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가수 신승훈의 '그 후로 오랫동안' 뮤직비디오에 도회적이고 지적인 이미지로 등장한 김지호. '차도녀' 같은 외모와 달리 쿨한 성격의 반전 매력을 지닌 그녀는 당대 여대생들의 워너비로 떠오르며 수많은 CF의 모델로 발탁됐다. 이후 TV 드라마 <사랑의 인사> <아파트> <8월의 신부> <유리구두> <돌아온 싱글> <그래도 좋아> <참 좋은 시절> <가화만사성> 등과 영화 <꼬리치는 남자> <부러진 화살> <순정> <강철비> 등에 출연하며 탄탄한 연기로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최근에는 tvN의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와 올리브 TV <올리브쇼>에서 남다른 먹성을 과시하며 '텃밭 브레이커' '먹지호' 등의 별명을 얻었고, <둥지탈출2>에서는 MC로 활약하며 편안하고 소탈한 모습으로 매력 지수를 끌어올렸다. 세월이 흘러도 한결같이 세련되고 시크한 외모, 시원시원한 웃음을 지닌 배우 김지호. 불필요한 생각과 감정을 비워내며 온전한 자신을 찾기 위해 숨 고르기 중이라는 그녀를 만났다.
오늘 촬영 어땠어요?
오랜만의 화보 촬영이라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는데, 너무 즐겁고 편하게 촬영했어요. 사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초라해진다는 느낌 때문에 메이크업을 더 하게 되잖아요. 오늘 콘셉트는 과장된 메이크업 대신 제 본연의 모습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았어요. 얼굴의 잡티도 없애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죠. 자연스러운 시간의 흔적을 인위적으로 다 지워내면 저만의 분위기가 사라지거든요. 이미 사람들이 다 알잖아요, 저 마흔다섯인 거.(웃음)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요?
몇 달 전에 누가 물어보더라고요. "지호 씨, 요즘 왜 작품 활동을 안 하세요?" 그래서 "올해는 좀 쉬려고요. 온전히 저한테만 집중하고 싶어서요" 그랬더니 "안식년이세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오, 그 표현 좋네요" 하며 안식년으로 공표했죠.(웃음). 올해는 유독 힘들었어요. 서른 넘어갈 때 힘들고, 마흔 넘어갈 때 힘든 것처럼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머릿속의 질문도 많아지고,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생각도 끊임없이 하게 돼요. 이날은 이게 중요했구나, 또 다른 날은 저게 중요하겠구나 하면서요. 우선순위가 계속 바뀌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로 정리되지 않을까 해요. 그러면 좀 더 단순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희 딸이 "사춘기를 지금 겪어?" 할 정도로 생각이 많은 나날이에요.(웃음)
여전히 쿨하고 세련된 이미지예요. 의외의 매력이 있다면요?
사람들이 저를 보면 되게 건강하고 밝고, 올곧을 것 같다고 하세요. 그런데 사실 정도보다는 삐딱한 걸 좋아해요. 삶에서도 그러고 싶어요. 이게 정답이라고 하는 길보다는 다른 쪽으로 첨벙거리면서 일탈해 가는 걸 좋아하거든요. 공익광고 같은 반듯한 이미지가 약간의 굴레 같아 부담스럽고 힘들 때가 있어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에요.(웃음) 그게 매력이라면 매력이고, 문제라면 문제죠.(웃음)
데뷔 이후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요?
가장 최근에 한 MBC 드라마 <가화만사성>이 생각나요. '한미순'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남편과의 문제도 있고, 이혼으로 아이와 이별하고, 고부 갈등도 겪는 등 평범한 삶이 참 좋았어요. 아이도 키워봤고, 가족도 이뤄봤고, 남편과 다투기도 해봤거든요.(웃음) 제 나이 또래에 경험하는 평범한 일상에 공감하며 한결 깊은 감정으로 표현해낼 수 있어서인지 제일 먼저 생각나네요.
배우 말고 다른 삶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그런 생각 너무 많이 하죠. 지금도 끊임없이 저 자신한테 질문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배우라는 직업은 일을 하고 있지 않아도 누군가의 말과 시선을 의식하며 늘 어느 정도 긴장을 하고 살거든요. 그 약간의 긴장도 어떤 날은 너무 힘겨울 때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공인이 아니었다면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하죠. 아직은 연기가 너무 좋고, 해보고 싶고 도전하고 싶은 역할도 무궁무진해 배우로서 욕심이 더 많아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 번 사는 인생,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지 않는 삶을 살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아요.
지호 씨만의 뷰티 노하우가 있다면요?
저는 더 예뻐야 한다, 더 돋보여야 한다, 더 인정받아야 한다는 욕심이 많지 않아요. 외모에 대한 실망이나 스트레스가 별로 없으니 좀 더 편안하게 나이 들지 않나 생각해요. 요가를 시작한 지 2년 가까이 되는데 저에게는 '인생 운동'이라고 할 만큼 너무 좋아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적극 권유 중이에요. 나 자신에 대해, 나의 몸에 대해서만 집중하며 마인드 컨트롤을 할 수 있는 시간이거든요. 욕심을 부린다고, 잘하고 싶은 의욕만으로 잘되는 게 아니고, 그날 포기한다고 실패하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요가를 하면서 오히려 인생에 대해 많이 배우는 것 같아요. 그래서 몸도 좋아지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해져요. 촬영할 때 보니 예전보다 얼굴도 한결 편안해 보이는 것 같아요.
남편 김호진 씨가 요리 잘하기로 유명해요. 집에서는 주로 누가 요리를 하나요?
아무리 요리 잘하는 유명한 셰프도 집에서는 와이프가 요리 담당이라고 하더라고요. 저희도 똑같아요. 훌륭한 요리는 아니지만 뚝딱 완성하는 '집밥'이나 남편 어깨너머로 배운 이탈리아 요리는 자신 있어요. 음식을 워낙 좋아하고 미각이 발달해서인지 대충 만들어도 맛은 얼추 비슷해요.(웃음) 며칠 전에는 일본 간장으로 간하고 멕시칸 고추를 조금 넣은 칼칼한 오뎅탕을 끓여 냈어요. 남편과 딸아이가 빨리 식당 오픈하자고 성화일 정도로 저희 집 식탁의 인기 메뉴로 등극했죠.
결혼 17년 차예요. 결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요?
배려와 양보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이쯤 되면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잖아요. 나와 다른 사람임을 인정해야 해요. 저는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남편은 친구들과 떠나는 북적북적한 여행을 즐겨요. 그래서 함께할 것을 권유하는 대신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며 '노터치'하고 있어요. 바꾸려고 노력한다거나 나에게 맞춰주길 바라는 마음을 버리니 편안해지는 것 같아요.
혼자만의 여행을 즐기나 봐요?
얼마 전 태국 치앙마이에 다녀왔어요. 펜션을 운영하는 후배 덕분에 제주도에는 몇 번 갔다 왔지만, 혼자만의 해외여행은 처음이었어요. 가족 여행도 물론 좋지만 남편이나 아이 위주로 맞추다 보면 정작 제가 하고 싶은 것은 하나도 못 하고 돌아오기 일쑤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혼자 떠나겠다고 선언했어요. 선선한 아침에는 매트 하나 들고 나가 요가도 하고, 여기저기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고, 보고 싶은 책도 실컷 읽고, 저녁엔 시원한 맥주 한잔하며 일주일을 보내고 왔더니 꽉 차 있던 여러 가지 생각이 어느 순간 쏙 내려가더라고요. 이 맛에 여행을 가는구나 싶었죠. 가족에게 다음 번엔 한 달 살이 할 거라고 얘기했어요.(웃음)
어떤 엄마, 어떤 아내,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요?
친구 같기도 하지만 참 멋지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그런 엄마, 편안하지만 때로는 언뜻언뜻 멋있는 모습도 보여줄 수 있는 아내면 좋겠어요. 다들 그렇겠지만 "저 배우가 나온다면 꼭 보고 싶어" 하는 믿음을 주는 배우가 되기 위해 더 노력하고 싶어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올해 안에 혼자만의 여행을 한 번 더 떠나고 싶어요. 이번엔 조금 더 길게요. 지금 영어 공부를 하고 있거든요. 여행 중 만나는 각국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서로 다른 문화나 생각을 배울 수 있잖아요. 그런데 언어 때문에 대화를 마음껏 하지 못하니 반밖에 배워 오질 못하는 기분이었어요. 열심히 공부해 서로의 생각을 교류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끌어올리고 싶어요. 배우로서는 마음을 잘 비워내고 열심히 준비해 내년쯤엔 좋은 작품을 통해 멋진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