으켜 겨우 소파에 눕힐 수 있었고, 우리는 집으로 가기 전에 그가 안정을 취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고통스럽게도 첫 번째 발작이 있은 지 한 시간 뒤에 또다시 발작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정신을 차리고도 2시간 이상 아파서 고함을 지를 정도로 심했다. 그건 정말 소름 끼치도록 지독한 그 무엇이었다! 그 후에도 이중 발작이 있긴 했지만 비교적 드문 편이었다."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안나는 남편의 이러한 간질 발작을 보고 그가 미쳐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런 생각이 들자 이루 말할 수 없이 섬뜩한 기분이 나를 휘감았다!"고 했다. (다음 호에 계속)
<우먼센스>가 후원하고 바이칼BK투어(주)가 주관하는 '『시베리아 문학기행』의 저자 이정식 작가와 함께하는 러시아 문학 기행'이 8월 24일부터 31일까지 7박8일의 일정으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일원에서 실시된다. 자세한 내용은 <우먼센스> 2018년8월호 312쪽 참조. 문의 및 신청은 바이칼BK투어(주) 02-1661-3585.
도스토옙스키, 시베리아에서 사랑에 빠지다
옛 통나무집도 박물관의 일부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은 외형적으로 두 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하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신혼 시절 살던 통나무집이고, 다른 하나는 1971년에 지은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다. 두 건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콘크리트 건물 2층과 통나무집 2층이 박물관 전시실이다. 먼저 박물관으로 지은 건물의 2층 전시실을 보고난 후 서재와 응접실, 침실 등이 있는 통나무집 2층으로 이동하는 것이 방문 코스 같았다. 새 건물 1층에는 사무실이 있고 일부는 소규모 전시를 위한 대여 공간으로 쓰이고 있었다. 통나무집은 박물관 로비에서 계단을 통해 연결된다. 통나무집 뒷부분 일부를 뜯어서 새로 지은 박물관과 연결해놓았다.
나는 세메이에서의 둘째 날인 5월 5일, 한국에서는 어린이날인 이날 오전 일찍 박물관에 다시 갔다. 전날 날이 흐려 제대로 못 찍은 박물관 외관도 한 번 더 찍고 전시실도 재차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이날 10시 반경부터 다시 비가 내렸지만 그 이전까지는 비교적 청명했다. 일찍 아침을 먹고 호텔에서 도보로 20여 분 만에 박물관에 도착했다. 차를 타고 갔던 길과 다른 방향으로 박물관에 다다르게 되었다. 다가가며 보니 건물 측면에 커다란 벽화가 보여 처음엔 다른 건물인 줄 알았다. 전날 보지 못한 도스토옙스키를 상장하는 펜 등을 그린 대형 그림이었다. 다시 가지 않았다면 건물 옆면에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세메이를 떠날 뻔했다. 박물관이 문을 여는 9시 이전에 도착했으므로 먼저 박물관 외관을 카메라로 찍고 있는 사이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구면이 된 이리나 부관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소 세 마리 값 월셋집
나는 이리나 부관장에게 도스토옙스키 신혼집의 월세에 대해 물어보았다. 전날 방문했을 때 이리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세를 살았던 통나무집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집의 주인은 우체부였으며 1층은 주인집에서 쓰고 2층을 도스토옙스키에게 세를 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월세가 은화 8루블이었는데, 도스토옙스키가 받는 군인(준위) 봉급인 은화 16루블의 절반이라고 했다. 그 당시 소 한 마리 값이 3루블 정도 했으므로 이 집은 꽤 비싼 집이었다고 설명했다.
전날 저녁 식사 후 호텔로 돌아와 이리나의 설명을 정리하다 보니 통나무집 2층 월세가 거의 소 세 마리 값이었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요즘 우리나라 한우는 보통 한 마리에 500만~600만원, 때로는 1천만원이 넘는 소도 있다. 물론 한국의 최근 한우값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리 19세기의 시베리아라고 할지라도 소 세 마리 값을 월세로 낸다는 것은 준위 입장에서는 다소 무리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나는 그때의 소값은 지금하고는 많이 달랐겠지만, 그래도 당시 이 집은 동네에서 좋은 집에 속했다고 했다. 봉급의 반을 집세로 낸다는 것은 어느 시절에나,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왜 도스토옙스키는 이처럼 자기 분수에 비추어 그렇게 비싼 신혼집을 얻었을까? 유형수였던 그가 첫사랑이요, 첫 부인이 된 마리야 이사예바에게 쏟은 애정과 가슴 졸이던 결혼 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형편에 다소 무리가 됐을 그런 집을 얻은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도스토옙스키가 다소 과시하기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그는 결혼 전, 형 미하일에게도 돈을 부쳐달라고 했고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렸다. 아무튼 그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도스토옙스키가 어떤 죄로 유형수가 되어 시베리아까지 가게 됐고 어떻게 여기에서 결혼하게 되었는지 그 전말을 간략하게라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사랑과 눈물, 사형장에서 새 생명을 얻다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무거운 족쇄를 찬 채 4년간의 혹독한 유형 생활을 마친 도스토옙스키는 1854년 3월, 곧바로 750km 떨어진 세미팔라친스크의 제7 시베리아 보병대대에 사병으로 배속되었다. 형벌의 연장이었다. 그는 과거 퇴역 육군 소위였다. 도스토옙스키는 1849년 4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평소 참석하던 독서 모임에서 비평가 벨린스키가 쓴 차르(황제) 체제를 강력히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를 낭독한 죄로 체포되었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수십 명이 체포되어 그중 21명이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페트라스키 사건이다.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사형수들은 1849년 12월 22일 총살형이 집행될 세묘놉스키 연병장까지 끌려갔다. 형장에서 처형 직전 차르의 감형이 발표되면서 형 집행이 중단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도스토옙스키는 4년 시베리아 유형과 4년 군 복무로 감형되었다. 후일 알려졌지만 그것이 원래의 선고 내용이었다. 그러나 차르는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엄한 교훈을 준다는 의미로 잔인한 사형 연극을 진행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했던 최후의 순간에 극적으로 생명을 되찾게 된 도스토옙스키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감방으로 되돌아와서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그때 그는 '삶은 은총'이라고 느끼며 일시나마 행복감에 젖었던 것이다.
세미팔라친스크에서 군 생활을 하던 중에 그는 7~8세 된 아들을 가진 마리야 이사예바라는 사랑스러운 금발의 유부녀를 알게 된다. 도착 첫해인 1854년 가을 무렵부터다. 그는 온 정신을 이 여인에게 빼앗겼다. 둘은 몰래 만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급 세무 관리였던 마리야의 남편이 700km 떨어진 쿠즈네츠크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별의 충격에 좌불안석이었다. 엉엉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녀가 가족과 함께 떠나던 1855년 5월의 달 밝은 밤, 그는 친하게 지내던 지방 검사 브랑겔 남작과 함께 마차로 마을 밖 몇 킬로미터까지 따라가며 그들을 배웅했다. 술에 취한 여인의 남편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와 마리야는 전나무 아래서 마차에서 내려 포옹을 하며 안타까운 작별을 고했다. 연인을 실은 마차가 멀리 사라져 갈 때 그는 장승처럼 서서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런데 알코올중독자였던 마리야의 남편 이사예프가 전근 간 지 석 달 만인 그해 8월에 사망한다. 어떤 자료에는 신장병이라고 하고, 어떤 자료에는 폐결핵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가족에게 장례 치를 돈도 남겨놓지 못한 채 죽었다. 이별 후에도 여인과 편지 왕래를 하던 도스토옙스키는 이사예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이 여인을 돕기 위해 여행 중이던 브랑겔 남작에게 마리야에게 돈을 좀 보내주라고 부탁한다. 언제나 도스토옙스키에게 호의적이었던 브랑겔은 그 같은 부탁을 들어주었다.
여인이 미망인이 되었으므로 도스토옙스키는 한편으로는 그녀와 결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학교 교사인 베르구노프라는 젊은 경쟁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도스토옙스키는 이사예프가 죽은 후 마리야와 결혼에 이르기까지 1년 반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세미팔라친스크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다
인물이 좋았던 마리야에게는 과부가 되자 혼담도 많이 들어왔던 모양이다. 마리야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에게 들어온 혼담 이야기도 해 도스토옙스키의 가슴을 졸이게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마리야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자, 형 미하일과 1856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브랑겔 남작에게, 마리야에게 자신에 대한 황제의 사면이 머지않아 있을 것이란 점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면 그녀를 부양할 능력이 있다는 점을 보증해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마리야에게 자신이 경쟁력 있는 남편감이라는 것을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E. H. 카는 그가 쓴 『도스토옙스키 평전』에서 당시 도스토옙스키는 마리야에 미쳐 있었다고 썼다. 지나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세미팔라친스크 동북쪽의 바르나울까지 다녀올 수 있는 허가를 얻어, 몰래 쿠즈네츠크까지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 같은 사실이 발각되면 처벌을 받게 될 것이지만 그는 모험을 감행했다. 마리야를 만나 이틀을 머물고 돌아왔지만 다행히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시베리아 시절 도스토옙스키는 마리야를 알게 된 후 결혼할 때까지 3년 가까이 글쓰기도 거의 포기할 정도로 마리야에게 몰두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1856년 10월 준위로 승진한 것이다. 처음에 사병으로 세미팔라친스크로 왔던 도스토옙스키는 그래도 운이 좋았다. 1855년 3월 니콜라이 1세가 죽고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한 후 정치범에 대한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그는 1855년 11월 사병에서 하사관으로 승진했고, 한 해 후 장교대우인 준위로 올라가 결혼을 위한 경쟁력을 더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 저울질하던 마리야도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도스토옙스키는 1857년 2월 쿠즈네츠크의 정교회 성당에서 마리야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신랑이 1월에 마련해놓은 세미팔라친스크의 신혼집으로 돌아와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부부는 이 집에서 2년 반쯤 살았다. 그 뒤 모스크바 위의 트베리에 몇 달 머물다 1859년 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들어간다. 하지만 그토록 힘들게 한 이 첫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리야가 폐결핵으로 7년 만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혁명 후 소련 시절에는 세미팔라친스크의 그 통나무집에서 네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아파트였다. 1960년대에는 도시 정비 계획에 따라 이 목조 건물이 철거될 위기에 놓였었다. 지붕을 뜯어낸 상태에서 지역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역사적 장소인 이 집을 보존해야 한다고 당국에 청원해 철거를 중단했다고 한다. 그 뒤 1971년 이 목조 건물에 연결하여 콘크리트로 지은 2층 규모의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