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디자인을 핵심 산업으로 채택했고, 그때의 선택이 네덜란드를 지금의 디자인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 일환으로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한 것이 기존의 구태의연한 디자인 개념을 비틀고 신선한 디자인을 보여주는 실험 집단인 ‘드로흐(Droog)’ 디자인이었다. 그들은 현재의 네덜란드 디자인을 정의 내린 사람들인데, 그 핵심 멤버 중 하나가 바로 ‘네덜란드 국민 디자이너’로 불리는 헬라 용에리위스(Hella Jongerius)다. 그녀는 그저 보기에만 아름다운 제품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공예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현대적인 디자인에 접목해 전혀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낸다.
용에리위스는 1963년 네덜란드 데 메른에서 출생했고 1993년에는 아이트호벤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제품 디자인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드로흐 디자인과 함께한 작품들로 서서히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자신의 스튜디오인 ‘용에리위스 랩(Jongerius Lab)’을 설립했고, 2004년부터 세계적인 디자인 브랜드 비트라(Vitra)와 공동 작업을 시작했다. 그 외에도 이케아(Ikea), 에비앙(Evian), 마하람(Maharam) 같은 기업을 클라이언트로 해 디자이너로서 입지를 확실하게 굳혔다. 일상을 주의 깊게 연구하며 작품 제작 과정을 세밀하게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한 그녀는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며 제품부터 가구, 도자기, 텍스타일 그리고 색채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 영역에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장인들과 함께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전형적인 산업디자이너들과는 결이 달랐다. 이왕이면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천연 재료를 사용하고, 공장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장인과 함께 하나하나 공을 들여 제품이 아닌 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제품들을 보면 마치 미술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가 2000년에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개발한 ‘프린스 앤 프린세스(Prince and Pricess)’와 ‘자이언트 프린스(Giant Prince)’ 도자기는 청화백자 같은 동양의 도자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도자기에 유약을 바르기 전에 그리는 밑그림에 구멍을 뚫고 실리콘 고무로 바느질을 했다. 이 작업에 도자기 장인이 직접 참여했고, 2007년에 제작한 ‘싯포(Shippo)’ 접시 역시 일본 나고야의 칠보 기술 장인과 함께 작업했다. 2015년에는 KLM 네덜란드 항공과 함께 747 항공기의 비즈니스석 객실을 새롭게 디자인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도 네덜란드 카펫 생산업체 데소(Desso)와 함께 세계 항공업계 최초로 100% 친환경 카펫을 깔았으며 비행기 좌석에 놓이는 쿠션에도 손바느질로 디테일을 더했다. 또한 용dp리위스는 이런 대형 작업에서조차 환경을 생각하는 멋진 행보를 보여준다. 이전에는 폐기물로 여겼던 식용으로 사육하는 양의 털을 재료로 직물을 만들었고 이전 승무원들의 유니폼을 재활용한 실을 사용해 KLM 항공 고유의 파란색 패브릭을 제작했으며, 이전에 사용하던 낡은 카펫도 구호용품으로 재활용했다.
자연 친화적 디자인
전통적인 도자기 제조업체인 님페부르그(Nymphenburg)와 협업해 2004년에 선보인 ‘애니멀 볼(Animal Bowls)’ 시리즈는 많은 사람의 입에 그녀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계기가 됐다. 이 제품은 접시 위에 사슴, 하마, 달팽이 같은 동물이 앉아 있는 모양인데 패턴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만든 동물 조각이 올라와 있는 모습은 보는 이들이 감탄하기에 충분했다. 2009년에 선보인 가구들 역시 놀라우면서도 예술적이다. 방금 물에서 나온 것처럼 광택 있는 블루 에나멜을 뒤집어쓴 개구리가 당당히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프로그(Frog)’ 테이블, 겹겹으로 레이어드된 알록달록한 거북이 테이블 상판을 받치고 있는 ‘터틀(Turtle)’ 커피 테이블은 그 자체로 하나의 조각 작품 같다.
비트라와의 오랜 인연
앞서 언급한 것처럼 비트라는 용에리위스의 특별한 파트너다. 그녀는 비트라와 함께 10년간 제품의 컬러와 텍스처, 소재와 마감 등 미묘한 디테일에 대해 연구했고 그 작은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었다. 독일 출판사 게스탈텐(Gestalten)에서 발간한 그녀의 저서 <I Don’t Have a Favourite Colour>에 그간의 연구 방법과 결과물이 실려 있다. 2005년에 출시한 비트라의 ‘폴더(Polder)’ 소파는 좌우 비대칭 구조로 더 높은 위치를 집의 구조와 취향에 따라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선택할 수 있다. 폴더 소파에는 용에리위스가 이 제품 전용으로 개발한 레드, 그린, 골든 옐로 등의 강렬한 컬러 패브릭이 사용되었는데, 한 소파 안에 여러 채도의 컬러를 넣어 같은 그린이라도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든다. 2006년에 출시한 ‘더 워커(The Worker)’ 소파는 이름 그대로 일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에 적당한 디자인인데, 특히 소파의 나무 프레임과 팔걸이를 연결하는 알루미늄 다리와 직물은 비트라의 전문가가 수공예로 제작한 것이다. 2013년 제품인 ‘모찌(Mochi)’ 오토만은 일본 찹쌀떡의 형태와 질감에서 영감을 받아 이름도 그렇게 지은 것으로 동글동글한 귀여운 형태를 자랑한다. 또한 2014년에 선보인 ‘이스트 리버(East River)’ 체어는 컬러풀한 시트에 앞바퀴를 옵션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의자다. 본래 UN의 노스 델리기츠 라운지를 위해 디자인된 제품이었으며 그해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에서 가장 사랑받은 제품 중 하나로 꼽힌다. 용에리위스의 영역은 이처럼 어느 디자이너보다도 크고 넓고 깊다. 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이토록 색을 연구하고 재료를 개발하고, 거기에 환경까지 생각하는 디자이너는 아마 그녀밖에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