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 점수를 매기면요? 90점요. 온전히 행복하다는 감정이 행복으로 가득한 건 아니잖아요. 그 안에 걱정과 고민도 있으니까 10점은 뺐어요. 단, 현장은 100점이에요. 이번 작품과 현장은 저한테 온 선물이었어요."
아는 사이로 지내던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면서 진짜 연애를 하는 이야기를 담은 JTBC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종영 후 만난 예쁜 누나 '윤진아', 그러니까 손예진은 동료 배우와 감독, 촬영 현장, 스태프와 이별하는 중이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안판석 감독의 서정적인 연출과 현실적인 스토리, 손예진과 정해인('서준희' 역)의 '케미'로 대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야말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신드롬이었다. 절친의 동생인 남자와 누나의 친구인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가족과 친구에게 연애를 고백하던 순간, 주변의 반대에 부딪히는 순간까지 현실적으로 그려내 많은 이들의 감성을 자극한 드라마였다. 손예진 역시 시청자처럼 드라마에 푹 빠졌다. 이 작품이 남긴 여운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어 올해 안에 또 다른 작품을 시작할 수 없을 정도란다. 그만큼 작품을, 윤진아를 천천히 보내고 싶다.
"언제까지 여운이 가슴에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느낌상 오래갈 것 같아요. 드라마에서 비가 오는 날 많은 일이 있었어요. 진아와 준희가 사랑에 빠지고, 이별을 했다가 재회했죠. 비만 오면 드라마에 흘렀던 음악이 생각나고 장면들이 떠오를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작품이 끝나면 금세 빠져나오는 스타일인데 이번엔 왜 이럴까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잊겠지만 한편으론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그럼에도 촬영을 하면서 답답했던 지점이 있었다. 특히 극에서 윤진아가 함께 미국에 가자는 서준희의 제안을 거절하고 홀로 한국에 남아 있던 때가 그랬다. "왜 따라가지 않느냐"며 가슴을 두드린 시청자의 반응에 그녀 역시 공감한단다.
"서준희가 미국으로 떠날 때 따라가지 않는 윤진아가 답답했어요. 하루는 안판석 감독님께 "윤진아는 왜 서준희를 따라 미국에 가지 않아요? 보내주세요"라고 떼를 쓰기도 했어요. 저는 일단 감정에 솔직하고 보자는 편인데 윤진아는 남들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지는 사람이더군요. 윤진아를 보면서 인간이 나이를 먹는다고 혹은 사랑을 한다고 성숙해지는 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게 사람이잖아요. 우리는 한 인간이 아픔을 겪고 보란 듯이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실수를 거듭했지만 드라마는 결국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이별의 시간을 가졌던 두 남녀가 사랑에 빠졌던 그 순간과 같은 모습으로 재회한 것. 빨간 우산과 초록 우산을 나눠 쓰며 설렘을 느꼈던 두 사람은 이별 후에도 그 우산으로 서로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독특한 점은 이 드라마가 여느 드라마와 달리 3년의 이별을 '3년 후'라는 자막의 도움 없이 오롯이 연기로 풀어냈다는 것이다.
"감독님이 3년 후라는 자막을 넣지 않는다고 하셔서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그 시간을 어떻게 표현할지 많이 고민했거든요. 어떤 상황이 와도 밝은 사람인 캐릭터의 '밝음'을 지우기로 했죠. 어느 지점에서는 혼이 빠진 느낌, 알맹이를 잃어버린 느낌, 허전하고 외로워 보이게 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동안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홀로 꿋꿋이 지내면서 느꼈던 외로움을 표현하고 싶었거든요."
손예진은 윤진아의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술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극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뿐만 아니라 감정을 극대화하려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고. 그러다 보니 주량이 늘어 뿌듯하다고 농담까지 하는 손예진이다.
"극 초반 '이규민(오륭 분)'에게 차이고 '서경선(장소연 분)'과 노래방 앞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이 있어요. 그 장면에서 진짜 술을 마셨죠. 술을 마시고 안 마시고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더군요. 솔직히 말해도 될까요? 술의 힘을 빌렸어요. 감정 때문에 술을 마시기도 했거든요. 마음속 이야기를 할 때 "술 한잔하자"고 하는 것처럼 술이 친구가 돼줬어요. 특히 사무실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야근하다가 춤을 추는 장면에서는 맥주가 간절했죠. 춤을 즐겨 추지 않아서 맨정신으론 못 하겠더라고요.(웃음) 이제 맥주 3캔은 기분 좋게 마실 정도로 주량이 늘었어요."
"어릴 때 어른들이 사랑할 수 있을 때 얼마든지 하라고 충고하셨는데 귀담아듣지 않았어요. 이제는 진짜 사랑을 경험할 기회가 적다는 걸 느껴요. 이상형요? 전 외모는 안 봐요. 그릇이 큰 사람이면 좋겠어요."
안판석 감독은 손예진을 복서 '무하마드 알리'라고 비유한 바 있다. 연기하러 촬영장에 들어서는 모습이 링 위에 오르는 복서 같다는 것. 손예진은 실제로 촬영장에 들어서기 전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장면에 대한 생각을 하곤 하는데, 그럴 때면 수술을 하기 전 손을 소독하는 의사의 마음이 어떨지 상상된단다. 그러고 현장에 도착하면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외롭게 싸우는 시간이 이어진다고 이야기했다.
"연기하면서 비장함을 가진다고 해야 할까요? 영화 <덕혜옹주> 촬영 때 심적으로 힘들었어요. 역사적 의미가 있는 한 여자의 일생을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돼 새벽 5시에 일어나 음악을 들으면서 마인드컨트롤을 했죠. 덕혜옹주가 일생을 마감하는 정신병원 장면 촬영 전에 이틀을 쉬었는데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물론 (박)해일('김장한' 역) 오빠가 옆에 있어 든든했지만 <덕혜옹주>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러웠어요. 이 영화가 잘되지 않으면 여배우 중심의 영화가 지금보다 더 사라지겠다는 생각 때문에 어깨가 무거웠죠."
여주인공을 타이틀로 내건 드라마인 <밥 잘사주는 예쁜 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상대 배우가 신인이었기에 현장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막중했을 터. 그럼에도 시나리오가 좋아 출연을 결정했는데 상대 배우인 정해인이 최고의 파트너로서 역할을 다했다.
"어느 때부턴지 모든 것이 검증된 상황을 선택하기 어려웠어요. 상대 배우가 신인이든 유명하든 가장 먼저 시나리오를 고려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해인 씨는 최고의 파트너였어요. 안판석 감독님과 제가 이 정도로 잘할 줄 몰랐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었죠. 해인 씨는 촬영이 거듭될수록 캐릭터와 더 닮아가더군요. 그를 보면서 제가 신인 배우였을 때 연기를 어떻게 했는지 떠올렸어요. 실제로 해인 씨는 밥 잘 사주는 착한 동생이에요.(웃음) 착하고 따뜻하고 단단하죠. 앞으로 어떤 연기를 할지 궁금해요. 저 친구가 지닌 색과 이미지가 많아서 다양한 연기를 보여줄 것 같아요."
드라마 속 손예진은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짓는다. 보는 사람마저 행복해지는 미소랄까? 그녀의 모습에서 여배우 중심의 멜로를 성공적으로 그려냈다는 뿌듯함이 느껴졌다.
"사랑이 어느 지점에서 끝났는지 모르게 끝난다는 설정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우리는 사랑의 시작과 끝을 잘 모르잖아요. 그 안에 있는 누구나 꿈꾸는 순간,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었던 지점에서 윤진아를 만났어요. 예쁜 장소에서 예쁜 대사를 하는 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현실적인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아요. 아마 20대였다면 표현하지 못했을 거예요. 누나 역할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이 작품을 만난 게 선물이고 행운이에요.(웃음)"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는 3040대 여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대다수 작품에서 여배우의 역할은 20대 싱글 여성 아니면 아이 엄마로 양분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배우들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나 JTBC 드라마 <미스티>처럼 여성 중심의 드라마에 열광한다. 얼마 전 인터뷰 때문에 기자와 만났던 배우 임수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임수정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팬이라며 좋은 작품 속에서 예쁘게 연기하는 손예진이 부럽다는 기색을 내비췄다. 손예진 역시 그녀의 마음에 공감을 표했다.
"배우들의 목마름이 있는 것 같아요. 최근 자극적인 소재, 드라마틱한 상황이 이어지는 드라마가 많았어요. 영화 쪽은 남성 중심의 영화가 많았고요. 많은 여배우가 현실적이면서 재미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갈증이 있을 거예요. 저 또한 마찬가지였죠. 그런 시기에 이 작품을 만난 것이 감사해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연출한 안판석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 "컷"을 외치지 않는다. 그러곤 배우가 하는 것을 지켜본단다. 배우들이 대본을 넘어, 살아 숨 쉬며 연기할 수 있는 현장인 것이다. 이 같은 현장 분위기 때문에 손예진은 더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컷'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애드리브를 많이 했어요. 감독님은 배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만드시는데, 준비되지 않은 것들은 정확하게 잡아내세요. 준비를 많이 하게 만드시죠. 윤진아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선을 보고 서준희를 만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윤진아는 본능적으로 예쁘게 하고 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선 자리에 머리도 감지 않고 간다는 게 비현실적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꾸미고 갈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이 있을 것 같아 걱정됐어요. 그래서 해인 씨에게 "그런데 왜 옷을 이렇게 예쁘게 입고 갔어?"라고 말을 해달라고 부탁했죠. 전 "누나가 나이가 몇이니?"라고 답했죠. 그것도 다 애드리브였어요."
손예진은 드라마에서 진짜 연애를 한바탕한 후 사랑할 땐 후회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겁이 나고 두렵다고 감정을 퇴색시키지 말고 그 순간에 깊게 사랑하겠다는 것. 하지만 사랑의 끝이 결혼이라곤 생각하지 않기에 지금 당장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단다.
"이제 주변에서 결혼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왜 안 물어볼까?'라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결혼은 외로운 자유냐 아름다운 구속이냐의 문제인데 지금 이대로 지내는 게 좋아요. 부모님은 결혼을 해야 안정된다고 생각하시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거든요. 여태까지 스캔들이 없었던 건 일을 열심히 한 덕이에요. 솔직히 말하자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단 한순간도 사랑이 먼저였던 적이 없었거든요. 어릴 때 어른들이 '사랑할 수 있을 때 얼마든지 하라'고 충고하셨는데 귀담아듣지 않았어요. 이제는 진짜 사랑을 경험할 기회가 적다는 걸 느껴요. 이상형요? 전 외모는 안 봐요. 그릇이 큰 사람이면 좋겠어요. 밥그릇 아니고요.(웃음) 제가 기댈 수 있는 존재, 나를 보듬어주는 사람이 좋아요."
손예진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통해 '멜로퀸'의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아직까지 멜로에 대한 갈증은 남아 있다. 언젠가는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나 <화양연화> 같은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 사람의 심리가 궁금한 예쁜 누나, 손예진이 50대에 그릴 멜로가 기다려지는 이유다.